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954년 6월 극단 신협이 공연하였다.
가야금을 발명한 가야인 우륵의 전기를 토대로 재구성해낸 역사극으로서
우륵을 사모하는 제자인 배꽃아기와 그녀를 사랑하는 가실왕, 공주등
왕실을 중심으로한 내부 갈등과 신라국 과의 외부 갈등을 소재로한
역사 낭만극이다. 가야금병창을 곁들인 시도가 특징이다
그러나 짜임새와 개연성이 부족하여 극적인 표현 등이
다소 떨어지는 상투적인 수준이라는 평이다.

다음은 1937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동랑 유치진의<나의 수학시대>라는 글 가운데 한 부분이다.
"여기서 드디어 나는 모든 것을 공리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왕 인생이 영(零)이라면 좀더 인생을 깁부게(장식)하고 인생을 풍부하고 인생을 힘차게 하고 인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여 보자. 이런 견해에서는 예술은 얼마라도 인생에 이용되어도 좋다. 연속되어도 좋다. 이것이 나의 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지론이었다. 내가 문학부분에서 가장 공리적이요 직접적인 연극을 택해서 공부하게된 것도 이 지론에서 나온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한국 근대 희곡의 새로운 장을 연 동랑 유치진은 1905년에 태어나 청년기에는 식민지 시대, 중년기에는 민족분열과 갈등의 시대, 노년기에는 혁명의 시대를 겪으며 우리 민족의 질곡과 격동의 시기를 살았다. 작가와 시대상황은 필연적인 관계로 맞물려지게 되는 바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는 곧 동랑의 정신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기치며, 그의 작품세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드러난다. 그런 까닭에 그의 작품 속에는 불안, 죽음, 니힐, 아나키즘, 현실 고발 의식 등이 깔려 있는데, 니힐리즘과 아나키즘은 아일랜드의 작가 숀 오케이시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05년 경남 통영(현재 충무시)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920년 동경으로 건너가 1926년 입교대 영문과에 진학하게 된다. 1924년 일본의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무참하게 죽어가는 동포의 모습을 보았고 자신도 공포 속에서 숨어 살았던 체험은 그에게 삶과 죽음의 관계를 깊이 파고들도록 했으며, 그리하여 '죽음'의 문제를 풀기 위하여 영문과를 택했노라고 후일 그는 고백한다.

그러한 잿빛의 시기에 로망롤랑이 쓴<민중예술론>을 읽은 그는 비로소 삶의 지표를 찾으며 예술 가운데서도 연극을 택하게 된다. 로망롤랑의 '민중예술론'은 인간 유치진과 에술가 유치진에게 획기적인 전향을 가져오게 하는데, 1931년 입교대 졸업과 동시에 귀국, 김진섭, 서항석, 홍해성 등 12명과 동인을 규합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한다. 그들은 거의가 해외문학파로 당시 시대 상황이 그들을 연극운동에 집결시켰다고 한다. 동랑 유치진은 1932년<토막>을 발표하여 극작의 길로 들어선 이래 1960년대 초 무용극<별승무>를 발표하기까지 모두 34편의 희곡을 내놓았다.
그의 작품 경향은 크게 보아 현실 인식 작품<토막, 당나귀, 흑룡강>과 전통 인식 작품<남사당, 마의태자>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토막(1932)>은 근대희곡의 모범적 패턴으로 모순에 가득찬 현실적 삶을 고발하고 있다. 이어<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1933)>,<빈민가(1934)>,<소(1934)>등을 잇달아 발표하는데<소>는 근대희곡의 이정표를 세운 작품이기도 하다. 동랑은 언제나 "극작가의 역할은 자기 시대의 눈에 보이는 모순을 희곡적으로 지적하는 데 있다"고 한 페디만의 지론을 충실히 이행하였으며 민족주의, 계몽주의에 입각하여 연극을 사회비판과 인간개조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동랑은 우리 민족의 시대적, 사회적 모순과 아픔을 강하게 투시하였고 시대가 강요하는 현실의 중압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는데, 일례로 동랑은 1934년 연극의 브나로드 운동을 제창한다. 이는 제정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헌신적으로 농촌계몽을 위하여 벌였던 운동을 본따 농촌 계몽에 연극 분야의 참여를 촉구한 현실적인 배경이었다. 그는 선구자적 의식이 강했던 작가로 연극을 통해 시대표현 가내지 증언을 염두에 두고 한국인의 불행한 삶 뒤에 도사리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고 고발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대 농민들의 꿈과 좌절을 그렸던<소>가 문제시되어 일경에 체포, 투옥됨으로 가담한 현실에서 민족의 비분을 그리려던 작가정신에서 떠나 낭만주의로 선회하는 작가생활의 시련기를 맞이한다.<소>의 여과로 인하여 동랑은 '리얼리즘에 입각한 로맨티시즘'을 내걸고 애정물과 역사물 속에서 우회적 수법으로 현실을 비판하게 되며, 이러한 극작 방향 선회는 1935년 일정의 탄압적인 문화말살정책에 따라 국책극(<흑룡강>,<북진대>,<대추나무>)을 쓰며 1941년 어용극단인 '현대극장'을 발족시키는 데까지 이르른다. 이는 비단 한 개인의 불행일 뿐 아니라 겨우 뿌리를 내리려던 리얼리즘이 좌초당하므로 한국 연극 발전을 늦추는 결과까지 자아냈다. 이러한 과오에도 불구, 6ㆍ25동란 이후에는 전쟁드라마<통곡>,<나도 인간이 되련다>등을 발표한다.<연극본능>,<연극의 대중성>,<연극과 현대인>등 평문도 발표했던 동랑은 1950년에는 국립극장 초대 극장장 역임, 1962년 드라마센타 건립 등 극작가뿐만 아니라 연극비평가, 연출가, 연극행정가로 69세의 생애를 오로지 이 땅의 연극발전에 헌신하며 일관된 연극의 길을 고수하였다. 비록 그의 작가생활 중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국책극을 쓰는 작가로서의 한계를 보이기는 했으나, 오늘날의 한국 연극이 이루어지기까지 연극계에 동랑이 끼친 영향은 특별히 역사적인 의미를 띤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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