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처드와 사라는 윈저 근처에 있는 외딴집에 살고 있다. 리처드는 아침에 아내를 집에 남겨둔 채 한두 시간 승용차로 런던 시내에 있는 직장으로 출근했다가 저녁 6시에 어김없이 퇴근하는 전형적인 직장인이다.
무대는 둘로 나누어져 있다. 단아하게 잘 꾸며진 거실과 현관으로 나가는 작은 홀은 아래층에, 침실은 층계 몇 개 위에 있다. 보수적인 정장으로 차려 입은 남편 리처드는 출근하기 직전 아내의 뺨에 키스를 하고 “당신 정부 오늘 오나?”라고 묻는다. 아내 사라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오늘 3시에 온다고 대답한다. 리처드는 출근했다 저녁 6시에 돌아온다. 저녁 전 술 한 잔씩을 나누며 부부는 퇴근길 교통 이야기, 아내가 낮 시간에 마을에서 점심 먹은 이야기 등 대수롭지 않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러다 리처드가 느닷없이 그날 오후 정부가 왔을 때 즐거운 시간을 가졌느냐, 마당의 꽃을 보여주었느냐 등 거북한 질문 공세를 시작한다. 그리고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며 리처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당신이 오후에 부정한 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대차대조표와 도표를 보고 있다는 생각해본 일 있나?” 사라에게 이것은 “웃기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사라는 그 시간 남편이 사무실에 있지 않고 그의 정부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리처드는 “내겐 정부가 없거든. 난 창녀 하나를 아주 잘 알아”라며 그 창녀는 “그냥 흔해 빠진 갈보”라고 대답한다. 사라는 마치 남편의 진짜 부정을 갑자기 발견한 것처럼 놀란다. 단순한 정부와 창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무리 환상극 속의 역할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정부가 아닌 창녀로 지칭하는 데 사라는 놀란다. 리처드는 “서로간에 전적으로 솔직한 것이 건전한 결혼의 근본”이라며 훈시하듯 우리 서로 숨김없이 다 얘기해보자고 한다. 리처드같이 여성의 재치와 우아함을 중시하는 사람이 한낱 창녀와 어울릴 수 있는가 믿어지지 않는다고 사라는 대답한다. 그러나 리처드에게 창녀란 “다만 창녀일 뿐이야, 즐겁게 해주느냐 아니냐 하는 기능직일 뿐”이라고 한다. 리처드가 원했던 건 “욕정의 온갖 기교로서 욕정을 표시하고 유발시키는” 그런 것일 뿐이다. 둘은 우리에게 누가 먼저 ‘외도’를 시작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한편 사라가 묘사하는 그녀의 정부는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몸 전체가 애정을 내뿜고”, “사나이답고”, “유머감각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그녀의 남편을 “존경”까지 한다고 한다. 남편은 여태껏 이들 부부가 누려왔던 “애정행각”에 그 어떤 변화를 추구하는 듯 트집을 걸어온다. 그러나 사라는 정부(맥스)의 가정생활도 자기들의 가정생활 못지않게 행복하고 질투 같은 것 없이 “모든 게 아름답게 균형이 잡혔다는 생각”이 든다며 여태껏 해오던 대로 현상유지를 하자는 뜻을 밝힌다.

다음날 아침 리처드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출근한다. 정부가 오후에 오느냐고 묻자 사라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럼 너무 일찍 돌아오지는 않겠다며 국립미술관에 가서 시간을 보내겠다고 말한다. 그날 오후 사라는 몸에 꼭 끼는 목이 깊게 파진 옷에 굽이 아주 높은 구두를 신고 있다. 블라인드를 내렸다 올렸다 하며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하려 애를 쓴다. 초인종 소리가 난다. 우유 배달부다. 크림을 배달하러 온 것이다. 아직 남아 있어 필요 없다는데도 우유 배달부는 자꾸 크림을 받아두라고 우긴다. 우유 배달부가 가고 또 종소리. 정부가 왔다. 세무가죽 재킷에 넥타이도 없이 편안한 복장을 한 리처드다. 그녀는 “어서 와요, 맥스”라며 그를 맞이한다. 사라의 정부는 다름 아닌 남편 리처드였다. 다만 그가 정부인 맥스 역할을 할 뿐이다. 맥스는 장에서 봉고 드럼을 꺼내 들고 온다. 둘은 우선 성행위의 전희라 볼 수 있는 일련의 의식과 같은 연기를 한다. 원시 사회에서 드럼을 치며 짝을 구하듯 둘은 상대방의 손등을 사납게 할퀴기도 하고 툭툭 치기도 한다. 그러다가 둘의 환상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맥스는 공원에서 순진한 아가씨(사라)에게 지분거리며 치한에 가까운 행패를 부린다. 다음에는 그녀를 위기에서 구출하는 신사가 되고, 비가 오기 시작하자 공원지기 집에 가 잠깐 비를 피하자고 제안한다. 공원지기가 오면 어쩌느냐고 하자 그는 자기가 바로 공원지기라고 대답한다. 공원지기의 오두막집에 들어간 뒤 이번에는 사라가 적극적으로 남자를 유혹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남자의 넓적다리를 더듬자 리처드/맥스는 자기는 유부남이라며 아내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러지 말라고 한다. 그러다가 남자의 태도는 다시 거칠어지며 사라를 돌로레스라 불렀다가 메리라 불렀다 한다. 가볍게 차 한잔 마시듯 길에서 주운 창녀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두 사람은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된다. 성관계를 마친 후 맥스와 사라는 차를 마시고 있다. 맥스의 기분이 심상치 않다. 사라의 남편은 지금 어디 있는가, 가엾게도 나가서 온종일 일을 하고 있군, 왜 남편은 아내의 이런 행동을 용납하는가 등등 난처한 질문을 계속한다. 전날 저녁 리처드가 사라에게 질문을 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제 이런 일은 “그만둬야 해, 계속 될 수는 없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자기가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은 사라의 남편 때문이 아니라 맥스 자기 자신의 아내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사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아내 때문만 아니라 이제 곧 방학하면 기숙학교에서 돌아올 아이들 때문이기도 하다고 한다. 다시 한번 성유희를 하려고 이제는 “속삭이는 시간”이 되었다고 맥스를 유혹하려 하지만 맥스는 사라가 너무 깡말라서 이제 싫증이 났다고 말한다. 사라는 맥스가 새로운 게임을 꾸미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농담을 하는 것인가 의아할 뿐이다. 맥스는 “나는 게임 같은 건 안 해”, “나의 마지막 놀이를 끝냈어”라고 대꾸한다.

맥스는 나가고 저녁 6시가 되자 어김없이 리처드가 돌아온다. 그는 아침의 정장차림이다. 긴 회의 때문에 지쳤다고 불평을 한다. 섹스 놀이의 시간은 지나가고 점잖은 부부의 조용한 저녁시간이 되었다. 리처드는 정부가 왔었느냐고 묻는다. 그는 퇴근하는 차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결정에 도달했다”며 이제 아내의 “타락한 생활, 당신의 법을 어긴 정욕의 길”은 지양되어야겠다고 선언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앞으로 다른 곳에서 정부와 만나는 것은 좋지만 자기 집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동안 지켜오던 게임의 규칙을 깨는 남편을 보고 사라는 합의사항에 벗어나는 일이라고 항의한다. 리처드는 자기가 데리고 놀던 창녀는 돈 주고 떼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아내에게 부드럽게 “넌 간부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드럼을 들고 나온다. 이것은 엄밀히 오후 티타임에만 사용되는 소품이다. 사라는 궁여지책으로 비장의 무기를 들이댄다. 자기가 오후에 만나는 정부가 맥스 하나뿐인 줄 아느냐, 나는 언제나 다른 오후에 딴 사람들을 맞이한다고 선언한다. 딸기를 대접하고 접시꽃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게임의 규칙을 어긴 남편에 대한 보복수단이다. 그러자 냉랭하고 점잖은 부부는 오후의 뜨거운 정부관계로 변한다. 드럼을 두드리고 그것을 날카롭게 긁는다. 둘은 테이블 밑으로 들어간다. 정부로 변한 리처드에게 사라는 “티타임이 아주 늦네요.”하며 괴상한 정장 따위는 벗어버리라고 한다. 사라도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리처드는 아내에게 옷을 갈아입으라 한다. 열애 시간에 걸맞은 의상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는 사라에게 “옷 갈아입어.” 사이. “이 아름다운 창녀야”라며 막이 내린다.

이 작품은 핀터의 작품 중에서 가장 에로틱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말로 떠벌리는 대사뿐만 아니라 사랑의 유희를 위해 두드리는 봉고소리같이, 성적 자극을 위한 시각적 요소도 들어있다. 말과 감정은 잘 연결되어 있지만 사건은 모두 감정적인 무드를 쌓아 올리기 위한 것으로,<콜렉션>보다도 방향이 뚜렷하고 줄거리의 내용도 덜 묶여져 있어 빡빡하지 않다. 이 극이 너무 경제적으로 꾸며져 있다는 것은, 처음 이 작품이 TV로 제작되었을 때, 어느 일간지가 “왜 두 사람의 주역을 한 사람에게 시키느냐”고 한 적이 있지만, 이것이야 말로 핀터가 전에 썼던 작품 속의 얘기를 다시 한번, 그리고 더욱 강한 감정과 주제를 살리려는 욕심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항상 핀터의 ‘훌륭한 명단’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고 있는데, 이유는 아마 작품이 교훈적이기 때문일 것이나, 한 줄의 농담같아서 속에는 사실보다 많은 흥미거리가 들어있다.
<콜렉션>에서처럼 처음에는 단편적인 줄거리가 진행되어 가다가 맥스가 나타나는 순간, 모든 게 제자리로 들어가게 된다. 무슨 스릴러를 보는 듯이,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을 공상과 추측으로 끌고 가는 데 연극의 반이 지나가지만 결국은 그저 넓은 아량(?)을 가진 두 남녀와 그들이 생각하는 사람들 얘기로 진행되는 것이다.
거실에 앉아서 떠드는 영국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얘기하는 내용이 어지러운 수수께끼같아서, 극적 분위기와 함께 풍자적인 요소도 무시될 수는 없다. 더구나 그에 대해 답이 조금씩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씩 부인해나가기 때문에,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얘기에 익숙한 관객은 긴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진짜’ 관계는 어떤 상태인가? 10년간이나 복잡한 관계를 가진 채 어떻게 가정을 유지했는가? 맥스가 얘기한 기숙학교에 있는 아이들은 진짜 리처드의 아이들인가? 저녁에 있을 일이라는 게 그저 영원한 티타임에 지친 리처드의 상상이 아닐까? 너무 속이다가 보니 겉잡을 수 없이 된 것인가 아니면 현실과 상상을 연결하려는 노력인 것일까? 그렇다면 그 상상이 현실에 주는 영향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의 답을 찾을 길은 없고 대신 피란델로의 ‘누가 누구고 뭐가 뭔가’ 얘기처럼, 리처드는 정말 자기의 분신을 질투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라가 그런가? 하는 식이다. 도대체 진실이라는 게 무엇인가 아니 진실이라는 말이 믿을 만한 단어이기는 한가? 이게 전부라고 볼 때, TV드라마로서 적합한 내용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을 쓴 작가가 핀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꾸 무엇인가를 더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1978년 11월 20일부터 12월 3일까지 실험극장 무대에서 헤롤드 핀터(Harold Pinter)의 <티타임의 정사>가 공연되었다. 헤롤드 핀터는 영국 작가로서 어려운 희곡을 쓰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다. 연극의 줄거리를 즐기려던 관객은 그의 작품 속에 도사린 어리벙벙한 수작 때문에 좀처럼 내용을 종잡을 수가 없다. 알쏭달쏭한 사건과 상황의 전개를 두고 작가 핀터는 현실이 그런 걸 어쩌겠느냐고 배짱이고, 비평가도 그런 것이 부조리 연극이며 현대의 실험극이라고 편을 드는 판이니 연극이 어렵다고 불평할 수도 없는 소심한 관객들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티타임의 정사>는 본디 제목이<더 러버즈(The Lovers)>였는데 어쩌다가 이런 달콤한 제목으로 둔갑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오후 세 시에 차를 마시면서 벌이는 정사는 상당히 무르익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런 나른하고 조금은 퇴폐적인 분위기의 사랑을 ‘티타임의 정사’라고 부른 것은 제법 재치 있는 일이나 실제로 무대에서 펼쳐진 사랑은 오히려 산뜻한 야채맛이 났으며 장난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남편이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오늘도 애인이 왔었느냐고 묻는다. 삶에 지친 남편과 하루살이에 지친 아내의 대화에서 권태를 확인하는 연출의 작업 같은 것이 느껴진다. 남편이 집을 나가면서 아내에게 오늘도 애인이 오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세시에 아내의 애인으로 변장한 남편이 찾아와 아내와 정사를 나눈다. 정상적인 남편과 아내로서 갖는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상상 속에서 서로를 애인으로 여긴 그들의 간통 현장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사랑의 불모성, 그리고 허무감을 느낀다. 남편은 깡패나 공원지기로 변신하고 아내는 창녀나 귀부인이 된다. 그런 상상의 놀이가 아니면 삶의 권태로움을 이겨낼 수가 없다면, 상상의 놀이는 차라리 건전하다. 그것이 한 쌍의 부부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상상 속의 간통이고 불륜이라면 그것은 재미있는 놀이이고 장난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 문명사회가 그런 개연성을 지니고 있는 데에 있다. 상상의 놀이를 곁들이지 않으면 사랑의 행위가 이루어질 수 없는 병든 심리상태가 바로 문제다. 윤리의식을 배제해 버린 채로 상상의 세계에서 맺어지는 불륜의 관계는 고립된 한 중년 부부의 심층에서 자라는 독초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삶의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낯선 사람으로 변신한 부부끼리의 간통은 그냥 사랑의 장난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무서운 파멸을 암시하는 예고일 수도 있다. 아내는 그런 장난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남편은 장난이 끝나기를 바란다. 서로 질투를 시험하는 이 자극의 놀이는 새로운 자극을 좇다가 의식이 타락할 것을 두려워한 남편이 반성함으로써 어쩌면 끝이 날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상상 속의 애인과의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놀이가 끝났음을 선언하고 다시는 애인을 불러들이지 못하게 하지만 끝내는 아내라는 여자의 마성에 무릎을 끓고 만다. 상상과 현실을 구분 짓지 못하는 이 비극적인 연극의 끝부분은 상상 속의 간통 시간을 오후 여덟 시로 바꿈으로써 더 큰 불행과 파괴를 부를 것 같은 전율을 안겨준다.
헤롤드 핀터의 작품 가운데서도 비교적 주제 파악이 쉽다는<티타임의 정사>는 1974년에 이미 실험극장에서 이낙훈과 황정아가 짝이 되어 무대에 올려졌었고, 두 번째로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김영렬의 연출로 상연된 적도 있어서 이번 공연은 세 번째인 셈이다. 이번 공연의 특징은 하루하루의 삶에 지치고 권태로워진 중년 부부 역으로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오현경과 김자옥을 출연시킨 사실이다. 이 두 사람은 중년의 티를 전혀 낼 수 없는 연기자들이다. 그들의 분위기는 젊고 발랄해서 때묻은 느낌과 기름진 맛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 다. 그런 두 사람이 권태로움에는 어울리지 않는 정갈스런 무대에서 감미로운 효과음악에 맞추어 사랑의 놀이를 벌인다. 사랑의 놀이라기보다는 변신 속의 간통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무대 아래층은 현관과 거실로, 위층은 침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험극장의 구조 때문에 같은 평면에 펼쳐진 두 장소는 위층과 아래층의 차이가 뚜렷하지가 않았다. 실제로 이 연극에서 위, 아래라는 장소는 그다지 큰 뜻이 없다. 그것은 마치 주인공인 두 남녀의 생리적인 겉모습이 이 연극의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십 년쯤 같이 살아온 부부는 조금은 살찐 모습이고 세상만사에 다 시들해진 채로 그래도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과 기대 속에 그럭저럭 안정된 삶을 사는 것으로 그려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안정된 중년 부부의 세계는 권태롭다. 그들은 새로운 돌파구가 없으면 견디기가 어려운 아슬아슬한 모험의 충동을 안고 있다. 그런 중년 남녀들의 겉모습은 외설스럽고 뻔뻔스러울 수가 있다. 그러나 오현경이나 김자옥은 겉모습은 날렵하고 깨끗하다. 그들의 분위기는 기름지지도, 뻔뻔스럽지도 않고, 또 외설스럽지도 않다. 이렇게 배역을 정한 것은 연기자들의 내면 연기에만 의존하는 모험이다. 오현경이 보여준 중년의 리차드는 권태로운 문학 청년의 겉모습일 뿐이지 중년의 실업가다운 데가 없었고, 김자옥이 분장한 사라도 양갓집 규수처럼 청순하기만 하다. 그래서 두 사람이 풀어 가는 사랑의 유희는 결국은 하나의 연극에 지나지 않음을 입증했다. 또 이 연극에서 연출가는 청소년 같은 두 연기자를 통해서 때묻고 지겨운 삶을 사는 중년 부부는 삶의 탈출 방식으로 간통놀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두 연기자는 그들대로의 분위기를 가지고 중년 부부의 놀이를 해내면 되었다. 그들이 중년의 나이로 둔갑하지 않더라도 연극 자체가 하나의 놀이니까 그들이 중년인 것처럼 흉내만 내면 되었다. 중년의 흉내가 중년다워 보이지 않더라도 이 두 남녀 연기자가 본디 지니고 있던 분위기를 드러내는 가운데에 담겨 있는 중년으로서의 내면 연기가 관객에게는 하나의 즐거움으로 전달되었다.
때묻고 지겹고 게으른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중년의 에로티시즘이 곱고 상큼하고 맑게 만들어진 것은 아마 연출자나 연기자들이 바라지 않았던 성과일지도 모르겠다. 또 이처럼 극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연기자를 무대에 세움으로써 역설적인 성과를 올리게 된 것은 어쩌면 그것이 헤롤드 핀터의 특이한 세계 안에서 만들어진 놀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핀터의 매력은 역설에 있는 것 같다. 그가 만들어내는 상황과 대화의 침묵, 그리고 이러한 상황의 되풀이는 결국 삶의 권태로움을 깨뜨리는 역설의 효과를 낸다. 그 역설은 우리들의 삶, 곧 실존의 뿌리에 매달려 있는 혹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 역설의 혹을 건드리는 작가의 극작법이 우리에게는 전율감을 자아내게 하고 어떤 파탄의 예고처럼 느껴져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기름진 놀이에 곁들여진 상큼한 맛도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끼리 맞부딪칠 때 생기는 상충의 긴장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무대 전체에 넘치는 청결감(미술, 조명, 의상 효과)과 작품 내용의 퇴폐성이 맞부딪치게 된 것도 그런 긴장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권태로움 속에 살면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관객들에게 우리가 사는 삶이 정말로 참다운 삶인가를 놀이 방식으로 보여주면서 물어 본 이 연극은 오히려 인생에 대하여 어떤 철학자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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