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피카소 '꼬리가 잡힌 욕망'

clint 2018. 5. 20. 13:56

 

 

 

 

1935년부터 피카소는 글쓰기라는  새로운 분야에 착수했다. 그리고 몇 달 동안 화필을 옆에 제쳐놓고 오직 시작에만 전념했다.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로 쓴 그의 시들은 지워 버린 부분, 얼룩, 그리고 데생과  채색으로 그득하다. 그는 희곡도 두 편  썼는데, <꼬리 잡힌 욕망>(1941년)과 <네 명의 어린 소녀들>(1952년)이 그것이다.

 

 

 

꼬리 잡힌 욕망(5막 2장)    장면은 불안 가족의 집, 부엌과 욕실을 겸한 침실인 하수구에서 벌어진다.
화가에게 연극은 독창적이고 무궁무진한 표현수단이 될 수  있다. 무대라는 공간에서 화가는 자신의 회화세계를 연출할 수 있으며 의상 디자인을 통해 자시느이 색채감과 새로운 형태미를 적용해 볼 수도 있다. 또한 문학이나 음악과 조화를 이루며 미술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감수성이 최대한 발휘되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서커스의 세계와 어릿광대들, 곡예사의 열렬한 찬미자였던 피카소는 무대세계와  일찍부터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전쟁 직후, 장 콕토는 피카소에게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을 위해  의상과 무대장치를 위뢰했다. 이렇게 해서 피카소는 1917년에서 1924년 사이에 당시의 저명한 음악가들과 함께 <퍼레이드><세뿔 짐승><메르큐르와 퓰치넬라> 같은 창작 발레극에 참여하게 된다.
초현실주의적 자동 기술법으로 쓰여진 {꼬리 잡힌 욕망}은 1944년 공연되었고, 그 배역이나 연출을 맡은 사람들이 당대의 유명인인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조르주 위네, 알베르 카뮈 등이어서 이 공연은 잊을 수 없는 사건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하단 사진 참조)

그후 스페인에서 이 작품을 공연하였으나 공연도중 관객들의 난동으로 중간에 막을 내려야 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 화가의 색다른 연극은 그림만큼의 감동은 못 주고 망신만을 주게 된는데.. 너무 난해하고 아무런 해설 없이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작가 특유의 주관적 표현때문이었다.
국내에서도 공연된 작품이다.  (극단 가교)


<피카소>에스파냐 화가. 말라가 출생. 회화뿐 아니라 조각·석판화·도자기·소묘·무대장치·벽화·태피스트리 등도 제작하였으며 미술사상 제작량이 가장 방대하다. 20세기 조형에 가장 큰 변혁을 일으켰던 입체파의 창시자이며, 양식은 사실주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폭넓다. 그의 회화역사는 기법과 주제가 다양하게 변화하며, 그 주제의 중심은 전쟁과 사랑·빈곤과 절망·노여움과 기쁨·사랑과 성(性) 등이다. 미술교사였던 아버지 J.R. 블라스코(피카소는 어머니 쪽 姓)의 가르침을 받아 소년시절부터 뛰어난 사실적 기법과 정서표현의 재능을 보였다. 1895년 바르셀로나로 옮겨 이른바 <카탈루냐 르네상스> 약진기의 카탈루냐시에서 지내고, 97년 아르누보 시기에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에서 잠시 공부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는 회화적·인간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1900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1904년부터 파리에 정착하였다. 1900년 전후까지는 주로 카바레·바 등을 강한 색채로 격렬하게 나타냈으나, 이른바 <청색시대>로 불리는 1901∼1905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절망·슬픔을 청색으로 표현하였다. 그 예로 한쪽 어깨를 올려 표현적 자세로 그린 《생(生, 1903)》 《늙은 그리스도교도(1903)》 등이 있다. 1904년부터 몽마르트르의 집합 아틀리에 <세탁선(洗濯船>에 거주하며 M. 자코브·G. 아폴리네르·A. 드랭·A. 살몽 등과 교우하였다. 이 무렵부터 장밋빛이 돋보이며 소재는 《공굴리기 곡예(1905)》 같이 곡예사·유랑 예술인이 많아지는 <장미빛시대(1905∼1906)> 를 이루며, 부드러움·사랑을 주제로 하였다. 1906년 여름 안도라의 고솔마을에서 지낸 뒤 P. 세잔·이베리아 조각·아프리카 흑인조각의 영향을 받으면서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原始 主義)으로 전향, 형태의 단순화·평면화 등의 조형성을 추구하여 이듬해 입체파의 선구가 되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비슷한 회화이론을 지니고 있던 G. 브라크와 함께 사진적 형식의 해체, 대상의 분석·종합에 대한 탐구가 제 1 차세계대전 무렵까지 이루어졌다. 11년 앵데팡당전 이후 입체파의 새로운 미학과 수법은 현대미술에 있어 결정적인 것으로, 20년대까지 끊임없이 나타났다. 제 1 차세계대전, 이탈리아 여행, 발레리나 O. 코흘로바와의 결혼 등을 계기로 19∼24년까지 그리스풍의 당당한 인간상을 표현한 <신고전주의시대>로 불리는 밝은 그림을 그렸다. 그 뒤 표현주의·초현실주의 등을 받아들이면서 《거울 앞의 소녀(1932)》와 같은 다채롭고 풍부한 회화세계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30년대 후반 그리스신화를 소재로 한 《미노타우로스 연작》, 독일 공군에 의한 바스크 지방 게르니카의 폭격을 그린 대작 《게르니카(1937)》로 절정에 이르며, 30년대 유럽의 불안과 전쟁에 대한 노여움을 표현하였다. 제 2 차세계대전중 파리에 머물렀고, 44년 파리 해방 뒤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그렸다. 전쟁 후 남프랑스 앙티브, 이어서 발로리스에 거주하면서 많은 도자기를 제작하였다. 40년대 중반부터 점차 밝음·유희성 등이 나타나며, 55년에 칸, 61년에 무쟁에 거주하였다. 만년에도 제작활동을 계속하여 판화 등을 포함해 하루에 여러 점을 제작하는 다작 경향을 보였다. D.R.S. 벨라스케스·J.L. 다비드·G. 쿠르베 등을 개작한 작품 연작군(群), 6·25를 주제로 한 《학살(1951)》, 발로리스성당의 《전쟁과 평화(1952)》, 유채·판화를 포함하여 <화가와 모델> 연작 등 약 5만 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림 외에 희곡 《꼬리 잡힌 욕망(1941)》과 시 등도 썼다. 바르셀로나와 남프랑스 앙티브에 피카소미술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