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만물은 생(生)과 사(死)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한 사람이 태어나면 더불어 한 사람은 늙어가고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여기서 죽음이란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겨울처럼, 생명을 틔우기 위한 죽음이다. 작품 속의 소녀와 노파는 태어나 자라고 늙어 죽기를 반복한다. 소녀는 이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 겨울 같은 존재인 노파를 살해한다. ‘상자 속 여자’는 늙음과 죽음이 젊음과 생명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는, 거룩한 제의식의 향연과도 같은 이야기이다.
김윤미 작 <상자 속 여자>는 우리 어머니 세대에 살아온 한 많은 여성의 삶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극의 구조는 1막과 2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막이 강인한 내면의 정열을 숨기고 잇는데 사회 고정관념에 갇혀 사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로테스크하게 담아내고 있다면 2막은 그 노파의 꿈을 이야기하는 몽환적인 장면들로 구성되어있다.
이 작품은, 어떠한 관습에 의해 생겨난 '여성'이라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여성의 강인한 내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김윤미는 1988년 신춘문예를 통해 연극계에 들어온 작가다. 그의 희곡에는 잔잔한 조용함이 숨어있는 반면 격정적인 힘이 실려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상자 속 여자> 역시 강인한 내면의 정열을 숨기고 있는데 사회 고정관념에 갇혀 사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로테스크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는 목청을 높여 여성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다만 잔잔한 물결 속에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거센 격랑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상자 속 여자>에서는 중성화된 어머니인 노파와 그의 딸인 소녀가 등장한다. 노파는 비참할 정도로 깡마르고 키가 크고, 임신복을 입고 있다. 그의 딸 소녀는 의자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발을 흔들고 있다. 그런 딸에게 노파는 천상 여자다웠던 이모 이야기와 여자로서 지켜야 할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던 이야기를 꿈 이야기로 풀어 나간다. 그리고 집안에 있는 장미꽃이 시들지 않게 단물을 주기를 원한다. 그 속에서 소녀는 점차 여성으로 자라고 있다. 고정관념에 빠진 노파는 점차 지식과 사회를 알아 가는 딸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딸을 핍박하고, 딸은 그런 노파에게 더 이상 거짓말로 환상을 만들지 말라며 대항한다. 이제 노파는 늙어서 아기 같은 소녀가 되어 버리고, 소녀는 자라서 산전수전을 겪은 노파가 되어간다.
김윤미의 <상자 속 여자>는 사회의 틀로 상징되는 상자 속에 살아온 한 노파의 삶을 그의 딸이 맞서기도 하고 애처롭게 감싸 안으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용하면서 잔잔한 구성으로 진행되지만 그 속에는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거대한 가부장적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있다.
‘노파 : 다리를 오므려라. 이제 넌 다리를 오므려야 해. 보여주지 말아. 아무한테나 기회를 줘선 안 돼.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지 말아라. 풍뎅이가 오줌을 쌌을지도 모를 테니깐. 이마를 찡그리지 말아라. 미간의 주름은 두고두고 근심만 부른단다. 잇몸을 드러내고 웃지 말아라. 창부같이 아무데나 몸을 내두르게 된단다. 머리를 풀어헤치지 말아라. 머리를 묶어라! 욕망의 검은 뱀을 단단히 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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