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등장인물을 위한 연극(모노드라마)
이 작품은 불구자인 아내를 둔 남편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하반신 불수인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에게 쏟는 애정과는 달리 본능적이고 관성적인 성에 대한 욕구는 남편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로 여행하게 한다. 그러나 그의 성에 대한 갈증이 도시인들이 겪는 아파트의 아래, 위층의 미지의 여인에 대한 애욕으로 대치되면서 그는 자유롭게 환상의 세계 속에서 그리움을 간직하게 된다.
카페 떼아뜨르가 문을 연 이래 최고의 화제작은 자유극장이 아닌 실험극장의 김동훈이 탄생시켰다. 소극장 연극의 신기원을 이룩한 김동훈의 모노드라마<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 연극은 무려 1년 5개월 동안이나 공연되면서 관객 7,000명을 동원하였다. 100석 규모의 극장에서 주 1회 공연으로 7,000명의 관객을 모았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난해한 오태석의 작품으로 이룩한 성과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 (<우리연극 100년>, 서연호 외, 현암사, 2000.)
오태석의 초기 극작 세계에 대해 평론가들은 ‘전위적’ ‘초논리’(유민영), ‘말무늬를 짜는 기초 작업’(양혜숙) 등으로,<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는 바로 ‘연극의 기본적 틀을 서양 연극에 의존하여 굳히는’ 이 시기, 70년에 쓰여진 작품이다. 이 희곡은 불구 아내를 둔 한 사내의 내면 독백이다. 아니다,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이 이야기는 한 사내의 의식 속에서 그의 억압된 성적 갈증과 상상력이 연출해 내는 한 편의 연극적 유희다. 육체는 바퀴(휠체어, 롤러스케이트, 택시) 위에서 비틀거리고 정신은 ‘아파트의 일실’을 빠져나와 아래 윗층으로, 거리로 휘청거리며 돌아다닌다. 정신과 육체의 욕망을 스스로 거세해 버린 한 사내가 자기 앞에 망연히 놓여있는 시간을 견뎌 보려는 한바탕 놀이인 것이다. 그는 정상적인 삶, 의사 소통하는 세계로부터 저만치 비껴나 있다. 하반신 불구인 아내와의 대화에서 ‘습관성 피라미드’- “응, 뭐라고 그랬소?” 이 한 마디면 그와 아내의 관계는 단절되며 그의 기억 속에서 불러내는 서비스 결과의 의사소통 또한 “응, 뭐라고 그랬소?” 다음에는 불가능해진다. 이 인물은 폐쇄된 자기의식의 방 안에서 자신만의 감수성, 연상작용, 상징화 등을 통해 일방적으로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걸어온다. …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에서 보여지고 들려지는 모든 것은 성(性)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성(性)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혼탁하고 무질서한 세계 속에서 정신적인 질서, 사회성에 대한 소박한 의식이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는 공연 중의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고, 그로 인해 성불구가 된 아내를 둔 사내의 성적(性的) 무의식을 대상화시켜 무대에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하반신 불구의 아내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쏟는 애정과는 달리 본능적이고 관성적인 성에 대한 욕구는 사내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그러나 사내의 성에 대한 욕망은 현대인의 밀실, 아파트의 아래층과 위층으로 경계지어 지면서 미스 패션이라는 여자에 대한 도착으로 대치된다. 이런 과정에서 사내는 끝없이 움직이고 싶어하지만, 넘어졌다 일어서기만을 반복하는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내의 심리적인 갈등은 ‘소리’의 이미지와 내면 공간의 이동이라는 표현주의 수법으로 드러난다.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롤러스케이트를 지치는 소리’, ‘휠체어 움직이는 소리’ 등으로 모두 ‘소리’의 이미지이다. 급히가서 욕실 쪽에 귀기울인다. 마치 응원이라도 하듯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 천장을 올려 보자 예의 롤러스케이트가 콘크리트 바깥을 지쳐가는 소리가 미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마치 그 미미한 소리를 놓칠까 봐 그러듯 잔뜩 귀를 기울이며 조심조심 방을 건너가 문을 연다. 그러자 소리가 조금 더 커지는 듯 하다. 문을 닫는다.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한발한발 층계를 올라가듯 벽면을 짚어 보며 올라간다. 이에 따라 스케이트를 지치는 소리가 점점 커져온다. 그것은 흡사 울렁거리는 심장의 소리와 같다. 별안간 뚝 멎는다. 벽에 귀를 댄다. 중얼중얼거리는 듯.(본문에서)
온갖 소리들을 통해 사내는 성적 억압을 받는다. 이러한 소리의 상징적인 이미지들은 사내의 심리상태를 모자이크 식으로 풀어나가는 장면마다 등장하면서 반복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반복에 맞물려 작품의 구조 또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그 ‘순환’은 단순 순환이 아니다. 연극을 연습하던 중에, 미스 패션을 찾는 사내와 이야기 하던 중에 되풀이되는 “여태까지 애기하는 거 들었잖아요?”라는 사내의 말은 이 작품이 갖는 반복과 순환을 끊임없는 일상성으로 환치시킨다. 이러한 반복과 순환은 또한 ‘자신의 거실→ 미스 패션양의 아파트→ 광화문 거리→ 운동장→ 수영장→ 자신의 거실’ 이라는 공간의 이동과 맞물리면서 극적 구조의 균형을 이룬다. 이러한 상황의 사이마다 이미 전직이 배우였던 사내는 실제 객석의 관객을 자신의 극중 관객으로 설정하고, 연기를 펼치는 실제 배우를 통해 극장 안의 관객은 극중의 관객으로 자리매김 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한 사대의 내면 고백을 통해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성적 욕망’을 해소하지 못해 정신적으로 불구 상태에 처한 사내의 ‘한풀이’로서의 몸짓과 넋두리이다. 다시 말해,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는 성불구자를 아내로 둔 사내의 성적 욕망의 도착이라는 심리상태가 ‘자유로움’과 자유롭지 못함‘이라는 경계선 위에서 곡예를 하듯 보여지고 들려지는, 치유의 기능을 가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내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혔듯이 일상성으로 환치되는 ’순환‘의 구조에 의해 억압적 상황으로부터의 완전한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발산’과 ‘배설’이라는 해소의 과정은 다시 극의 처음으로 돌아가면서 마무리됨에 따라 다시 재발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그러므로 ‘순환구조’는 형식적 측면에서는 장점이 될 수 있으나, 내용적 측면에서는 한계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관객은 더욱 혼란스러워져서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누가 과연 하반신 불구였을까. 사내의 말처럼 아내만이 하반신 불구인가, 욕탕의 아내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하반신 불구 남편을 가진 아내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양 자신을 반신불수로 가정한 것은 하반신 불구 아내를 가진 남편인 자신의 고통을 비추어 보기 위함 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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