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윤택 '나는 누구냐'

clint 2018. 4. 23. 10:46

 

 

심산의 일대기
심산 김창숙은 경북 성주 출신으로 조선 유림의 대표로 파리장서사건, 나석주 폭탄투척사건을 주도한 인물이며, 상해임시정부 활동을 거쳐 일제에 의해 해방때까지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 같은 그의 독립, 애국활동은 그의 선비 정신과 조국애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종교의 엄숙주의에 가깝다고 하겠다. 부르크하르트를 빌리자면 그의 삶은 한마디로 “역사에 대한 경건한” 자세를 읽게 한다. 심산 김창숙은 유림이었지만 시대흐름을 꿰뚫고 있던 그의 부친의 영향으로 신분과 계급 타파, 그리고 허학이 아닌 실질ㅇ르 중시하는 실학적 태도, 시대와 현실에 대한 변혁적 태도를 형성할 수 있었다. 당시의 그의 스승들을 비롯한 재지사족들이 당시 제도의 제반 모순점을 신분제적인 제약 안에서 유교 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것에 반한다면 상당히 진보적이고 미래의 심미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 뒤 ‘을사오적’의 목을 벨 것을 국왕에게 상소하면서 항일운동 일선에 앞선 이래 1906년 국채보상 단연동맹회운동, 1908년 대한협회 성주지회활동, 1909년 「일진회 성토 건의서」제출, 1910년 사립 성명학교 설립 등 애국계몽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결과는 참담한 허사가 되고 나라는 경술국치를 당하여 망하게 되었다. 일제의 폭압 통치에서 다 죽은 듯 했던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1919년 3월 1일의 거족적인 항쟁으로 이어지는데 당시 민족대표 33인 명의로 발표된 「독립선언서」에는 천도교·기독교·불교 대표가 참여하여 범종교적인 일체성을 보여주었으나 유림 대표가 빠졌는데 가장 큰 교단과 큰세를 자랑하던 유교 측에서 민족 대표를 한 사람도 못 낸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에 심산을 주축으로한 유림측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파리장서」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영남 유림 100여명의 서명이된 「파리장서」를 지닌 심산은 서울로 상경해 상해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1주일 전 김규식이 민족대표 자격으로 파리로 출발한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이후 상해에서 이동녕, 이시영, 조성환, 이동휘, 김구 등과 독립운동을 해나가고 또 대 중국 외교활동을 펼치며 중국 혁명정부의 손문등과도 만나고, 국민당을 방문하는 등 , 중국혁명가들과 본격적으로 협조 관계 구축을 하며 접촉하기 시작한다.
김창숙이 중국으로 떠난 10여일 후 성주지방에서는 이 사건 때문에 약 500여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지는데 바로 1차 유림단사건이다. 심산은 경북을 대표하는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임시정부 수립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임시정부가 왕정복고가 아닌 민주공화정으로 국가체제를 선포하였는데도 유학자인 심산은 기꺼이 이에 참여하였다. 존왕주의에서 공화주의자로 사상적 변신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1920년 말을 고비로 국내, 국외의 독립운동은 점차 침체되어가는데 이때 심산은 모친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지만 귀국하지 못한다. 1925년 김창숙은 국내로 진입한 후 신건동맹단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는데 이는 군자금 모집 활동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금된 액수는 목표액에 크게 모자라고 부호들은 하나같이 몸을 사리고 아예 돈을 내놓지 않거나 내놓더라도 소액에 불과하였다. 그는 모금의 실패 원인이 민심이 죽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모금해온 돈으로 청년결사대를 국내에 잠입시키기로 하고 다시금 상해로 떠난다. 이즈음 국내에서는 군자금을 걷어간 사실을 알아낸 왜경이 관련 인사 600여명을 무차별 구속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른바 제2차 유림단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심산을 도와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던 동지와 친인척이 모두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옥살이를 하게 된다.
1926년 3월 상해로 돌아온 김창숙은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고, 국내에서 모금한 군자금을 의열 투쟁 자금으로 활용하여 일제의 식민기관을 파괴하고 국내의 민심을 고무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심을 진작시키고자 하였다. 이봉창의 일본 천황 저격 의거,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에서의 일본 천장절 기념식장 폭파 의거와 더불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3대 의거’의 하나인 나석주의 식산은행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는 김창숙의 민족 독립 투쟁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즈음 심산은 지병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밀정의 고발로 일본군에게 잡혀가게 된다. 피체된 지 1년이 지난 1927년 7월에 예심이 끝났고, 예심과정에서 일제는 심산의 입을 열기 위하여 온갖 고문을 자행하였으나 그는 일본의 법률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변호사들의 변론을 거부했고, 재판장에게 경어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항소를 하지도 않는 등 불굴의 옥중투쟁을 전개한다. 결국 일제의 가혹한 고문 때문에 두 다리가 마비되어 사경에 이르기 까지 하였다. 인물의 평가는 역경을 처하였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일제를 타도하고자 독립전선에 나섰다가 왜적의 감옥에서 저들과 싸우며 오히려 적에게 호통을 치는 모습등은 보통 인물이 아니고는 쉽지 않은 일이다.
1945년 왜관경찰서에서 해방을 맞이한 심산 김창숙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오나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중국에 망명하였던 차남 김찬기의 시신이 유해가 되어 돌아온다. 미군정기간동안은 일관되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김구의 활동을 보조하면서 임시정부 봉대운동에 진력한다.
김창숙은 이듬해 1946년 「반탁담화문」을 발표하며 신탁통치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싸울 거을 호소한다. 또 『동아일보』를 통하여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조선공단당에 경고문을 발표하여 공산당의 행위를 매국 민족반역행위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난립된 유도회 조직을 통합하고 성균관대학을 설입하여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다. 1948년에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등과 함께 남한만의 총선거에 불참한다고 선언하는 ‘7거두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을 떠나지 않고 인민군으로부터 협조 요청을 받으나 거부하고, 1.4후퇴로 부산 피난중에는 ‘이승만대통령 하야경고문’ 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투옥되게 된다.
이승만의 이같은 폭압적인 통치기간 동안 심산은 야당 어느 정치인 보다 더 격력하게 싸우고 저항하나, 결국 이승만 세력에게 성균관 대학을 빼앗긴다. 이승만 정부는 폭력을 동원해 유도회를 장악하고 심산 중심의 정통 유림 세력을 축출하고 기독교 신자인 이승만을 유도회 총재에, 역시 기독교 신자인 이기붕을 최고 고문으로 추대 취임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진다. 1957년 성균관대학운영, 유도회 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나, 1960년 ‘이대통령 사퇴 권고’를 발표하는 등 그의 반독재 투쟁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후 그는 집 한 칸도 없이 궁핍한 생활 속에서 여관과 병원을 전전했고, 그의 셋째 아들이 서울에서 자동차 운전수를 하여 벌어온 돈으로 간신히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1965년 서울중앙의료원에서 84세로 서거한다.

 

 

 

 

<나는 누구냐?>는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유림의 지도자이며 최근세사를 온몸으로 떠받친 심산 김창숙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것이다. 이 공연을 통하여 심산의 생애와 일제강점기 진보적인 유림 지도자의 정신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국의 마지막 선비, 그 저항의 한평생."([세상은 그를 잊으라 했다](1998, 삼인)인물비평서 출간으로 유명한 삼인이 '한국현대사의 아웃사이더 11인 이야기'란 부제를 달고 낸 책 [세상은 그를 잊으라 했다]가 첫장에소개한 인물은 다름아닌 심산 김창숙 선생이다.

심산 김창숙 선생님의 살아온 일대기를 그린 ‘나는 누구냐’란 作은 현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가져다 준다. 공연이 계속되는 가운데 심산의 교육적이며 고매하고 숭고한 정신을 끊임없이 읽을 수 있었는데 이는 사회에 나아가서도 어떠한 목표의식을 지니고 전진해야하는지를 알려 주어 그야말로 어린시절의 매운 회초리 역할을 맡아 주었다. 내 자신의 통찰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게으름에 새삼 놀라며 심연가득 반성도 해보는 기회가 되어 매우 좋았다. 교훈적인 내용이어서 연극이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역사적인 사실과 이승만, 나석주, 김활란, 김구 선생등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도 계속해서 나옴으로써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배우들이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면서 시간의 경과를 표현한 점 그리고 이승만 박사가 계속 대답할 이유가 없다며 반복하는 모습과 중요한 대목을 노래로 표현한 점등도 흥미있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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