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등지고 황성이라는 이상향으로 떠나는 부부,
도중에 고기 맛을 본 중(마마)이 나타나
자기 대신 매품을 팔아달라고 흥정하자
서방이 생계대책으로 이를 허락하여 자리를 뜬다.
중이 처에게 접근한다. 생이별한 필부(匹夫)와 필부(匹婦)
<생태계의 균형과 파괴>라는 마마와 처용간의
싸움 틈바구니에서 길을 가며 못볼것을 보게 되면
서방은 <심청전>의 심봉사가 되고
수절을 지키기 위해 처는 <춘향전>의 춘향이가 되고...
가까스로 도착한 처와 서방,
서로 부둥켜안으나 사지는 옛몸이 아니고
황성 또한 이미 <꿈에서의 황성>이 아니라는 필부의 꿈
한국민속극이 갖고 있는 저마다의 극적요소와
고대소설 <양반전>등에 나타나는 계급간의 갈등과 해학,
판소리 <심청전>, <춘향전>등에서 보여주는 재담,
남사당패거리들의 놀이성을 <오늘>의 시각에 맞추어
끝없는 연극에 도전을 멈추지 않는
오태석 특유의 방법론으로 풀어본 작품이다.
한국민속극이 갖고 있는 저마다의 극적 요소와 고대소설<양반전>등에 나타나는 계급간의 갈등과 해학, 판소리<심청전>,<춘향전>등에서 보애주는 재담, 남사당 패거리들의 놀이성... 을<오늘>의 시각에 맞추어 끝없는 연극에의 도전을 멈추지 않는 오태석 특유의 방법론으로 풀었다 그가 쓰고 연출해서 그가 대표로 있는 극단 목화의 앙상블이 꾸며낸 무대는 작가 겸 연출가 오태석의 혼돈된 의식의 만화경이었다. 작품 자체가 전통적 연희본 전체에서 따온 것 같이 잡다한데 처용설화가 있고<심청전>·<춘향전>·<흥부전>의 일부가 판소리가 되고 타령이 되고 재담이 되어 패러디로 삽입되는가 하면 신화적·제의적 요소들이 거리낌없이 들락거리고 작가의 현대 의식이 그런 전통적·연희적 껍질을 쓴 채 히죽거리며 축제의 무대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축제적인 의식의 장난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체계화시키고 논리화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을 ‘생태계의 균형과 파괴’라는 마마귀신과 처용의 싸움으로 본다는 것도 난센스이고 입을 것 없고 먹을 것 없어 잠시 떨어져 생이별한 서방이 심봉사가 되거나 수절하는 처가 춘향이가 되거나 하는 것은 오태석의 환상의 꿈이며, 그 꿈을 볼거리로 만들며 노는<필부의 꿈>은 내용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 그리고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꾸미는 연극 놀이이다. 어쩌면 할 일 없는 짓거리를 노는 것 같이 무위(無爲)의 연극을 하면서 목화 패거리들은 큰 연극이나 하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그것은 오태석식의 무대 놀이일 뿐, 넘실거리는 놀이의 바다에서 익사하고 익사하면서 아닌 것처럼 연극하는 관객을 향해 노회한 오태석이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그것 다 필부의 짓거리일 뿐인데 그렇게 점잔 빼고 넥타이 메고 볼 것 없잖아) 그래서 화투짝이 떨어지고 담뱃재와 꽁초가 수북한 골방을 나와 안개 낀 새벽거리를 횟배를 앓으며 아닌 듯 걷는 축제놀이의 굿 판을 치우는 것은 서방 역의 조상건 그리고 처 역의 최형인이다. 긴 방황 끝에 그들은 만나고 꿈은 깨진다. 그 꿈은 개꿈 같은 것, 아홉 마리의 처용의 처용이 아니라 ‘처룡’일 것이다. 용 새끼 아홉 마리의 애비용, 어미용은 혹시 서방이고 처 아니겠는가. 그렇게 우리의 의식이 혼동되고 우리의 상상력이 비약해도 이 혼탁한 의식의 축제에서는 아무도 간섭하지도 못하고,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못한다. 그런 필부의 개꿈을 꾸고 난 우리는 뒷맛이 씁쓸할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무대 장치인데 화투짝을 끼워 놓은 발상은 판이 도박판 같은 인상을 주면서 출입이 자유로워서 자유 분망한 의식의 놀이에 적격이지만, 전혀 입체성이 없어서 평면적 차원에서는 기능적이지만 높낮음에서 만들어내는 입체적 효과가 고려되어 있지 않다.
이번 연극제에서 가장 실험적이었던 목화의 <필부의 꿈> (오태석 작·연출)은 관객의 반응을 둘로 갈라놓았다. 즉 긍정적으로 평가한 측은 오태석의 자유분방한 의식을 샀고 부정적인 입장의 사람들은 작품의 불명료성을 지적한 것이다. 사실 두 입장은 다 옳은 것이다. 가난한 부부의 이별과 재회를 몽환극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오태석은 처용, 심청, 춘향, 흥부 등의 설화세계를 두루 편력한다. 매우 기발한 착상과 시도는 관객의 상상력을 초월할 정도로 탁월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현실과 초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오태석의 상상력은 일상에 빠져있는 관중을 당혹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관객이 작가의 의도를 거의 모른다면 그것은 형상화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태석이 의도한 것이 정리가 덜 되었고, 따라서 불투명하게 표출된 것이라 하겠다. 다행히 최형인의 탄탄한 연기가 그런대로 작품의 골격을 만들어 준 것이다. (연극제 평... 유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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