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1994년 예술의 전당에서 기획 초연되었다. 하지만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이 연극은 감상에 전혀 무리가 없다. 그것은 1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에와서도 세상은 여전히 잔인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시작은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띄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빠지고, 황후가 되기 전 심청이 용왕과 함께 현대의 서울에 올라옴으로써 시작된다. 그리고 승지는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에 대해 스케쥴을 짜고 용왕에게 알려준다. 연극은 시종일관 가학성을 유지시킨다. 그 전면에 서 있는 정세명은 평범하고 세상에 순응한 채 살아가는 힘없는 현대인의 전형이다.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은 심청이는 역시 정세명의 불행에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개입하려고 하며 모든 것에 초월적인 용왕을 매번 설득하여 세명을 구하기 위해 애쓴다. 계속해서 세명이 피학적인 불행에 노출되는 것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우리 자신을 투사시킬 수 있게 된다. 이렇듯이 이 연극은 우리 자신들의, 그리고 주위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과장하여 드러낸다. 그리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재연함으로써 관객들에게 불편함을 준다.
이러한 불편함이 관객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가학성 때문이다. 우리 자신 본연에 있는 가학적인 본성과 피학적인 경험들을 거대한 이미지가 파고들어 숨겨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흔들고 떠올리게 한다. 그럼으로써 관객은 마치 자신을 주인공들에게 내어놓는 듯한, 생각을 채 하지 못하고 이야기와 이미지에 끌려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세명은 윤봉길의 말. 장부출가 생부환을 가슴에 품고 삶을 헤쳐나가려고 노력하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급기야 발 한쪽을 잃고 화상을 입고 백가면이 되어 분풀이를 하는 사람들의 타겟이 된다. 그가 타겟맨이 되게 한 병원에서 한 여자아이의 상자는 "왜 때려, 아파 또 때려주세요."를 연발하는데 이 대목에서 아이러니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여자아이의 외침에는 아프다와 또 때려주세요라는 말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연극 전체에서 흐르는 가학적, 피학적 고리를 연상시킨다. 가학성과 피학성은 공존해 있는데 백가면으로써 세명이 피를 토할 때, 주정뱅이는 가학자이면서 피학자이다. 또한 세명은 주정뱅이에게 피학자이면서 또한 가학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고리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도는 것이 세상일지도 모름을 연극은 보여주고 있다. 필연적이면서도 치명적인 상처. 주정뱅이의 대사처럼 배상받을 수 없는 상처를 의도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연극이 시종일관 잔인무도한 인간의 행위만을 보여주었다면 관객들은 어리둥절하게 B급 괴기영화를 보는 기분만이 들었을 것이다. 가학성을 우리 자신의 우리 사회의 것으로 끌어들이는 요소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것은 구원의 이미지로 가장하고 있는 심청이라고 할 수 있다. 심청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희생한 것처럼 세명을 위해 희생하고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심청이가 지른 불에 세명은 화상을 입고 얼굴을 잃게 되고, 심청이의 끈질긴 설득으로 주정뱅이에 의해 피를 쏟게 된다. 심청이는 감정의 도화선 역할을 함과 동시에 세명의 불행을 가속화 시키는 요소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 삶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선한 것일까 고민하게 된다. 그저 적당히 기본적으로 살 수 있는 시대는 가고 이 시대의 우리는 죽거나 고통스럽게 살아있거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이 때 선한 인물(즉, 사회적 정의와 도의)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돈의 노예가 된 이 사회에서 더이상 선한 인물(현실)로 존재하지 않고 삶과 단단한 가학의 고리에 종속되기를 강요하고 부조리를 강화시키는 존재로써만 기능한다.
종국에 기생(윤락녀)들이 이미 상품화되고 금전만능화되어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떄, 세명은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면 차라리 죽기를 요구하지만 심청이는 그들의 죽음을 보고 있을 수 없다. 심청이의 행위가 또 다시 현실화 되었다면 그녀들은 계속해서 노예처럼 살아가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세명처럼 새우잡이가 되는 것 또한 현실적용이 되지 않는 이상주의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죽음밖에는 없는 것이다.
결국 결말은 비극으로 끝이난다. 이 쯤에서 심청이가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지가 궁금해진다. 첫번째는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고 두번째는 아마도 시대의 피해자가 된 현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다만 이 시대에서 심청이의 구원시도는 전혀 용납되지도 않고 효과도 없으며 오히려 체제를 견고하게 할 뿐이다. 그래서 심청이는 이제 영원히 몇 천, 몇 만 번이고 몸을 던져도 현재 우리의 누구의 눈도 띄울 수 없을 것이다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
작품의 타이틀이 의분을 제기해서 일까? 정말로 궁금했다. 왜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두 번 던 졌는지..
조선 시대의 그 심청이 아니다. 아버지를 위해 공양미 300석에 몸을 뛰어든 심청이. 용왕과 함께 지금 시대에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요즘 시대란, 추악하고, 더럽고, 슬프다. 용왕의 계획에 따라 꼬이고 꼬이다 착한 정세명이 그의 시나리오의 희생자가 되고, 길에서 구걸하던 그 가 한번 잘 살아 보겠다고 온 것이 본의 아니게 인신매매까지 오게 된다. 한마디로 슬프다. 연극이 끝나고 불이 꺼진후 치는 내 박수소리의 기분은 한마디로 ‘우울’ 이다 갈 때 까지 간 사람들이 모아져 있던 새우잡이 배. 몸을 팔기 위해 자신의 cell에서 대기하고 치장하는 여자들, 그렇게 몸을 파는 것 외로, 그들을 구원한다 생각했던게 그들의 빗을 갚아줄 사람의 전화를 기다리는 것 - 아님, 뛰어 내리는 것?
무대에는 비료푸대 박스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처음 심청의 이야기를 해주는 어린이 구연 동화식의 천의 넘김. 심청이 용궁 올때 까지 인도해준 거북이며 그때 바닷속 물거품 비누방울이며, 좁은 무대는 꽉, 잘도 짜여져 있었고, 한눈에 봐도 값비싸지 않는 재료들로 효과적으로 이용한 것이 눈에 띈다. 참 멋진 그림이 되는 무대다. 가장 놀란 것이 가려지고 막히고 하는 중에도 배우들의 동선에 지장이나 답답해 보이는 것이 아닌, 그것들로 인해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 낸 다는 것이다.
속고 속는, 그러나 우직하고 착한 주인공 정세명. 그 사람의 잘못이 있다면 한번 잘살아 보겠다는 것? 참으로 슬프다. 얼굴에 화상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돈을 벌기 위해 손님들이 던지는 공을 맞아주는 게임의 도구가 될 때에도, 기술적인 부분에서나 극의 흐름에서나 한치의 긴장도 놓치지 않는다. 그는 공을 맞을때 몸에 연결된 호수로 물을 뿜음으로서 공을 던지는 사람에게, 그 물을 거의 무방비로 맞는 관객에게도 직접적으로 반응하게 만든다. 그렇게 내리는 물의 효과가 물이 공을 던지던 사람의 살인으로 이어질때는 처음의 물을 이용한다는 재미보다도,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그것은 마치 웃다가 씁쓸하고 굳어져 버리는 기분과도 비슷했다. 많은 부분에서 배우들의 하체가 오랫동안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많은 답답함이 들지 않았고, Up Stage, Down Stage , 높낮이를 통해 모든 장면들이 꽤나 보기 좋은 그림으로 연출 된다.
그들이 놀고 움직이던 공간이 새우배가 되고, 박스 하나하나에 그녀들 - 새우잡이 배에 팔려온 여자들 - 의 공간이 나타날때는 어느하나 버릴 것 없는 공간의 예술, 경지 였다. 또, 나오는 대소도구는 어찌나 많은지. 무대에 많은 것 들이 있지만 난잡하지 않고, 꽉 찬 느낌으로 다가온다.
정말 순진해 보였던 심청의 연기부터, 능청스런 용왕, 용왕의 신하, 여자들도.. 눈에 거슬림이 없다.
다시 Story로 돌아 온다면, 이 연극은 재미로 즐겁게 보다가 점점 무겁고 슬퍼 진다. 빚을 지고 , 빚과 목숨을 바꾸는 여자들 대신 결국 자신이 물에 빠지는 심청. 사람이 끝에 다다랐을때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정세명. 정말이지 구석수석의 앵벌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행동이며 이 연극은 우울 하다. 그냥 보면 재미있는 연극 같지만 그 속은 너무나 우울 하다는 거다. 심청이! 결국 그녀는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물에 뛰어 들었단 말인가? 박수를 치고 일어나는데 즐거움이나 재미 보다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사회에 대한 씁쓸함과 우울함이 더 크게 뭍어 나오는 것. 그게 오태석씨의 의도 라면 그는 의도를 달성한 셈이다 대상 작품으로<심청이…>를 합의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이론은 거의 없었다. 인신매매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반인간 황폐현상을 악마적 파노라마 구조로 현재화(顯在化)시킴으로써 가공스런 반인간(反人間) 상황을 절감케 만든<심청이…>는 오태석의 파격적 연극방법에 의한 연극 만들기가 충격효과로 전화(轉化)한 드물게 경험할 수 있는 농밀한 무대였다.
- 제28회 동아연극상 대상 심사평
(……) 심청이를 위시해서 꽃다운 처녀들이 바다로 뛰어들 때, 관객들은 혹시 구원의 전화가 걸려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태석은 이러한 한가닥 희망마저 냉정하게 뿌리치고 만다. 그렇다면 그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아주 포기한 것일까? 더 이상 보편적, 객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 상황을 인식하는 주체마저 자기분열을 일으키는 시대에 오태석은 극한적 추함, 광기, 회의, 절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남은 희망은 심청이의 희생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듯, 바다의 제물이 된 처녀들의 집단 희생에 묻혀 있을 뿐이다. (……)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오태석의 생래적 연극성과 극장주의가 또 한번 탁월하게 발휘된 무대였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지나친 언어의 유희, 유희 자체를 위한 유희들이 눈에 띄곤 했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기호의 화려한 유희들이 거의 그대로 등가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다소 설명적인 군더더기들이 떨어져나가고 모든 박스들과 인형들과 사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환상적인 무대로 가다듬어지기를 기대한다.
- ‘세기말적 연극’, 김미도,<한국연극>, 1990년 12월호
하이테크 스타일로 개성 있게 꾸며진 극장에 들어가면 우선 공간 전체를 점유하는 빈 포장박스 더미에 놀라게 된다. 작가이자 연출가인 오태석 씨는 기존의 연극통념들을 무시한다. 그는 흔히 극장 전체의 공간개념을 재창조하며 기존의 무대장치 대신 삶 주변에서 발견되는 물체들에 극적 상상력을 부여한다(예전에 그는 헬스클럽 안마의자들과 포크레인을 동원한 적도 있다). 이 극에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크기의 포장박스들이 다양한 극적 도구로 변신한다. (……)
이 극에서 얘기는 표면적으로 진전되지만 기존의 논리적 인과관계는 없다. 그저 오늘의 사회상의 충격적 모습들이 오태석 특유의 폭발적인 연극적 상상력과 에너지, 포스트 모던한 의상과 소도구, 대중음악의 자극적 활동 등을 통해 제시될 뿐이다. 관객들을 어떤 영화나 만화, 비디오게임에서 느끼지 못했던 직접적 흥분과 충격과 웃음과 분노와 허탈감 등을 느끼게 되지만 결국 작가의(너무나 뚜렷한) 도덕적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
- ‘흥분, 충격, 웃음과 분노의 무대’, 김미도,<시티라이프>, 1991년
(……) 지난 16일 쉼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 뒤에 슬픈 현실이 잔잔히 배어 나오는 이 한국식 블랙코미디를 지켜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과연 건강한 세상일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상상을 초월하는 기지와 박진감 넘치는 장면 전환은 물론이거니와, 오랜 훈련으로 숙달돼 농익은 해학의 몸짓을 보여주는 배우들의 연기, 포장박스와 쌀포대 등을 재활용해서 꾸민 재치 있는 무대와 소품, 의상 등은 왜 오태석을 우리 시대 최고의 연출가로 꼽는가를 실감케 했다. (……)
13m×9m의 넓은 무대를 열연으로 채우는 정진각, 황정민, 강현식, 이수미, 김혜영, 이도현, 박세용 등 30여명의 배우들의 땀내 나는 연기도 돋보였지만, 그들을 일사분란하게 조율해내면서 관객들을 웃고 울리는 연출의 힘이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다. 화상을 입은 청년 정세명이 온 얼굴을 감싼 기름 거즈를 떼어낼 때 울려퍼지는 푸치니 오페라<토스카>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의 선율, 매춘부들이 기자회견을 앞두고 쪽방에서 화장을 고치는 장면과 빚을 갚을 독지가의 전화를 기다리며 한 명씩 군산 앞바다로 뛰어드는 투신 장면 등은 말수가 적은 이 연출가가 건조한 우리 사회에 내지르는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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