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승희 '이대감 망할대감'

clint 2016. 6. 23. 15:00

 

 

 

박승희 作 「이대감 망할 대감」 은 짧은 분량에 내용도 그다지 어렵지 않아서 아주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아랫사람들이 작전을 짜고 인색한 대감을 함정에 빠뜨려 망신을 준 후, 그 소문을 퍼트리지 않게 하는 것을 빌미로 대가를 챙기는 내용의 간단하고 해프닝적인 줄거리를 담고 있는데 마치 tv에서 보던 고전 코미디 같은 느낌을 주었을 만큼 가볍고 우스운 이야기다

 

 

 

1922년 이 희곡의 작가 朴勝喜와 김기진, 김복진, 이서구, 김을한 등이 결성한 연극 단체인 土月會의 연극이 당시의 신파극계에 미친 영향은 크다. 자연스러운 일상 회화식의 대사와 연기와 아울러 작품 내용올 고증하여 연출함으로써 비로소 사실적인 근대극을 소개하였다. 이때부터 상연 대본올 갖게 되었으며 또한 사실적인 무대장치와 의상 등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박승희가 주도한 토월회의 연극은 한마디로 말하면 엄격한 의미에서 현대극 즉 신극은 아니었으며 다분히 卑俗化된 서양 근대극의 소개였다고 할 수 있겠다. 토월회 제1회 공연 때의 박승희의 작품 『吉植』은 당시의 다른 작가들의 테마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모랄과 근대적인 모랄의 갈등을 다루었고 유교적 구습의 타파와 근대의식의 고취를 내용으로 하였다. 토월회가 직업 극단으로 바뀐 뒤 박승희의 작품은 리얼리즘 계통의 신극 쪽보다는 개량 신파극 쪽으로 기울었으며, 그의 현실 파악은 감상적이요 피상적이었다. 토월회 말기에 속하는 1928년에 공연한 희극 『이 대감 망할 대감』(1막)은 고전소설 『배비장전』에서 힌트를 얻어 쓴 것 같다. 시대도 같은 근대조선으로 잡았지만 구성도 서로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밖에 『춘향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추풍감별곡』 등을 각색한 바 있는데 우리나라 고전소설을 각색하여 신극 무대에 올린 선구적 시도로서 그 공적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대감 망할 대감』은 회화적인 수법과 대사로서 비교적 짜임새 있게 다룬 희극이다. 그 웃음속에 하나의 교훈이나 윤리를 설정했으며 풍자성까지 질게 풍겨 준다. 대체로 눈물과 한탄을 주로 한 퇴보적인 비극이 판치던 우리나라 신연극 초기에 박승희의 『이 대감 망할 대감』은 매우 건강한 웃음과 풍자로 엮은 작품이다. 슬픔과 굴욕에 시달려 왔던 관객에게 웃음으로 대응하려는 박승희의 시도는 어느 의미에서는 역설적인 눈물의 變容이었을 것이다.

 

 

 

 

 

박승희는 일본 메이지대학 영문과 재학 중 김복진(金復鎭)·김기진(金基鎭) 등과 극단 토월회(土月會)를 조직, 안톤 체홉의 《곰》, 버나드 쇼의 《그는 그 여자의 남편에게 무엇이라 거짓말을 했는가》, 유젠 피로트의 《기갈(飢渴)》 등의 번역극과, 자작 희곡 《길식(吉植)》으로 제1회 공연을 가졌고 이어 톨스토이 작 《부활(復活)》을 상연했다. 성공적인 2회 공연 이후 김기진 등 여러 문인들이 탈퇴하자, 홍사용, 원우전 등과 함께 토월회를 본격적인 신극 단체로 방향 전환했다. 1925년 극단 제도를 합자회사로 만들고 극작가 이서구, 연출가 박진, 여배우 석금성과 복혜숙, 가수 윤심덕 등을 영입함과 동시에 광무대를 전속극장으로 삼아 연중 무휴 공연과 배우 월급제, 배우 양상 활동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활동을 의욕적으로 전개했다. 이때 양성된 배우, 양백명, 서월영, 박제행, 서일성 등은 이후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명배우로 활동하게 되었다. 또한 박승희는 당대 명창인 김창룡의 창을 곁들인<춘향전>을 공연하는 등, 판소리극의 현대화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박승희의 토월회는 무리한 과욕과 공연 여건의 부족으로 56회 공연을 마치고 중도하차했다.
1932년 토월회를 태양극장(太陽劇場)으로 개칭하고 주로 지방공연을 했으나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으로 1940년에 해산, 광복이 되자 1946년에 《1940년》 《의사 윤봉길》 《모반의 혈》 등의 레퍼토리로 토월회 재기공연을 가졌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사랑과 죽음》 《산 서낭당》 《이 대감 망할 대감》 《혈육(血肉)》 《요부》 《고향》 《아리랑 고개》 등의 희곡 작품을 남겼다. 《이 대감 망할 대감》은 1928년 토월회의 재기 공연으로 이루어진 57회 공연작이었다. 이 작품이 문헌에 소개된 것은 연출가 박진의 책이 처음이었는데, 기존에 알려진 것은 박진의 개작본이었다. 박승희의 초고본은 1928년 10월호 [신문춘추]에 실렸다. (이재명 편저, 우리극문학의 흐름, 평민사, 2000 참조)

 

 

 

 


《이 대감 망할 대감》은 종래의 신파극이 아닌 근대적인 신극의 형태로 공연되었다는 점에서, 또 전통 판소리극을 근대적으로 수용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은 원래 판소리 12마당 중 하나였으나 전하지는 않는<배비장타령>의 백미에 해당하는 "배비장 봉욕 장면"을 근대적으로 극화하고, 전통 풍자 소설의 양상인 "폭로형"과 "쟁취형" 두 가지를 모두 수용하고 있다.


대감은 조선조 말 매관매직을 일삼던 전형적인 부패 양반의 한 사람으로, 이러한 계층의 부정 부패와 위선을 폭로하고 풍자한 것은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전답을 다 팔아서 대감에게 뇌물로 바치고 좋은 관직 하나를 얻기 기다리고 있던 내수는 대감이 뇌물에 대한 아무런 보답을 주지 않자 기다리다 못해 계략을 꾸민다. 호성의 꾀를 빌어 대감을 속이는데, 이 속임수가<배비장전>에서 애랑과 방자가 위선적인 배비장을 피궤짝 속에 들어가게 하는 속임수 모티프를 차용하고 있다. 내수는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척한 후 그의 처가 달밤에 대감을 유혹하게 한다. 그리고 처와 대감이 방안에 들어간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해 놀란 대감이 처의 충고대로 농 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든다. 그리고 나서 점쟁이가 농을 톱으로 썰어야 성공을 한다고 했다며 능청스럽게 대감이 들어간 농을 톱질하려고 들면서 대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놀려준다. 결국 대감이 스스로 농 속에서 뛰쳐나와 어쩔 수 없이 내수에게 좋은 관직을 약속하게 한다. 이때 일의 추이를 몰래 지켜보던 월매의 통고로 나타난 대갑의 첩도 대감을 졸라 자기 오빠의 좋은 관직 자리를 얻어낸다. 대감을 이래저래 망할 대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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