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위성신 '늙은 부부 이야기'

clint 2017. 12. 9. 16:31

 

 

 

 

박동만 할아버지는 거처할 곳을 찾다 생활 광고지를 보고 이점순 할머니 집을 찾아온다.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보며 할머니와 옥신각신 흥정을 해 이사를 결정하게 된다.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동거로 인해 각자 외롭게 살던 이점순 할머니와 박동만 할아버지는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의지해 가며 살아가던 중 이점순 할머니는 불치병을 얻게 되는데… 철부지들의 불같은 사랑이 아닌, 영화 ''죽어도 좋아'' 의 열정적인 사랑이 아닌, 은은하고 잔잔한, 마치 일상생활과도 같은 사랑이야기이다. 가랑비에 살포시 옷이 젖어들어 가듯이, 60세에 찾어온 그들의 짧은 시한부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티격태격 잦은 다툼으로 이어진 만남이 결국은 깊은 정이 들게 되어, 어느새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될만큼 서로에게 소중한 일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어버린 그들... 자식들에게 외면당하고, 사랑했던 배우자와 사별하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던 그들에게 서로의 만남은 얼마나 많은 힘이 되고, 인생의 윤활유가 되었을까... 그 따뜻한 인연이 오래갈 수 없단 것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몹시 맘 아프고 많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긴 했지만...

 

 

 

 

 

특히, 얼마 남지않은 마지막 여생을 사랑하는 사람의 지극한 보살핌속에서 마칠 수 있었던  할머니는, 넘나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또 다시 홀로 남겨져 깊은 외로움에 눈물지어야 했던 박동만 할아버지의 아픔을 바라보면,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날 한시에 함께 죽을 수 있단 것은 무척이나 복받은 인생이란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로또복권에 당첨된 행운 그 이상으로... ^^* 험한 세상을 홀로 헤쳐 나가다보니, 어느새 드센 욕쟁이 할머니가 되어버렸다는 이점순 할머니... 거친 세상을 향하여 실컷 욕을 퍼붓다보믄 속이 후련해진다는 그녀의 모습은, 드세다기보담은 몹시 애처롭고 귀엽기까지 했다. 떠나간 그녀를 그리워하며, 그녀가 남긴 마지막 선물을 입고, 허공을 향하여 욕을 해보는 박동만 할아버지...그의 절절한 그리움과 깊고 공허한 아픔이 맘속 깊이 와닿는 장면이었다.

 

 

 

 

 

몇 년 전에 70대 노인 부부의 성과 사랑을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가 개봉되면서 사회적인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은 우리 사회의 노인 문제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임을 심각하게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작품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에게 노인 문제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하나는 우리 사회 안의 노인이라는 존재의 위상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인의 성이라는 사랑의 표현 행위에 관한 것이다. 이 두 문제는 노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 왜곡된 편견에 기인한 것으로서 노인 문제가 노인들이 당면한 실존적 문제이기는 하나,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문제가 더 심각한 것임을 환기시켰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 나라가 앞으로 7년 후면 고령 사회에서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 고령 사회는 65세 이상의 노인층 인구비율이 14%이상인 사회를, 초고령 사회는 노인층 비율이 20%이상인 사회를 의미한다고 한다. 초고령 사회까지 예상하는 고령화 현상은 그 자체가 사회변동 현상이다. 의학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증가하고 출산율이 저하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노인층의 비율이 증가하였다. 노인층의 증가는 곧 바로 우리 사회의 노인 문제로 직결될 수밖에 없는데, 문제의 원인이 단순히 노인 숫자의 증가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특히 이 가운데 노인들의 노후 불안은 자못 심각한 실정이다. 이것은 퇴직과 같은 노동력 상실의 개인적 문제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초래한 것으로서 ‘효’라는 전통적인 유교 관념에 의한 노인 부양의 가치관이 와해되어가는 결과로서 생겨났고, 노인 문제의 책임을 가정에만 떠넘기는 우리 사회와 국가의 해결 대책과 의지가 미약해서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결국 노인들이 ‘바다’라는 사회의 고립된 ‘섬’임을 말해준다. 그들은 한 세대 전만 해도 사회와 국가의 발전에 공헌을 한 주역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는 정보화 사회의 각박한 현실은 노인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 부여할 사회적 역할과 지위도 없고, 사회 속에 고립되어 고독하게 살아가야 하는, 힘겨운 존재로 만들고 만 것이다. 우리의 노인들은 이런 점에서 무관심 속에 버려진 힘 없는 타자다.     

  

 

 

 

 

이런 타자에 대한 인식은 ‘노인’이라는 낱말 속에 내포되어 있다. 단적인 예로 흔히 65세 이상을 노인이라 부르지만, 그중에 권력을 가진 정치인과 같이 사회에서 중추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결코 노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노인이라는 어휘 속에는 사회적인 무능력자라는 부정적인 시선이 짙게 깔려 있다. 그는 사회의 주역에서 물러난 낙오자이고 직장이 없는 실업자이고 나아가 가정이나 사회의 행복과 발전에 걸림돌이라고까지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부정적 시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신체에까지 작동하고 있다. 노인들 신체의 외형적인 허약성은 성적인 욕구의 소멸이라는 잘못된 인식으로 확대된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노인들의 성 행위를 추하거나 용납해서는 안될 도덕적 금기로 생각하거나 또는 아예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이런 생각들이야말로 노인들을 성적 무능력자나 전근대적 가치를 지닌 도덕주의자로 몰아세우는 편견이다. 영화<죽어도 좋아>는 적어도 노인이라는 타자에 대한 우리의 왜곡된 시선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었다. 이<늙은 부부 이야기>는 적어도 고령화 사회라는 사회변동의 현실과 그것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려는 분위기 속에 잉태되었다고 본다. 이 작품은 이미 올해 5월에 ‘위성신의 Love Festival'의 네 번째 작품으로, 10월에 서울공연예술제 공식초청작으로 올려져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또한 작가이자 연출가로서 활동한 위성신의 작품 세계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늙은 부부의 따뜻한 사랑이 잔잔하게 감동을 전하는 이야기다. 60대의 박동만과 이점순은 이미 오래 전에 각각 아내와 남편과 사별한 채 혼자 살아가는 노인들이다. 이 작품은 박동만이 오래 전에 알고 지낸 이점순을 찾아와 그녀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박동만은 동두천에서 양복점을 오랫동안 운영했으나 지금은 그만둔 상태이고 항상 신사복 차림에 머리까지 염색하고 다니며 한껏 멋을 부리고 다니는 이른 바 ‘제비형’ 노인이다. 이에 반해 이점순은 같은 지역에서 밥집을 하며 억척스레 살았고, 지금은 변두리의 집에서 혼자 살아가는 노인이다. 박동만의 삶은 여유가 있다. 멋쟁이 차림의 그는 자식들의 무관심 속에 오갈 데 없이 지내는 노인이지만, 항상 외모에 신경을 쓰면서 핸드폰으로 여자들과 대화를 즐기는 낙천주의자다. 그의 행동은 느긋하고 사교적이고 언어는 해학적인 농담에다가 기지촌에서 귀동냥한 미국 속어를 가끔씩 구사할 정도로 겉멋을 부리기도 한다. 이에 반해 이점순은 시장에서 밥집을 운영하며 딸을 셋이나 키워 출가시켰다.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고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여인으로서의 억척스러움과 남성적인 과격함이 특징이다. 그녀의 행동은 단호하고 남성에게 배타적이고 언어는 욕설을 자주 할 정도로 거칠다. 도입부에서 사교적인 박동만의 접근에 단호히 마음의 빗장을 거는 이점순의 대립은 같은 집에 함께 기거하면서 사랑으로 발전해나간다.

 

 

 

 

두 노인의 만남에서 시작하는 이 작품은 1년을 주기로 하는 4계절의 시간 질서를 따르고 있다. 4계절은 각각 탄생, 성장, 성숙, 그리고 죽음을 뜻한다. 이를 이 작품에 대응하면, 봄에 만나고, 여름에 열정을 피우고, 가을에 성숙해지고, 겨울에 죽음을 맞이한다. 계절의 흐름 원리는 ‘인생’의 행로와 유사하다. 60대의 남녀 독거 노인들이 만나 1년 동안에 벌어지는 일은 그 자체가 만남에서 헤어짐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전 과정을 축약시킨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강조되는 것은 노인들의 동거와 사랑이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두 인물이 점차 정을 나누면서 사랑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공을 들인다. 이 과정에서 두 인물은 뚜렷하게 행동의 변화를 보인다. 박동만은 바람둥이 신사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점순을 위해 밥을 하고 반찬을 준비한다. 박동만보다 더 큰 변화를 보이는 인물이 이점순이다. 그녀는 박동만과 사랑을 나누며 그를 하늘과 같이 소중히 여긴다. 그녀의 변화는 특히 단순한 정의 나눔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박동만과의 성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과부로 살면서 그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성교의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성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노인들도 성행위를 하고, 그 성행위를 통해 즐거움을 누리며,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더욱 견고해진다는 것이 의미화된다. 그런데 이 작품의 특징은 노인들의 성을 표나게 과장하여 강조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오히려 노인들의 성을 일상의 사랑 속에 용해시켜 생활의 작은 부분으로 소중하게 만든다.
이 작품의 미덕은 노인들의 사랑을 다루기 위해 극 속에 일상의 리얼리티를 섬세하게 담아낸 데에 있다. 크고 굵직한 사건을 극의 중심에 설정하지 않고 노인 부부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을 잔잔하게 보여주면서 성과 사랑이라는 것이 젊은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고 노인들에게도 중요한 것임을 전달하고 있다. 동시에 노인들의 삶을 통해 만남과 사랑과 이별이라는 인생 자체의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다. 작가가 보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 극의 마지막 장면은 인생의 의미를 함축한다. 점순과 사별한 박동만은 점순이 없는 고독한 슬픔에 빠져 있다. 친딸이 아닌 인순에게서 생일 선물이 담긴 소포와 편지를 받고는 기뻐한다. 생일 선물도 선물이려니와 인순이 박동만을 아버지로 인정한 것이다. 기뻐하는 박동만은 마루 끝에 걸터앉아 고즈넉이 허공을 응시하고 담배를 피우며 마지막 대사를 한다. “아따 담배 맛나네.” 슬픔 끝에도 갑작스레 기쁨은 찾아온다. 박동만의 마지막 대사와 함께 무대 공간에 퍼지는 푸른 담배 연기의 장면은 인생이란 것이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것일 수밖에 없으며 죽음과 같은 절망의 순간이 와도 견뎌낼 수 있는 기쁨의 희망이 있음을 암시해준다. 일상의 사실성을 재연하려는 진지함은 무대 장치에서 단연 돋보인다. 무대는 조그만 마당이 있는 변두리 서민층 주택의 내부를 사실적으로 만들었다. 객석쪽에는 안방 마루가 가로놓여 있고 양옆에 방문들이 있다. 무대 안쪽에는 수돗가와 크고 작은 두 개의 항아리와 긴의자가 있는 마당이 있고 좌우에 각각 부엌과 화장실이 있다. 무대 맨 뒤편에는 흰 블록으로 된 담과 철문이 있다. 객석에서 보았을 때 마치 관객들이 뒤뜰에서 안방 마루를 통해 마당을 포함하여 집안을 들여다보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사실성을 높이려는 무대의 섬세한 배려는 곳곳에 보인다.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어린 담쟁이넝쿨이 그러하고, 담에다 말아서 걸어놓은 호수와 담 뒤편에 있는 보안등까지 손길이 미쳐 있다. 이러한 사실적인 무대는 관객들이 일상 생활을 하듯 연기를 펼치는 극중 인물들에게 훨씬 더 정서적으로 쉽게 동화되게 한다.
관객의 극중 인물에 대한 동화는 극의 플롯을 통해 강화된다. 극의 위기는 이점순의 질병이 확인되는 지점에서 시작하면서 그간에 쌓아왔던 행복과 사랑의 균열이 시작한다. 절정에서는 이점순의 죽음과 박동만의 고독을 부각시키며 관객들에게 연민을 호소한다. 자가용을 몰면서 여행을 가자던 박동만이 아내가 죽은 이후에 운전면허증을 따서 여행을 못가는 애달픈 사연을 전하는 장면이나 아내가 뜨다가 중단된 털 쉐터를 그녀의 딸 인순이가 짜서 생일날 소포로 부친 장면은 박동만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한꺼번에 일으키고 만다. 이 지점에 오면 관객들의 눈물샘은 터지고 마는데, 작가의 노인들에 대한 시선이 어떤 것이었나를 되짚어보게 한다. 관객들은 노인들을 젊은이들과 똑같이 동거하고 사랑하고 섹스를 하는 주체로 보게 하면서 동시에 동정과 연민의 나약한 대상으로 보게 한다. 그리고 작가는 다소 상반된 노인의 이러한 모습이 실제로 우리 사회 노인들의 실상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노인 부부중 한 노인의 병사(病死)와 그로 인한 다른 한 노인의 고독은 노인들의 일상 속에서는 자연스런 것일지 모르나, 작품의 측면에서는 너무 낯익은 사건의 해결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객에게 애상의 정조를 갖게 하여 노인들의 존재 문제를 환기시키는 의도가 있다 할지라도, 기왕에 노인들을 주체로 보았던 시선을 계속 유지시키는 플롯을 구상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동만의 해학적 언어와 넉살 좋은 행동이 시종일관 일상의 단조로움을 가벼운 활력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이 작품은 웃음과 울음, 기쁨과 슬픔이 혼재되어 있는, 노인들의 달콤한 생의 단면을 마음껏 확인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