외국희곡

안톤 체호프 '이바노프'

clint 2021. 3. 29. 11:10

 

 

 

러시아 문학이 창조해낸 쓸모없는 인간19세기 말 전형이 바로 이바노프다. 젊은 날의 열정과 강력한 의지,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보여준 불굴의 투지가 모두 소진되어 우수에 빠져버린 인간. 그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이바노프를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사샤의 청순하고 눈물겨운 사랑도 결단코 출구는 아니다. 이바노프가 최종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빙안은 무엇인가. 누가 그에게 쓸모없다고 돌팔매질을 할 수 있겠는가!

모스크바의 코르쉬 극장장의 요구로 만들어져 1887년 초연되었다. 안톤 체호프가 10일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성공적인 초연에도 불구하고, 안톤 체호프는 이바노프를 부끄러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안톤 체호프는 그의 형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바노프에 대해 "내 작품 같지가 않아", "배우들이 자신의 역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대사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라고 썼다. 결국, 안톤 체호프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였고, 초기의 이바노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수정본을 만든다. 이 수정본은 1889년 세인트 피츠버그에서 처음 상연되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으며, 이바노프는 안톤 체호프의 대표 작품들의 초석이 되었다.

 

1

이 연극은 니콜라이 이바노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바노프는 안나 페트로브나와 결혼한 지 5년째이다. 안나는 결핵에 걸렸지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이바노프의 먼 친척이자 이바노프의 부동산을 관리해 주고 있는 미하일 보르킨은 마을 사람들에게 항상 쉽게 돈 버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허풍을 떤다. 정직한 의사 리보프는 이바노프에게 안나가 결핵에 걸려 죽어가고 있으니, 그녀를 크림반도로 데리고 가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라는 조언을 한다. 그러나, 이미 지나이다에게 9000 루브르를 빌린 이바노프에게는 아내를 크림반도로 데리고 갈 능력이 없다. 마을 사람들이 아픈 아내를 내버려두고 레베데프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바노프를 나무라지만 이바노프는 여전히 레베데프의 집에 들락거린다. 1막은 레베데프의 집으로 향하고 있는 이바노프를 안나와 리보프가 뒤쫓는 장면에서 끝난다.

2

레베데프의 집에서 한바탕 파티가 벌어지고 있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이바노프가 안나랑 결혼한 이유는 유산 때문이라고 수군거리고 있다. 하지만, 사실 안나는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 이바노프와 결혼함과 동시에 유산 상속 자격을 상실했다. 2막은 이바노프와 사샤가 키스를 하고 있고, 하얗게 질린 안나가 이를 몰래 지켜보는 장면에서 막이 내린다.

3

이바노프와 마을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안나와 이바노프가 다투는 중에, 이바노프가 안나에게 "당신은 지금 결핵으로 죽어가고 있어!"라고 소리치는 장면에서 막이 내린다.

4

(1년 후) 안나는 세상을 떠났다. 이바노프와 사샤의 결혼식이 막 시작할 무렵 리보프가 등장한다. 리보프는 "이바노프는 유산 때문에 사샤와 결혼하려 할 뿐, 사샤를 전혀 사랑하지 않아. 비열한 자식!"이라며 이바노프의 비밀을 폭로한다. 이바노프는 리보프에게 권총을 겨누고, 사샤는 이바노프를 막아서며 이러지 말라고 말린다. 무대 뒤로 들어간 이바노프가 스스로에게 권총을 겨누고 자살한다.

 

 

 

이바노프18879월말 10월 초에 탈고되었고. 이내 낭독회가 개최되었다. 최종 출판을 위한 검열 일자는 18871210일 이었다. 이바노프의 첫 번째 공연은 188711월 중순 사라토프의 지방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코르쉬 극장에서의 이바노프>초연은 같은 해 1119일 보르킨 배역을 맡은 배우 스베틀로프의 후원 흥행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면을 살펴보면 19세기 제정 러시아에서 검열은 공연보다 출판에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일회적인 성격이 강한 공연보다는 지속성을 가진 서적에 방점을 두고 검열이 진행된 것이다코르쉬 극장에서 상연되었을 때 이바노프'45장 희극' 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극장에서 1889131일 초연된 이바노프는 체호프가 그사이 여러 번 개작하여 '4막 드라마'로 변경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체호프의 희곡 이바노프)는 희극이 아니라 드라마로 규정된 1889년 판본이다. 희극과 드라마 사이에는 사실 건너기 힘든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드라마 장르에는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등장인물들의 사유와 언행에는 희극의 그것들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희극 가운데 세태희극이나 풍자희극에는 사회,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하지만, 웃음을 겨냥하는 희극은 대개 개인적인 결함을 가벼운 웃음으로 징벌하는 선에서 멈춘다. 이런 점에서 이바노프의 장르 변화는 작품을 대하는 체호프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모스크바 코르쉬 극장에서 성공하지 못했던 이바노프는 알렉산드르 극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1889218일 쉐글로프에게 보낸 체호프의 편지를 보자.

"나는 평온하며. 내가 해냈고. 얻어낸 것에 완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며,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눈은 눈썹보다 더 높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도 내가 들었던 그런 말은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지금까지 단막극만을 써왔던 체호프가 이바노프>를 계기로 성공한 극작가로서 스스로를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 게 쏟아진 환호와 박수갈채를 액면 그대로 수용하지도 않았고,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신출내기 극작가의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르 극장에서의 성공은 단막극 의 성공에 이어 극작가 체호프의 명성을 분명하게 확인시킨 사건이었다.

이바노프에서 체호프는 훗날 4대 장막극에 나타나는 자신만의 고유한 드라마 시학을 확연히 선보이지는 못했다. 오히려 낡은 극작술이 곳곳에서 자태를 드러냈다. 불필요한 다수의 권총과 장총의 존재, 전통적인 어릿광대를 연상시키는 등장인물들, 사건 진행과 무관한 숱한 독백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바노프에는 훗날 체호프 극작술의 몇 가지 특징이 보이기도 한다. 상호이해가 불가능한 상황, 보이지 않는 인물의 존재와 의미, 여러 인물에게 부여된 작가의 목소리. 노동의 문제, 시간에 함몰된 인간들 의 이야기 등등.

그것과 더불어 이바노프에서 우리는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인 푸쉬킨이 발원시킨 '쓸모없는 인간'의 드라마적인 변형과 만난다. 러시아 문학 백과사전>을 보면 이들에 대해 "대개 귀족으로서 타고난 사회적 환경을 싫어하고, 환경과의 관계에서 주인공은 지적이며 도덕적인 우월을 인식하고 있지만, 동시에 정신적인 피로, 깊은 회의주의, 언행 불일치, 사회적인 수동성을 가진다.”라고 적고 있다. 이들은 '쓸모없는 인간''잉여인간'으로도 불리면서 푸쉬킨의 불멸의 대작 예브게니 오네긴의 주인공 오네긴, 레르몬토프의 대표작 우리시대의 영웅에 등장하는 페초린, 곤차로프의오블로에 나오는 오불로모프 등으로 이어진다. 이바노프는 '쓸모없는 인간'이 드라마께서 구현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태양처럼 젊었던 시절에 불살랐던 의지와 투지, 활화산 같았던 사랑과 열정을 뒤로한 채 내부적으로 무너지면서 마침내는 돌아올 수 없는 세계로 표표히 사라져가는 인간 이바노프. 우수와 상념에 사로잡힌 채 완전한 절망과 낙담에 휩싸며 꽉 막혀버린 출구를 바라만 보고 있는 이바노프. 우리는 그의 형상에서 19세기 제정 러시아 인텔리의 비참한 상황과 완전히 무기력한 지식인의 가련한 최후를 만나게 된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톤 체호프 '숲의 수호신'  (1) 2021.03.30
체호프 '담배의 해독에 관하여'  (1) 2021.03.29
안톤 체호프 '갈매기'  (1) 2021.03.28
안톤 체호프 '고니의 노래'  (1) 2021.03.28
안톤 체호프 '큰길에서'  (1) 2021.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