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아원출신으로 15세 때 부유한 집안으로 입양되어 명문대학 교수까지 올라간 ‘이혁’ 그에게는 남부러울 것 없는 배경과 더불어 재벌가의 장녀이자 피아니스트 부인까지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연주회를 위해 해외로 떠난 사이, 17년 전, 51명의 사상자를 낸 고아원 방화사건의 범인이자 옛 연인이었던 ‘은진’이 자신의 집에 찾아든다. 무슨 일로 날 찾아왔을까, 하는 수많은 의문들이 스쳐지나가는 찰나. 은진의 캐리어 안에서 들리는 자기 아이 울음소리. 은진은 자신이 여기 온 이유를 시간 내에 알아맞히지 못한다면 이혁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결국, 은진의 심문 끝에 이혁의 추악한 과거가 펼쳐지는데.........
김수미 평론가는 "<진홍빛 소녀>... 공연이 시작되면, 어느새 장르의 법칙을 전복시키는 서사의 힘에 매료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 지난 1년 이상 대학로를 오가며 본 연극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을 보았다는 기쁨, 하지만 그 서사가 「극악한 시대」의 현실에 기반하고 있는 까닭에, 결말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홍상현 평론가는, “<진홍빛 소녀>는 2015년도의 최고의 연극을 보았다는 기쁨을 주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칭찬한 작품이라면 충분히 기대하고 볼 만하지 않을까? 연극을 많이 안 봐서 잘 모르는 나로썬, 이 <진홍빛 소녀>가 연극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홍빛 소녀>는 자신의 안일한 삶을 위해 다른 이에게 가해지는 부당함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병들어 있는 모습을 고아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극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고아원에서 만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은진과 이혁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낸다. 특히 은진은 어린 시절부터 고아원 원장에 의해 강제성추행까지 겪게 되면서, 더욱 더 자신의 고통스런 삶을 구원해 줄 유일한 사람으로 이혁에게 마음을 준다. 하지만, 이혁이 입양을 가게 되고 둘은 그들이 18살이 되면 결혼을 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18살의 생일에 고아원을 들린 이혁의 실수로 창고에 화재가 발생한다. 이때, 은진은 자신의 소름끼치는 고아원생활, 고아원 원장으로부터의 강제추행에 대해 어느 누구도 자신을 돕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감시하는 그들 모두를 증오하며, 이들이 화염을 피해 밖으로 도망쳐 나오지 못하게 문을 잠근다. 결국, 고아원 사람 모두가 죽게 되고, 방화범으로 잡힌 은진은 이혁의 실수를 말하지 않고 무기징역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은진의 기대와 달리 이혁은 은진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다른 여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아간다. 은진은 자신을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이혁을 찾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징역기간에 주어지는 사회적응프로그램인 4박5일 귀휴기간이 종료되었음 에도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작품의 미덕은 자기합리화와 이기로 병들어있는 사회체제를 단순히 드러내는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은진이라는 인물을 통해 어떤 답을 찾아내고자 한다는 점이다.

17년 만에 같은 고아원 출신 은진이 어엿한 대학교수가 된 혁을 찾아온다. 혁은 법과 관련된 강의를 하는 교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살인방조죄 같은 범죄가 될 수 있다면서 멋지게 강의를 끝냅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혁의 집에 불을 켜자 은진이 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은진은 단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해서 혁을 찾아왔는지 맞춰보라는 겁니다. 제한 시간은 다음 날 새벽 4시. 맞추지 않으면 은진이 납치한 혁의 딸 목숨이 위태롭다. 거절할 수는 없는 상황. 힌트는 친절하게도 세 개가 주어진다. 시간이 자꾸 흘러간다. 은진은 여러모로 수상하다. 주인도 없이 불 꺼진 남의 집에 들어와 있다니 무섭고 소름 돋기도 하다. 17년 만에 찾아와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면서 혁의 집을 제 집마냥 편하게 누비고 있다. 혁이 바쁘다면서 내보내려고 하는데도 한사코 이 집에 있겠다고 한다. 혼자 깔깔대고 웃다가 걸쭉하게 욕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혁을 비꼬는 걸 보니 부담스러운 연인사이 같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현재 상황에서 알 수 없이 추억의 불꽃놀이를 하자면서 자기 페이스대로 집주인인 혁의 입장은 고려해주지 않는 은진에게 버럭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는 혁이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혁은 오히려 차분하고 매너 있게 그녀를 내보내려고 최선을 다하는 듯 보인다. 그런 그의 딸을 납치해서 은진은 캐리어에 넣고 그를 꽁꽁 테이프로 묶어두고 자기 할 말만 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은진보다 혁이 더 수상해진다. 힌트 세 개 안에는 은진이 혁에게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이 담겨있고 혁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계기이기도 하다. 은진은 첫 번째 힌트로 원장선생님이 밤마다 부르는 이유를 정말 몰랐는지 물었다. 예상을 했던 이유이긴 하지만 고아원 '사랑둥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원장선생님이 원생인 어린 은진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지옥둥지'였다. 혁은 다른 아이들로부터 은진이 밤마다 불려 가는데 노래를 부른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이미 들었다. 은진이 곤란한 상황에 있는 걸 알면서도 그 원장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혁은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솔직하지 않다. 처음에는 그런 줄 전혀 몰랐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사실을 알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해보았지만 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원장선생님과 원생이라는 위치에서 사실상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건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도 아버지 같다는 둥, 다 이해한다고 쳐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필요는 있었던 걸까. 사랑하는 은진이 들으면 너무나 상처받을 말인걸. 은진은 사람이 완벽할 수 없는 것도 알고 있고 침묵으로 방관하는 것도 서럽지만 어쩔 수 없었을 거란 걸 알고 있었을 거다. 다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방관할 필요가 있었는지 되묻고 싶었던 거다.

두 번째 힌트는 검은 쓰레기봉투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혁은 역시나 솔직하지 않다. 전혀 모르는 이야기라더니 나중엔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라 한다. 매번 밤마다 원장선생님께 은진이 불려가는 걸 알게 되고 화가 나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있게 자극적으로 만든 루머라는 거다. 은진 말고도 밤마다 부르는 여자아이들이 있는데 말을 듣지 않으면 검은 쓰레기봉투에 아이들을 죽여서 내다 버린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퍼뜨리고 혁은 이모에게 양자로 입양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이 검은 쓰레기봉투 이야기는 혁의 의도와 다르게 소중하게 여기던 은진을 더 고통스러운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한다. 혁의 잘못이라고 비판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 대가가 너무나 엄청나다. 이 검은 쓰레기봉투이야기 때문에 이제 은진은 원장선생님은 물론 원장선생님과 사이에 대해 알게 된 다른 선생님들과 원생들에게 성적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외부로 도망치려해도 도망칠 수 없고 다른 가해자들은 그녀를 협박하는 용도로 검은 쓰레기봉투 이야기를 달고 살았다고 한다. 마치 그들의 행동의 면죄부인 것처럼. 마지막은 결국 17년 전 고아원 방화사건에 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방화사건으로 인해 은진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범죄자가 되었지만 실제 방화를 저지른 것은 혁이다. 고아원을 나가고도 혁은 은진을 보러 찾아왔는데 그 날 밤에도 원장이 은진을 또 불러내자 은진과 함께 하곤 했던 불꽃놀이 폭죽에 잔뜩 불을 붙였는데 그것이 큰 불로 옮겨 붙었다는 겁니다. 은진은 사랑하는 혁, 앞길이 창창한 대학생 혁에게 피해가 되고 싶지 않아서 혁이 고아원에 왔다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혁은 어차피 고아원에 소속된 사람도 아니니 출입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니까. 은진 이외에 다른 원생들은 밤중이라 건물의 문이 잠겨서 모두 죽고 은진만 남아서 모든 죄를 지우게 된 상황이 되었다. 은진이 교도소에 들어간 이후에도 혁은 편지도 보내고 면회도 오면서 희망에 가득 찬 말을 속삭인다. 자신이 구해주겠노라, 책임지겠노라. 은진과 사랑을 나눌 때도 이미 여러 번 하던 말이다. 그러나 보내던 편지는 점점 횟수가 줄었고 은진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다. 은진은 너무나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은 적도 없었고 자신은 바보같이 사랑하는 혁의 말을 믿었으니까. 차라리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혁은 은진을 기억하기 위해서 은진처럼 노래를 잘하고 은진과 나이가 똑같은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혁은 끝까지 묶인 몸에서 벗어나고 아이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은진을 속인다. 지금 아내를 버리고 은진과 함께 하겠다고 달콤한 말을 하더니 기회를 엿보면서 손발이 자유로워지자 은진에게 화풀이하듯이 반강간식으로 성관계를 맺는다. 왜 은진이 성적 노예가 된 게 자기 잘못이냐는 거다. 이쯤 되면 혁에게 어디까지 실망해야 하는지 한계를 갱신하는 느낌이다. 혁이야 말로 은진보다도 훨씬 더 망가진 사람 같다. 스스로 모든 걸 부정할수록 더 비참해 보이는 게 아이러니하다. 예상대로 은진의 캐리어에는 혁의 딸이 없었다. 그 안에는 혁에게 보낸 편지들과 소중한 물건들이 들어있었을 뿐. 그녀는 17년간 쌓였던 것에 약간의 복수를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궁금함을 풀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또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이제는 완전히 내려놓고 잊을 수 있겠다고 말한다.

이 둘이 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까? 기획의도에서 드러나듯이 제도나 환경의 문제 역시 넘어설 수 없다. 은진에게 혁의 이모처럼 입양해줄 누군가만 있었더라도 지옥은 짧아졌을 것이고 감옥을 갈 일도 없었을 거다. 그녀의 혐의를 자세히 파고들어서 그녀의 입장을 대변해줄 누군가만 있었더라도 참 좋았을 거다. 하지지만 은진에게는 사랑한다고 말 하며 미진한 행동을 한 혁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 혁이 방화사건의 용의 선에서 완전히 제외되고 엄연한 교수로 자리 잡는 순탄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일부러 입을 닫은 게 은진이 할 수 있고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기도 하다. 혁은 이게 왜 다 자기 잘못이냐고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조차도 마음 한 구석이 늘 찔리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극이 끝나면 안타까운 인물은 은진과 혁 둘 다이다. 그는 비겁하지만 사실 그 비겁함은 누구나 갖고 있는 정도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강의했던 내용에 따르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알면서도 은진을 도와주지 못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잘못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방관이 범죄가 된 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가 은진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려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고 최소한 이것만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 선을 넘어버린 점에서 화살을 피할 수 없다. 은진의 말 중에 너무나 마음에 와 닿는 한마디 때문이기도 하다. 은진은 혁이 정말 자신을 사랑하기는 했는지 그저 자신과 한번 자려고 사랑한다고 한 건 아닌지 혁의 진심을 알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을 믿을 수도 없고 자신에게만 연이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게, 가족도 없이 집도 없이 늘 혼자로 살아가는 게 자신이 정말 불행한 존재라서, 자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닌지 모든 게 혼란스러운 상황일 거다.
17년 만에 큰 맘 먹고 찾아간, 사랑하는 혁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당할 때 그녀는 원장 선생님에게 밤에게 불려갈 때마다 불렀던 그 노래를 부른다. 노래의 가사를 다 듣고 나서야 어떤 마음으로 그 노래를 불렀을지 이해가 갔습니다. 저는 은진의 사랑이 혼자만의 사랑이었을까 봐 두려웠고 그녀가 그 노래를 부르면서 살려달라고 외치면서 편히 쉬게 해줄 집과 가족을 찾았던 그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기댈 수 있는 사람, 기댈 수 있는 공간 하나를 바라는 것이 사치인 인생도 있는 걸까. 그래도 그녀는 충분히 강하다. 혁을 사랑했던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상처만 가득 안고 애써 버텨야 했던 자신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억울함과 분노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고 그녀는 이제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진홍빛이 과거의 아픔이지만 설렘이란 새로운 미래의 의미였으면 싶은, 외롭지만 강한 연극 <진홍빛 소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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