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중 (Audience)은 이른바 바츨라프 하벨의 도덕극 시리즈 3부작 중 첫 번째 해당되는 작품으로써, 표방하는 체제(System)와 실제 삶(Real life)의 간극에서 고통 받는 극단의 정점에 서 있는 관리인과 지식인의 이야기이다.
이 극은 하벨이 실제 양조장에서 일했었던 일화를 바탕으로, 쉬지 않고 문제 거리를 만들어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고, 공무집행 방해니 경찰 구타니 하며 씌워대는 갖가지 혐의 속에서 계속 고초를 겪으면서, 고립된 양조장에서 초월자와 마주한 외로운 실존자로 서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삶의 깊은 세계를 찾으려 한 자서전적인 이야기이다.

줄거리
슬라덱은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과 서로 감시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근근이 살아가던 중에 안톤 마첵이라는 무시무시한 거물급 비밀경찰로부터 바넥을 정보원으로 만들지 못하면 지금 있는 자리도 위험해서, 공장 짚시들과 함께 일하는 노동자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협박을 받게 된다. 몇 주 간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루트를 통해 바넥의 뒷조사를 해보았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는 못한다. 한편 바넥은 몇몇 주요 인사를 만난 건 사실이며, 거사의 진척사항도 들었지만 후일을 위하여 적극 가담하지는 않는다. 최근 3주 동안 슬라덱은 거의 집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전전긍긍한다. 따라서 맥주 공장은 관리인의 이러한 계속되는 야근과 당국 비밀경찰의 잦은 방문으로 비상상태에 빠져 있으며, 바넥 역시 심신적으로 피로가 가중되던 터에 이윽고 슬라덱의 호출을 받게 된다.

슬라덱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그리고 더 나은 자리를 얻기 위하여 바넥을 최대한 환대하기도 하고, 얼레고, 창고지기를 제안하기도 하며, 모종의 협박을 가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정보원이 될 것을 제시하지만, 바넥은 개인을 위하여 남을 고발하지 않는다는 ‘진실된 삶’을 신념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슬라덱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 사실상 인간적으로 만날 수 없는 지점, 즉 시종일관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서로 간에 너무나 다른 문화적 환경, 처해 있는 입장, 구사하는 언어 등으로 인해 대화는 하고 있지만 ‘대화 없음’의 상태가 완급을 달리하며 진행될 뿐이다. 최종적으로 바넥의 의사를 확인한 슬라덱은 지식인들의 허상에 대한 독소어린 절규를 쏟아 붇다.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보달로바로 대변되는 본능에 대한 정당성과 그로 인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한다. 이때야 비로소 바넥은 모든 걸 버린 상태에서의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보게 되고, 인간적으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찾게 된다.

하벨은 1963년 희곡 ‘가든파티’를 발표하면서 대표적 반체제 작가로 자리 잡았고, 그의 작품들은 연이어 무대에 올랐다. 때문에 1968년 그의 작품은 소련의 단속에 의해 상연이 금지됐다. 그럼에도 하벨은 바넥 3부작의 첫 작품인 ‘청중’을 발표했다. 공연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서로의 집 거실에서 이 작품을 공연하고 공유했다. 1978년에는 하벨의 친구 파벨 랜도프스키가 맥주공장 감독관인 ‘슬라덱’을 연기하고, 하벨이 직접 양조장 노동자 ‘바넥’을 연기해 LP에 녹음했고, 이는 비공식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작가이자 정치인 바츨 라프 하벨의 작품이다. 공산주의 국가였던 체코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나라 간 심리적 거리 때문일까. 세계적인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하벨의 작품은 그 동안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리빙> 이후 공연되는 <청중>은 하벨의 투쟁적인 삶과 예술세계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듯하다. “부조리한 세계가 더 뚜렷하다” 앞서 공연된 <리빙>이 권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 직을 떠난 후 하벨의 소회를 담아낸 작품이라면, 이 <청중>은 하벨이 정치 초년생 시절 감옥생활을 한 이후 양조장으로 보내졌을 당시의 체험을 다룬 작품이다. 당시 옛 소련과 공산주의 정권은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의 체코 분위기를 두려워하며 민중의 정신적 지주였던 하벨을 옭아매려 했다. 하지만 그 의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양조장에서 케그 통을 굴리며 일한 경험은 부르주아 출신 지식층인 하벨을 굴시키기는커녕 도리어 “밑바닥의, 부조리하고 그로테스크한 차원의 세계가 늘 훨씬 더 뚜렷하다”라는 고백을 낳게 한다. 극작가로서 하벨이 관객 혹은 청중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욱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연극 <청중>에는 단 두 인물만이 등장한다. 양조장의 관리인인 슬라덱과 고용인 바넥이 그들이다. 이중 바넥은 양조장 노동자로, 바츨라프 하벨의 분신격인 인물로 평가된다. <청중>이 1976년 오스트리아에서 초연될 당시 비엔나 부르크극장 예술감독은 공연 중 어느 날 무대에 올라 “바츨라프 하벨은 감옥에 넣을 수 있겠지만 바넥은 감옥에 넣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외쳤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슬라덱은 누구인가. 관리인 슬라덱은 극 중에서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시며 바넥을 테이블 앞에 붙잡아 두는 인물로 그려진다. 슬라덱은 바넥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감시를 담당하지만 막상 자신이 바넥에게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명확히 알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극은 바넥이 선하고, 슬라덱이 악하다는 이분법을 피한다. 극은 시간이 흐를수록 두 인물들의 심리가 각기 모순되고 모호해진다는 것, 그 자체를 그리는 데 치중한다. 슬라덱과 바넥의 대화를 읽느라면 자연스레 바츨라프 하벨이 왜 이 극에 <청중> 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떠오른다.

희곡작가인 바넥은 관료사회를 비판적으로 다룬 작품으로 인해 한 작은 맥주 양조장 직공으로 좌천된다. 승진기회를 놓쳐 이 작은 공장의 책임자로 있는 슬라덱은 어느날 바넥에게 창고지기 자리를 제안한다. 그러나 이 일자리는 바넥 혼자 창고를 관리하는 것으로써, 바넥 스스로가 자기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정보기관에 제출하여야 한다. 이것은 바넥이 정보기관원 노릇을 하는것과 다름없기에 바넥은 이 제안을 거부한다. 그러나 슬라덱의 이러한 제안은 정보기관 고위층에서 그에게 한 것으로 슬라덱도 꼭 관철시켜야만 하는 입장이다. 슬라덱과 바넥의 이러한 입장 차이와 그리고, 이 둘 사이가 직장의 상사와 부하직원이라는 점, 또 좌천당한 지식인으로써의 둘의 갈등이 술과 여자 문제를 매개로 전면에 흐른다.
하멜은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에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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