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외수 '들개'

clint 2018. 5. 1. 22:01

 

 

 

‘들개'는 부모를 잃은 한 작가 지망생 여인과 역시 가정이 없는 화가 지망생 남자가 도시 외각의 버려진 학원 건물에서 세상과 단절을 시도하며 살아가는 1년여의 기록이다. 들개는 마치 독자인 나와 작가 그리고 작품 속의 시인과 화가 그리고 작가인 그녀를 닮은 같은 느낌이었고 한마디로 소설을 읽었다기보다 풍경을 감상한 느낌이었다.

여자는 글을 쓰기 위해 철저히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었고, 남자는 역시 상업주의 세상과 타협하려 하지 않은 채 건물 안에 이백 호 크기의 캔버스를 짜 놓고 아흔아홉 마리의 들개들을 그려나간다. 글쓰기의 치열함이 작가 이외수가 얼음밥을 먹으면서 그것을 극복하며 기뻐하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아마 나도 그분의 작품에 동감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세상과 등을 돌린 만큼 그들은 늘 먹거리와 추위에 떨었으며 급기야는 쥐까지 잡아먹는다. 그러던 중 결국 여자는 남자의 떨어진 화구를 보충하기 위하여 맥주홀에서 남자에게 몸을 팔고 그 돈으로 물감을 마저 장만한다. 어쩔 수 없이 세상과 타협하면서 어느새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 가는 것이다. 그녀의 살신성인의 진정한 사랑의 보여준 그녀에게 따스한 시선을 주고싶다. 그가 들개를 그리기 위해 고전분투하고 있을 때 그녀는 새벽 열차를 타고 시간 강사와 바다로 가는 것이다. 그녀가 그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아! 아! 하고 감탄을 할 때는 마치 내가 바다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고독을 견디다가 결국에는 바다로 가는 열차에서 인간은 혼자라는 것을 깨닫고 바다에서 삶의 의미를 찾은 것이다. 그 깊고 푸른 바다. 그 바다 같은 사랑.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가 사랑하는 들개를 그녀도 사랑한 것이다. 그리고 끝내 1년여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 남자는 자신의 방에서 아흔아홉 마리의 들개 그림을 완성하고 동맥을 끊어 자살하고 만다. 그녀는 그의 죽음을 보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인간의 숙명은 결국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준 작가의 심오함이 느껴지고, 가난한 예술가의 고통과 그것을 이기는 투철한 예술 정신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이외수가 외모처럼 귀인도 아니고 천재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는 데서 저 고난이 푸른 바다빛이 되어 사랑으로 전해지는 것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또 내일도 살아가게 하는 희망이 되었다. 인간은 결국 완전한 혼자가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에 불과하거든. 그런 것일까. 인간은 결국 완전한 혼자가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럴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혼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보아도 결국은 혼자가 될 뿐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람과 사람은 완벽하게 혼합되어 질 수가 없다. 마치 물방울이 서로 합쳐져서 하나의 물방울이 되듯이 그렇게 아무런 구분도 없이 합쳐져서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쌍둥이조차도 타인은 타인인 것이다. 비록 얼굴은 같을 수 있을는지 몰라도 마음은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목사님도 도둑놈도, 스님도 깡패도, 교수도 학생도, 장관도 실직자도, 운동선수도 간질병 환자도, 할머니도, 갓난애도, 살아 있는 한은 그 완전한 혼자라는 것쪽으로 조금씩 발을 내디디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완전한 혼자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거의 전부가 사실은 혼자가 아니려고 애를 쓰는 것, 하나로 부질없이 한평생을 다 보내어 버리고 마는 것 같기도 했다라는 이외수의 말처럼 그의 자살로 들개를 남겼고 그녀는 또 다시 혼자가 되었고 그 그림속의 들개와 함께 혼자만의 집과, 고독하고 외로운 작가의 집을 지으리라 본다. 그리고 가끔은 바다에도 가겠지. 그때도 그녀는 혼자일 것이다. 왜냐 하면 인간이니까.

 

 

 

 

 

이외수의 주인공들은 작가의 말을 빌면 ‘더러운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맑은’ 사람들이고 시속(時俗)의 표현을 따르자면 세상이 더럽다며 적응하지 못하는 ‘순수한’ 사람들이다. <꿈꾸는 식물>의 주인공 ‘나’는 포주집의 막내아들이다. 아버지는 매춘으로 번 돈으로 다시 바람을 피우는 인물이고, 큰형은 매춘을 돕다 못해 포르노 사진을 찍는 데 열을 올리는,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간이다. 작은형만이 머리도 뛰어나고 맑은 인간이었으나 결국 미쳐 버린다. 이 작은형을 포르노 사진을 찍는 데 집어넣으려고 큰형은 돼지 발정제(發情劑)를 먹일 만큼 막돼먹은 집안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판검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받으며 유일하게 대학에 다닌다. ‘내’가 속한 가정만 썩은 게 아니다. 세상도 썩어서 예술을 하려던 친구는 생활고에 내밀리어 미군 초상화를 그리게 되며, 팝송을 틀어주지 않고 고전 음악만을 고집하던 다방은 문을 닫는다. ‘내’가 보는 세상은 ‘사람들은 저마다 생존의 톱니들을 무섭게 갈아대면서 외치고 헐떡거리고 쫓기고 욱박지르고 속고 속이고 부수고 만들고 차 던지고 긁어모으면서 자정까지 영악스럽게 발버둥을 친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그저 ‘지옥’인 거기서 고통받으며 세상을 비난하다가 대학을 중퇴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뜻에 항거하는 무기력한 인간이다. 그는 포르노 사진을 찍다가 생긴 사고로 작은형이 죽고 아버지와 형이 구속당하고 창녀들도 떠나버린 뒤에야 빈집을 불태우는 게 고작이다. <들개>의 주인공 ‘나’는 문학을 하겠다는 여대생인데, 유일한 핏줄인 숙부가 이민을 가면서 혼자 남는다. 술집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다니기도 힘겨워 중퇴하고 폐건물에서 산다. 여기에 광고 그림을 그리다가 진정한 예술을 하겠다는 이혼남이 찾아온다. 들개를 그리기 위해 들개처럼 굶고 쥐를 잡아먹으며 들개와 혼연일체를 꿈꾸던 이 화가는 마침내 들개 그림을 완성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화가는 ‘제도와 문명의 사슬에서 풀려나와 자유롭게 살길’ 바라며 ‘나’는 술집에 나가 화가의 화구를 대주면서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그림을 완성시키도록 만들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떳떳하다’고 생각한다. <자객 열전>의 주인공은 의인이 효수당하는 세상을 보고 산으로 들어가 검법(劍法)을 익힌다.<장수하늘소>의 주인공도 세상이 더럽다며 사람의 온몸이 기체화(氣體化)하는 비결을 익히고자 한다. <칼>의 주인공 역시 세상이 욕심으로 가득하다며 인간의 마음을 벼릴 칼을 찾아 떠난다. <벽오금학도>의 주인공 역시 더러운 세상을 피해 그림 속의 신선(神仙)동네로 들어가는 방법을 평생동안 찾다가 드디어 마흔 살에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더러운 세상과 맑은 인간의 고통은 공통된 주제이지만, 이외수의 글은<들개>이후로 크게 변모한다. 그 작품까지만 하더라도 세상은 악하고 강한데 ‘맑은’ 인간이 약한 것으로 묘사되더니<장소하늘소>부터 ‘맑은’ 인간은 초능력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인간으로 영웅시되기 시작한다. 악한 세상과 거기서 착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냉정하게 묘사하던 방식도 점차 현실과는 동떨어져간다.<꿈꾸는 식물>에서 작은형이 ‘염력(念力)으로 구름모으기, 나비 한 마리로 온 천지에 함박눈 쏟아지게 만들기’를 실험하는데 대해 ‘나’는 작은형이 미쳤다고 판단하지만,<벽오금학도>에서는 그림이 사람을 살리며 다섯 살 때 신선동네에 갔다 왔다는 주인공은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지만 그 이후로 ‘놀라울 정도로 다른 환자들의 상태가 호전되는’ 초능력을 보인다.<장소하늘소>이래 그가 그리려는 영웅은 도교의 영웅인 신선이자 무협지가 그리는 영웅이다. 실상 무협지의 영웅들이란 도교의 훈련 방법 가운데 외단(外丹: 신체 단련)으로 강해진 사람들이므로 이런 일치는 당연하다. <벽오금학도>에는 풍류도, 신선, 학이 사는 동네, 빛으로 변하여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는 인간 등이 도교 소설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꿈꾸는 식물>로 문학 평론가 김현에게 ‘그 충격적인 섬세한 감수성’이라는 극찬을 받았던 저자가<벽오금학도>에는 어떤 문학 평론가의 발문도 받지 않았다는 점도 그의 작품의 대중 소설화를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