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Moonlight)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불능을 분리된 세 영역을 통해 보여준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불능은 딸과 아들의 경우 원인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아들과의 분리는 아들들의 관계 거부가 원인인데 반하여, 딸과의 분리는 딸의 죽음이 원인이다. 앤디의 방과 프레드 방이 사실주의적인 데 반해 브리지트의 영역이 꿈같은 성격을 띠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브리지트의 영역은 앤디와 프레드의 현실적인 영역과 달리 꿈의 공간이기 때문에 항상 열려 있다. 브리지트의 영역은 온 가족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사이의 분리와 사랑의 부재가 어느 인간관계보다 극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부부관계, 부모 자식관계 그리고 친구관계 등을 인간관계의 기본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기본을 이루는 인간관계의 특징은 부재와 결핍이다. 이러한 결핍과 부재는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등장인물의 부조리하고 비논리적인 상황이 언어로 묘사된 것이 아니라 언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비논리적인 상황이 언어 자체에서도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들 사이의 대화에는 모두 어딘지 모르게 애매모호하고 전후관계가 일관성이 없는 자가당착으로 가득 차있고 따라서 그들의 대화는 진정한 것이 되지 못하면서 단순히 우스꽝스런 말장난처럼 되어 버리고 만다. 서로가 정작 해야 할 말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에 대화란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딴소리를 할 때는 자연히 정직한 교류가 이루어 질 수 없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정직한 교류가 이루어 지길 바라면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영국인 극작가 해럴드 핀터는 현재 영어권 국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극작가다. 그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사뮈엘 베케트와 함께 부조리 극작가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도발적인 소재와 사실적인 글쓰기, 그 안에 비밀스레 숨겨진 일상의 이면 등이 그의 작품을 특징 짓는다.
현존하는 극작가 중 가장 해석이 어렵다는 핀터의 작품 세계는 한마디로 '삶은 이중적이다'는 것이다. 작품 자체의 구조 또한 이중적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갈등 관계의 이면엔 역설적인 관계가 성립하곤 한다. 핀터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남을 언어로 공격한다. 그러나 빈번히 등장하는 침묵과 생략의 언어로 그 공격성도 온전히 드러나지 않을 때가 많다. 핀터의 작품은 어느 한 편도 명확히 주제를 드러내지 않으며 늘 다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이러한 모호함이 오히려 전 세계 연출가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1930년 10월 10일 런던 동부의 해크니에서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 학교 연극 주연을 맡는 등 일찍이 연극에 자질을 보였다. 18세 때인 48년엔 왕립 연극 아카데미(the Royal Academy of Dramatic Art)에 입학했고, 이듬해 순회 극단에 입단했다. 이때부터 그는 10년간 데이비드 배런이란 예명으로 영국을 순회하며 배우로 활동했다.
배우로서 경력을 쌓았던 그는 27세인 57년 단막극 '방(The Room)'을 쓰며 본격적으로 극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생일파티(The Party)' '주방용 엘리베이터(The Dumb Waiter)' '관리인(The Caretaker)' 등의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핀터는 셰익스피어상, 유럽문화상, 피란델로상, 데이비드 코언 영국 문학상을 받았고 런던의 퀸 메리 대학의 명예 교수이기도 하다. 로렌스 올리비에 특별상과 몰리에르 데도뇌르도 받았다. 바르셀로나와 더블린에선 '핀터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고, 템파대학에서는 매년 'The Pinter Review'가 출판되고 있다. 핀터는 역사학자이며 귀족인 안토니아 프레이저와 결혼해 현재 런던에서 살고 있다.
해롤드 핀터는 정치적 작품들인 '최후의 한잔', '산골 사투리'의 프롤로그로 1983년에 '정확하게'를 발표하고, 1991년에 정치극의 에필로그로 '새로운 세계질서' '파티타임'을 발표한 후 노골적인 정치극 쓰기를 그만둔다. 그러한 변화를 확연히 보인 작품이 '달빛'이다. 마틴 에슬린은 핀터가 『달빛』을 계기로 "창조적 초기의 셉텍스튜얼 모드”로 돌아갔음을 지적한다. 『달빛』은 『관리인』, 『귀향』, 『배신』또는 『일종의 알래스카』처럼 초사실주의 적이다. 동시에 『침묵』(The Silence), 『옛 시절』(The Old times)에서 처럼 회상과 꿈이 중요 역할을 한다.

『달빛』은 『침묵』과 마찬가지로 무대가 세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침 묵'과 다른 점은 브리지트 공간인 제 3영역을 제외한 나머지 두 영역 (앤디의 방과 프레디의 방)에 각각 2명의 등장인물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역간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침묵』과 유사하다. '침묵'은 공통분모를 찾지 못해 홀로 고립해 자신의 영역에 갇혀 살고 있는 두 남성(람지와 베이쯔)과 한 여성(엘렌)에 초점을 맞추는 데 반하여 『달빛』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불능을 분리된 세 영역을 통해 보여준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불능은 딸과 아들의 경우에 원인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아들들과의 분리는 아들들의 관계 거부가 원인인 데 반하여, 딸과의 분리는 딸의 죽음이 원인이다. 앤디의 방과 프레드 방이 사실주의적인데 반해 브리지트의 영역이 꿈같은 성격을 띠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브리지트의 영역은 앤디와 프레디의 현실적인 영역과 달리 꿈의 공간이기 때문에 항상 열려 있다. 이 공간에는 과거의 프레드와 제이크가 등장하며 또한 현재의 앤디와 벨이 때때로 침입하기도 한다. 브리지트의 제3영역은 온 가족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브리지트의 영역은 사실주의적 두 영역 아래위에 위치한다. 그 공간은 앤디가 꿈을 꾸는 공간이기도 하고 브리지트의 과거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앤디의 방과 프레드의 방은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다. 한 무대 디자이너가 두 별개의 영역에 있는 침대들을 시각적으로 가까이 두었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가까워도 감정적 거리는 한없이 멀 수 있다는 효과를 내기 위해서이다.
멜 거쏘와의 대담에서 해롤드 핀터는 『사장된 땅』(No Man's Land)의 사진에 대한 대사 "현존하는 죽은 자”라는 이미지가 『달빛』을 쓰게 했다고 토로한다. '사장된 땅'에서 대사를 통해 전달했던 '현존하는 죽은 자'의 개념을 『달빛』에서는 '누워 있는 남자'의 시각적 이미 지로 보여준다. 사진 속의 인물들 즉 '현존하는 죽은 자' 작가 허스트(Hurst)에게 잠시 돌아온 상상력에 의해 살아나 듯이, '현존하는 죽은 자'가 살아올 때 등장인물들은 “생중사"(the dead in life)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현존하는 죽은 자' 가 브리지트 라면, 생중사를 나타내는 살아 있는 인물들은 앤디, 벨 그리고 제이크, 프레드이다. 핀터는 『달빛』에서 생중사의 상태에 놓여 있는 살아있는 인간들의 관계들을 부재와 결핍으로 제시하면서, 또 한편 '현존하는 죽은 자'를 통하여 살아있는 인간들이 부재와 결핍의 생중사의 삶의 상태를 벗어나 사랑으로 꽉 찬 세계로 나갈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음을 제시한다.

『달빛』은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핀터가 이처럼 가족 중심의 작은 세계를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것은 인간 사이의 분리와 사랑의 부재가 어느 인간관계보다 극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부부관계, 부모 자식관계 그리고 친구관계 등을 인간관계의 기본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기본을 이루는 인간관계의 특징은 부재와 결핍이다. 앤디(아버지)는 평생 열심히 일을 한 그리고 조직에 충실했던 “일등 공무원”이었다. 그는 상대방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그의 사회생활은 통제의 연속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생활이 앤디와 그의 부인 벨과의 관계 형성에 영향을 준다. 앤디는 벨과 대화할 때 거친 언어를 구사하며 공격적이다. 언어가 이처럼 공격적이고 거친 이유는 사회생활을 통해 받지 못한 사랑을 부인으로부터 갈구하기 때문이다. 앤디가 이처럼 공격적 언어를 사용하는 원인을 그의 대사 "나는 숭배의 대상이었고 존경을 받았어. 하지만 나는 사랑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공적으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로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이렇게 그가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공무원이란 기본적으로 사랑을 베푸는 위치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는 계속 결핍상태에 있었다. 그는 그러한 결핍을 이제 와서 인간관계를 통하여 채우려 한다. 그러나 벨이 지적하듯이, 그의 인간관계에는 문제가 있다. 누구든 그와 함께 10분 정도만 있으면, 토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부인에게만 공격적인 것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음란하고 거친 그리고 공격적인 언어를 사용함을 벨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평생 당신과 함께한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애착을 가진 사람들에게 대부분 조잡하고, 거칠고, 말도 안 되는 미숙하고, 음탕하고, 그리고 난폭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정말이야" 그는 사무실에서 풀 수 없었던 것을 사무실 이외의 사람들 즉 가족과 친지들에게 거침없이 쏟아 놓았음을 이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공격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부인인 벨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앤디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감출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녀는 계속 앤디에게 사랑과 동정을 보내는 척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과 동정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쓴 가면일 뿐이다. 그 이면에 공허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벨과 앤디 사이의 결핍은 마리아와 랄프 부부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벨은 랄프에게서 앤디에게 느낄 수 없었던 여성적 부드러움을 느끼고 앤디는 마리아에게서 관능을 본다. 그러나 벨과 앤디 부부처럼 마리아 와 랄프의 관계의 특징도 결핍이다. 마리아와 랄프의 관계는 벨과 앤디 의 관계와 정반대로 나타난다. 마리아가 랄프를 억압한다. 부부 중 한 쪽 편의 억압을 당하는 상황은 두 부부 모두의 욕망의 결핍을 가져오고 이로 인해 관계의 불능상태에 이르게 한다. 두 부부관계의 특징은 결핍이라 할 수 있다. 부부가 서로 결핍을 느끼고 있다면, 이들의 사회를 더 확대한다 해도 결핍은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네 사람의 관계를 통하여 추측할 수 있다. 그 결핍은 배반으로 나타난다. 앤디는 마리아 때문에 벨을 배반하고 마리아는 앤디 때문에 벨을 배반하고 그리고 벨 때문에 랄프를 배반한다. 또 한편 마리아는 벨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으나 벨은 랄프 때문에 마리아를 배반한다. 또한 랄프는 앤디와의 연대를 원했으나 마리아 때문에 랄프를 배반한다. 핀터는 이처럼 두 쌍의 부부간의 다양한 대사를 통해 부부간의 결핍상태를 제시한다. 이에 멈추지 않고 자식과 부모간의 관계 결핍을 프레드와 제이크의 장들을 통하여 부각시킨다. 앤디와 벨의 아들들인 제이크와 프레드는 작품 처음부터 부모들과 다른 공간에 산다. 이들과 부모와의 공간적 거리가 바로 이들이 부모에게 가진 심리적 거리이다. 이들과 부모와의 심리적 거리는 아버지의 임종을 가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결단은 확고한 것 같지만, 그 “결단은 회한의 심연 위에 놓인 티슈 페이퍼 위를 걷는” 것 같다. 그들은 농담을 통해 심연을 잊으려 하나, 때때로 그들의 회한이 표면으로 올라온다. 제이크와 프레드의 장들은 오이디푸스 적 콤플렉스를 넘어서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 과정은 어머니와의 상상적 합일의 관계에서 어머니와 분리를 이루고 아버지의 법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아간다. 앤디와 벨의 대화에 의하면 과거의 아들들은 어머니를 도와주는 반면에 아버지에게는 반항했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들의 반항은 앤디 에 따르면 랄프에게까지 확대된다. 그것은 아버지와 대립해서, 그리고 아버지가 나타내는 사회에 대립해서 자신을 규정하려는 행위로 보여 진다. 연극이 진행됨에 따라 이들은 공간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아버지와 분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똑같이 닮아간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의 대화 대부분이 아버지가 제이크에게 재산을 상속한 이야기와 노름으로 파산한 이야기, 그들의 삶에 대한 아버지의 논리적 사고와 계획 등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아버지에 대한 이들의 투쟁은 오이디푸스 적이다. 그 일환으로 아들 들은 아버지가 이사회에서 한 연설을 "협잡꾼 - 아이 - 사기꾼 - 광대 - 악한의 연설”로 평가절하 함으로써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한다. 이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아버지가 나타내는 질서에 대립해서 자신을 정의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행위는 아버지가 나타내는 기성세계를 패러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버지와 그가 대변하는 사회에 대항해 자신을 끊임없이 규정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들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갈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차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정체성의 혼돈, 나아가 이름의 혼돈으로 나타난다. 제이크가 프레드에게 자신은 라일리처럼 풍요한 삶을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을 계기로 이들의 아버지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 대사에서 라일리의 어머니는 "전례 없이 훌륭한 배꼽춤 댄서들 중 하나"였고 그의 아버지는 "존경받는 장로들 중에서도 최고”로 나타난다. 제이크가 꾸며낸 이야기 속의 라일리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은 앤디와 앤디가 이상으로 삶은 여인상과 닮았다. 앤디가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여성은 관능적이고 이상적인 남성은 가부장적이다. 이러한 가부장적인 남성에 대해 아들들은 한편 조롱의 태도를 취하긴 하지만 그러면서 한편 자신들도 아버지처럼 신이 되고 싶어 한다. 이것만 닮은 것이 아니다. 정신적 균형이 깨진 제이크의 모습도, 그리고 침대에만 누워 있는 프레드의 모습도 아버지 앤디를 그대로 반영한다. 프레드의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는 제이크가 프레드에게 희망을 주려고 하면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들의 생각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칠흑같이 어두워도 그 속에 빛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아버지에 대해 긍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유산상속의 행위를 사랑의 행위로 보고, 그 사랑의 행위를 죽음의 대가로 갚으려 한다. 이제 아들들은 비록 거리로는 떨어져 있지만, 실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를 받아들인 후 제이크는 도랑주리 기념식에 참여한다. 이것은 현실이라기보다 제이크가 만들어낸 환상의 기념식장이다. 환상의 기념식장에 참석한 사람들의 이름들을 나열하면서, 앤디의 죽음, 프레드의 죽음 그리고 도랑주리 기념식이 메아리 속에 반향 되면서 합쳐진다. 도랑주리 기념식장에 참여한 사람들 이름 중 특히 'Blackhouse'는 의미심장하다. 'Blackhouse 는 바로 아버지의 상태이고 동시에 그들의 상태이다. 이 둘은 아버지가 마지막에 죽음을 받아들이듯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들은 아버지처럼 죽음을 지평선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핀터의 다른 작품들처럼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도 자기 자신이기 위해 투쟁하고 싸운다. 모든 인물들은 'I'에 갇혀 있다. 개인적, 단독의 심연 속에 갇혀 있다. 개인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공간싸움은 가족 간 사랑의 부재 문제로 무대 위에 나타나게 된다. 등장인물들의 관계의 지평선을 넓히려면 사랑이 필요하다. 자신만의 지평선에 갇혀 있을 때, 다른 사람의 방에서 대상으로 축소되는 것을 거부했을 때 I 너머로 나아가 누군가와 만날 수 없다. 벨이 프레드와 제이크에게 한 전화는 바로 그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벨은 닫혀진 프레드의 세계에 전화로 관계를 시도하지만 한 발자국도 다가갈 수 없다. 핀터는 이 상황을 코믹하게 그린다. 아들들이 어머니의 청원 듣기를 거부하고 그들 자신들이 있는 곳이 "차이니즈 세탁소”라고 주장할 때, 벨도 결국은 포기하고 그들에게 동조하게 된다. 벨은 결국 그들에게 “드라이클리닝 해요?"라고 묻는다. 이에 프레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이크에게 전화를 건네준다. 이건 한편으로는 코믹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비극적이다. 그들의 행위는 어머니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통해 이들은 결정적으로 어머니를 거부하고 아버지의 세계로 나아간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거부하듯이 이들은 완전히 어머니를 그들의 세계에서 추방해버린다. 이미 언급했지만 이 장면에서 이들은 개별적이고 독립적 아들들이 아니라 아버지 마음속의 거울에 비춰진 아들들이다. 그러나 핀터는 등장인물들을 결핍과 부재의 상태에 머무르도록 버려두지 않는다. 작품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 브리지트를 등장시킴으로써 이들이 결핍과 부재의 관계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충만한 상태로 나갈 가능성을 보여 준다. '달빛'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이미 죽은 브리지트의 대사로 이루어진다. 이 브리지트에 대해 핀터는 멜 거쏘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달빛』을 쓰면서 나에게서 살아났던 브리지트는 우리들 속에 있는 죽음의 그러한 의식에 대한 무엇, 유령에 대한 무엇, 현존하는 죽은 자에 대한 무엇”이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의 화신 즉 "현존 하는 죽은 자의 바로 그 생각”이며 "작품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한다. 이러한 설명이 왜 핀터가 브리지트를 작품의 시작과 마지막에 두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핀터는 이 작품을 미결정 상태의 모순으로 시작하고, 끝냄으로써 가능성들을 열어 놓기를 바랬던 것 같다.
브리지트는 17개의 장면 중 5개의 장면에 나타난다. 1장, 5장, 17장 은 유령 브리지트 혼자 있고 7장과 12장에서는 각각 식구들과 함께 있다. 제7장은 브리지트가 14살 때 오빠들과 함께 있었던 장면이며, 제 12장은 현재의 장면으로 아빠, 엄마와 함께 있다.
제7장과 12장에서 우리는 브리지트가 형제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앤디의 마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볼 수 있다 7장에서는 제이크와 프레드의 중간에 서서 어떻게하면 둘을 화해시킬까에 총력을 기울이고, 12장에서는 더 이상 좁혀지지 않는 틈이 있는 부부 사이에 잠시나마 예전의 사랑을 되살리는 역할을 한다. 제이크, 프레드, 앤디 모두에게 브리지트는 그들의 인생에서 남겨 놓은 모든 것이다. 이 세 인물들은 그녀가 자신들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작품의 핵심은 솔직하고 시적 강력함을 지닌 브리지트의 여성적, 치유의 화해 정신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있다. 모든 사람들을 함께하게 만드는 것은 여성적, 치유의 화해 정신뿐이다. 제이크, 프레드, 앤디의 방은 어둠 속인 반면 무대 뒷면이 영역인 브리지트의 영역은 밝다. 그곳에는 은총과 치유의 힘이 자리 잡고 있다. 마지막 장면은 브리지트의 절망을 보이게 하지만, 바로 전 장면(16장)에서 앤디는 다른 돌파구의 가능성을 보인다. 죽어가는 앤디가 그의 죽은 딸의 정신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음을 그 장면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처음으로 앤디는 자신의 에고 너머로 나아가 다른 인물에 대한 완전한 관심을 표명한다. 그의 죽음과 브리지트의 죽음은 하나가 될 수도 있다. 그의 대사 "브리지트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해. 브리지트에게 걔가 무서워하는 것을 내가 바라지 않는다고 해”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공포로부터 브리지트를 보호할 것이므로 그 자신도 보호받게 될 것이다.
프란시스 질렌(Frances Gillen)은 브리지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 한다. 그녀가 이처럼 치유 정신, 화해 정신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아직 자아가 굳어지기 전인 16살짜리 소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질렌은 아직 자신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이전, 가족들로부터 독립되어 분리되기 이전의 나이에 브리지트를 머무르게 한 것은, 다른 등장인물들이 자아를 확보하기 위해 영역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상실한, 그래서 항상 함중을 느끼는 사랑의 엠블럼으로 머물게 하기 위함인가? 라고 질문을 던진다.
핀터는 『달빛』해석의 여러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예를 들어, 브리지트의 '다른 사람' 에 대한 배려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정도로 넓은 지평선을 열어 놓았을까? 마지막 장면에서의 어두운 집은 브리지트의 아버지가 죽은 후의 상태를 말하나?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 어둠만이 있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이 어둠이 브리지트를 치유하듯 치유력을 가짐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마지막 텅 빔인가? 이 반쯤만 밝은 달빛은 우리 인간의 실존적 운명인가? 『달빛』의 이러한 열린 상태는 핀터를 다시 한 번 뛰어난 살아있는 현대 시인으로 만든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결정될 수 없는 모순, 인간이 가진 여러 가능성들을 열어 놓고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롤드 핀터 '작별의 한잔' (1) | 2016.07.27 |
---|---|
해롤드 핀터 '핫하우스' (1) | 2016.07.27 |
헤롤드 핀터 '티타임의 정사 (THE LOVER)' (1) | 2016.07.27 |
몰리에르 '바르부예의 질투' (1) | 2016.07.27 |
기타무라 소오 '축복의 노래'(호기우타) (1) | 2016.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