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봉원응 '황어장터'

clint 2016. 6. 16. 20:43

 

 

 

1919324일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 소재 황어장터. 장터에 모여든 수백 명의 군중들 속에서 갑자기 한 청년의 만세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장날이었던 이 날 한 사람 두 사람 따라 외치던 만세 소리는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로 퍼져 황어장터는 거대한 함성소리로 뒤흔들리게 됐다만세를 선창했던 이는 당시 부천군 계양면 오류리에 거주하고 있던 심혁성이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장터에 파견 나와 있던 순사에 의해 곧바로 주재소로 끌려가 후에 징역 8월을 선고받는다. 심혁성이 체포된 후 만세를 따라 부르던 군중들은 시위대로 변모해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는데, 이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재판에 회부되는 것으로 사건은 정리된다.

 

황어장날이었던 324일 하루동안에 일어났던 이날 만세시위는 인천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 중 가장 대규모의 만세시위 운동으로 알려지고 있다. 계양구에서는 이날을 기념해 황어장터가 있던 현 계양구 장기동에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을 건립해 관련 자료들을 전시해 두고 있다. 황어장은 본디 3일장과 8일장이 서는 정기 우()시장이었다. 황어장에 대해서는 이미 18세기 중반에 나온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부평지역에는 황어장을 포함해 모두 4개의 시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부평부(富平府) 북쪽인 황어면에는 3, 8일장으로 발아장과 황어장이 있었고, 부의 동쪽과 남쪽 지역에는 기탄장과 신기장이라는 이름의 시장이 존재하고 있었다1919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은 대개 장날과 일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최대한의 인원을 참여시키고 일본의 감시를 피하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황어장날에 발생한 황어장터 만세시위운동은 심혁성이라는 한 청년의 외침으로 시작됐으나, 심혁성이 체포된 후 강제 해산된 군중들을 재집결하는 과정에서 미약하나마 지도부가 형성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324일 밤 통문을 돌려 사람들을 다시 모으는 일을 주도한 것은 이담이라는 인물로, 그는 순사에게 끌려가는 심혁성을 탈환하려는 과정에서 순사의 칼에 맞아 사망한 이은선이라는 사람의 친족이었다이은선은 황어장터 만세운동 과정 중 유일한 희생자로 남았는데, 이담은 이은선의 사망을 확인한 후 사람들을 다시 집결시켜 장기리에 있던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결국 다음 날인 25, 인천경찰서에서 파견된 지원부대에 의해 시위 가담자들이 모두 체포됨으로써 만 하루 만에 만세운동은 막을 내린다.

 

 

 

 

이틀 후인 327일에 발간된 <매일신보>에서는 이 날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전말을 보도하고 있다.

"인천시내는 물론이요 부근 일대는 관헌의 취체가 엄중하기 때문에 비교적 평온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일전 강화도의 소요가 도화선이 되어 그 다음에 접근된 김포도 일어났고 다시 그 동네와 인천경찰서 관내의 경계선이 되는 부천군도 불온스런 형세가 있음으로 인천경찰서에서는 만일을 경비키 위하여 23일 화뢰 순사부장의 순사 2명을 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으로 파견하였더라. 그런데 24일 부평읍 밖 시장에서는 당일이 장날이 되어 다수의 사람이 모여드는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이보다 먼저 이곳에 들어와 있는 2~3인의 소요자 등은 군중을 선동하여 만세를 부르고 부평읍내로 들어가서 면사무소를 파괴하였음으로 취체 관원은 군중에게 해산케 하는 한편으로 주모자 몇 명을 검거하였는데,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기개가 높던 다수의 군중은 검거된 범인을 빼앗고자 하여 돌을 경관에게 던지고, 또는 경찰관에게 달려든자도 있어서 위험이 시시 각각에 있었으므로 경관 등은 부득이 발검하여 위협하였으나 오히려 폭행을 계속하였음으로 드디어 피를 흘리게 되어 소요자편에 5~6명의 사상자를 내고, 경관은 간신히 범인을 호송하여 주재소로 돌아왔다는 급보가 인천경찰서에 달하므로 본서에서는 그 날 즉시 편천경부가 순사 10명을 데리고 동지로 급행하였다더라."

 

이렇게 하여 사건은 끝났으나 관련자들에 대한 판결은 10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내려졌다. 이 때 판결을 받은 인물은 총 6명으로 심혁성이 징역 8, 이담이 징역 2, 최성옥과 김원순이 각각 징역 10, 임성춘이 징역 1, 이공우가 벌금 20원의 형을 받았으며, 판결 근거는 보안법 위반이었다만세운동의 시초가 된 심혁성은 출소 후 수십년 간 약초를 캐며 은둔생활을 하다 만년에 고향인 백석동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심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