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돌이 혹은 추방된 기사들>(1677)은 애프러 벤(Aphra Behn)의 17개 극작품 중 무대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토머스 킬리그루(Thomas Killigrew)의 <토마소(Thomaso)> (1654)를 기반으로 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는 가운데, <떠돌이>는 당대에 표절시비와 부도덕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작품 후기에서 벤은 본인의 작품이 1632년에 초연된 리처드 브롬(Richard Brome)의 <노래The Novella)>에서 아이디어를 도용한 것으로 비판 받을지도 모르지만 사소한 구성 부분만 브롬에게서 가져왔고, 전반적인 플롯은 킬리그루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 외는 본인의 작업의 결과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초판 출판 당시에는 여성이 쓴 작품의 경우 받게 될 편견을 우려해, 벤은 프롤로그에서 극의 저자를 ‘그(he)’라고 지칭하며 여성임을 감춘 채 익명으로 <떠돌이>를 내놓았다. <떠돌이>의 최초로 기록된 공연은 1677년 3월 24일로, 찰스 2세도 관람하러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떠돌이>는 스페인 점령하의 나폴리를 배경으로 카니발 기간에 크롬웰 치하의 영국을 떠나온 왕당파 기사들의 연애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페인 자매 플로린다와 헬레나, 그리고 영국인 기사인 벨빌과 윌모어를 주인공으로 그들의 주변인물들과 함께 연애와 결혼 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이야기들이 주요플롯이다. 두 자매가 강제 결혼과 수녀원 행이라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 카니발 기간 동안 도망쳐 나와 본인이 원하는 남성을 배우자로 선택하고 결혼하는 것이 그 중심에 놓여있다. 카니발이라는 축제기간을 통해 등장인물들은 기존의 구속과 제약에서 벗어나 본인들의 욕망을 마음껏 펼칠 기회를 갖고, 가면과 변장이라는 장치를 통해 자유롭게 한판 놀아볼 기회를 갖는다. 이처럼 축제기간을 배경으로 설정해 벤은 플로린다와 헬레나를 통해 결혼문제에서 남녀 관계와 욕망의 주체로서의 여성의 문제를 부각한다. 또한 이들의 이야기에 안젤리카라는 당대 유명한 고급창부를 등장시켜 여성의 욕망을 무시하고 아버지와 오빠의 의지를 강요하는 강제결혼과 돈으로 사고파는 사랑의 세계인 매춘의 속성이 유사함을 보여준다.

<떠돌이>는 한마디로 “여성의 관점에서 본 사랑과 결혼에 관한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플로린다를 중심으로 오빠인 페드로와 아버지에 의해 남편감이 결정되는 가부장제 사회의 ‘강제결혼’ 문제점이 집중 조명된다. 플로린다는 벨빌을 사랑하지만 아버지는 늙은 부자 돈 빈센티오를, 오빠는 스페인 총독 아들 안토니오를 남편감으로 제시한다. 아버지와 오빠가 보는 결혼은 돈이 걸린 상업적 거래관계다. 플로린다는 이런 결혼을 여성을 노예로 만드는 것으로 비난하고, 헬레나는 강제결혼을 “감옥보다 더 나쁜 감금 상태”이자 “다른 남자와의 간통보다 더 나쁜 것”으로 규정한다. 남성들의 의지가 여성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비단 결혼문제에서만이 아니다. 오빠와 아버지는 플로린다를 자신들이 원하는 남성과 결혼시켜 버리려고 하는 한편, 헬레나는 수녀가 되도록 결정했다. 이와 같이 남성들의 의지가 강요되고 남성이 여성의 운명을 결정짓는 상황에서 벤은 두 여주인공들이 모두 그에 반항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운명과 사랑의 주체적 존재가 되도록 그려준다. 그리고 벤은 조국을 떠나 무일푼인 벨빌과 가난한 윌모어가 각각 두 자매의 짝이 되게 정함으로써, 남성들과는 달리 여성들의 배우자 선택 기준은 금전적 이해관계와 무관하고 사랑에 기반한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벤은 헬레나를 통해 여성의 성적 자유를 여성의 관점에서 펼쳐 보이게 해준다. 윌모어와 헬레나의 연애에서 남녀가 성적으로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결혼이 결정된다. 헬레나는 수녀원행을 결정한 오빠의 의사에 반대해 축제기간에 한번 놀아보자며 상대 남자를 찾아나서고, 헬레나의 눈에 든 상대는 ‘떠돌이’ 윌모어라는 바람둥이 남성이다. 사랑의 대상을 주저 않고 바꾸는 윌모어는 안젤리카의 이름만 듣고도 그녀를 갈망하고, 헬레나의 얼굴을 보고는 헌신을 맹세하고, 술에 취해 플로린다를 강간하려 드는 등 난봉꾼의 전형이다. 인습과 도덕도 뛰어넘으며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려는 헬레나는 이런 바람둥이 윌모어에게 자신을 “지조 없는 헬레나”로 소개하며 성 문제에 있어 그와 대등한 여성 바람둥이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결혼에 구속되기 싫어하는 윌모어를 결혼이라는 틀 속으로 끌어들이는 주도적인 역할도 맡는다.

<떠돌이>의 또 다른 주요한 여성 인물은 바로 “안젤리카 비앙카"다. 벤은 안젤리카라는 고급창부를 주요 플롯에 얽히게 하여 여성의 욕망을 무시하고 아버지와 오빠의 의지를 강요하는 강제 결혼과 돈으로 거래되는 사랑의 세계인 매춘의 속성이 유사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벤이 작품 후기에서도 거론하고 있듯이, 안젤리카는 <떠돌이>의 소재가 되었던 킬리그루의 작품에서 사용된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유일한 경우다. 이는 다른 인물들의 이름을 모두 변경한 것과는 대조적이며, 벤에게 안젤리카라는 인물이 특별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벤은 안젤리카를 무대에 등장시키기 전에 남성들의 입을 통해 소개하고, 초상화라는 그림 형태로 먼저 소개한다. 이를 통해 안젤리카라는 존재 자체가 여성이 남성의 성적 흥정 대상인 상품이며 쾌락을 주기 위한 예술품으로 기능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벤은 주요 여성 인물과 결혼 관계에 놓일 남성들이 안젤리카를 욕망하는 상황을 설정한다. 플로린다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안토니오, 헬레나와 결혼하게 될 윌모어뿐 아니라 두 자매의 오빠인 페드로 역시 안젤리카를 원하며 그녀를 얻기 위해 결투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남성들에게 욕망의 대상이자 금전적 거래의 대상이며 하나의 상품인 안젤리카가, 자신의 몸을 놓고 최고 금액을 제시하는 남성에게 자신을 내주는 직업을 가진 그런 여성이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한 남성은 바로 무일푼인 윌모어다. 매춘부인 그녀가 오히려 그 어느 누구보다도 순수한 사랑을 주장하며 금전적인 결합에서 가장 벗어난 사랑의 예가되는 인물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안젤리카는 당대 연극 무대에서 창녀와 같은 대접을 받은 벤이 자신을 투영하고 자신과 동일시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떠돌이>는 카니발기간의 카니발 복장과 가면 착용으로 인한 정체 오인이라는 전형적인 희극의 상황을 통해 재미를 유발하는 동시에 주제 측면에서도 중요한 사항을 제시한다. 특히 블런트를 중심으로 한 희극적 상황을 통해서 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창녀를 기혼의 귀부인으로 여기고 그녀와의 하룻밤을 위해 뒤쫓아간 블런트가 결국 창녀에게 속아 옷과 돈을 다 빼앗기고 골탕먹는 상황이 그 예다. 블런트는 그 여자의 정체를 묻는 친구들에게 이름은 알아 무엇 하느냐고 반문하고 예쁘고 젊고 친절하니 다른 건 알 바 없다고 반응한다. 블런트의 이런 태도는 여성을 외모와 육체만으로 파악하고 창녀와 동일시하는 남성들의 태도를 반영한다. 여성을 성적도구로만 본 블런트는 결국 귀부인 행세를 한 창녀의 속임수에 걸려들어 골탕 먹고 조롱거리가 됨으로써 그와 같은 남성들에 대한 비판이 되고 있다. 또한 창녀에게 속아 여성 전체에 대한 보복을 결심한 블런트가 오삐를 피해 온 플로린다를 강간하려고 작정하는 장면과 술에 취한 윌모어의 강간 미수 장면을 통해서도 벤은 남성들의 난봉문적인 면이 폭력과 강간으로 이어질 위험에 여성들이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윌모어는 저항하는 플로린다에게 오히려 미모의 여성이 야심한 밤에 집 밖에 나와 있는 게 문제라는 식의 논리를 펼친다. 남성을 성적으로 흥분시킨 여성이 비난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며 강간의 책임을 오히려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작품의 큰 틀에서 보면 매춘의 속성과 맞닿아 있고 여성의 욕망을 무시한 강제결혼의 기본속성과도 상통한다
<떠돌이> 의 원제인 ‘rover’라는 단어는 ‘왕정복고 시대에 ‘바람둥이’나 ‘난봉꾼’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작품 속에서 ‘떠돌이’로 직접적으로 불리는 윌모어의 상대인 헬레나는 수녀의 길을 거절하고 ‘여성 떠돌이(she-rover)’의 이름을 얻기를 자원한다. 벤은 헬레나 같은 주체적인 여성과 그들의 자유로운 욕망 추구의 모습을 <떠돌이>에 담아냈으나, 이를 당대 사회가 허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시한다. 플로린다와 벨빌의 결혼, 윌모어와 헬레나의 결혼에서 오빠인 페드로가 누이의 결혼을 승낙하는 과정을 포함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벤은 카니발이라는 상황을 이용해 당대사회에도 전적일 수 있는 여성의 욕망이라는 주제를 결국은 희극적인 틀 내에서 대중이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극을 마무리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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