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쉬가 1979년에 발표한 작품 『트맆티콘』은 〈삶과 죽음의 세 장면〉이라는 그 부제가 암시해주고 있듯이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련된 세 가지의 이야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제 1 장면에선 한 남자의 사망 앞에서 아내를 포함하여 그와 면식이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당혹감, 그리고 그들의 죽은 자에 대한 얘기가 중심이 되며. 제 2 장면에서는 명부의 세계에서 오로지 죽은 자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전개 되고, 제 3 장면에서는 한때 연인관계에 있었던 여자가 죽은 후 그녀를 잊지 못하는 한 남자가 그녀와의 아쉬웠던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 극은 〈향가 있는 자들과 죽은 자〉 - 〈죽은 자들〉 - 〈죽은 한 여자와 살아 있는 한 남자〉사이에 일어나는 세 부분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이야기가 똑같은 비중을 갖고 있지는 않다.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 자들을 중심으로 에워싸고 있는, 즉 〈살아 있는 자〉 - 〈죽은 자〉 - 〈살아 있는 자〉라는 극의 외적 구조를 보아서나, 또 죽은 자들의 이야기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살아 있는 자들의 이야기에서도 그들의 대화내용이 주로 죽은 자들이나 죽음에 관련된 것이라고 볼 때, 이 극은 죽은 자들과 죽음에 관한 문제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죽음을 주된 문제로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죽음의 문제는 프리쉬의 문학에서 결코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이 작품에 대하여 〈수십 년 이래로 계속되고 있는 동일한 주제의 반복〉이라는 평가와 〈수없이 봐왔던 진부 하기가 짝이 없는 일상적인 주제〉라는 혹평이 지적하는 것처럼 죽음의 문제는 소설 『위르크 라인하르트』(1933) 이래로 그의 작품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프리쉬가 『트맆티콘』에서 죽음의 문제를 새삼스럽게 다루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그 하나는 죽음의 문제가 이전의 작품에서는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있겠지만, 자신의 삶의 나이가 더해갈수록 그만큼 주변사람들의 죽음을 통해 갖게 되는 죽음에의 경험이 많아지고, 이러한 경험이 죽음에 대한 관심과 성찰을 심화시킨 결과 이를 작품화 하려는 욕구를 가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안도라』를 비롯한 우화 극에 거부감을 느끼고, 그리고 작품 『전기: 하나의 유희』에서 실험해 본 〈순서 바꾸기의 극작술〉에 대해서도 회의를 갖게 되어 시도하게 된 새로운 형태의 극, 즉 상연을 위한 극이 아닌 〈대화극〉에 죽음의 문제가 알맞다고 생각한 것에 있다. 말하자면 그에겐 상연되는 극이란 자신의 작업에 의한 것이 아니라서 흥미가 없을 뿐더러 작품의 의도와 어긋나기가 일쑤여서 못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무대 상연을 전제하고 극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자유로운 상상을 제약하기에 읽기 위주의 작품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 죽음의 문제는 무한한 상상을 시험해 보는 것에 가장 적합한 예라는 것이 그 이유인 것이다. 이는 그가 창작초기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연극이란 우리의 의식의 표현이다, 무대는 언제나 인간의 영혼이다.〉 라는 견해에로의 복귀인 동시에 〈글쓰기란 유희충동의 산물〉 이라는 입장과도 연결되는 것으로서 그는 실제로 이 작품 에서 보이지도 않고 논리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의 세계에 대하여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어떤 특정한 철학체계나 종교사상에 얽매이지 않으며, 그렇다고 하여 〈죽음은 무(無)이다〉라는 식의 죽음에 대한 통념적인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의 죽음관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가 죽음에 대해 생각한 것을 요약하면 죽음이란 〈존재한 것의 영원함〉, 〈기대의 부재〉, 〈생각 바꾸기의 불가능〉등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이 글은 이 같은 죽음의 속성을 토대로 『트맆티콘』에 나타난 프리쉬의 죽음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내고, 0|울러 이를 통해 프리쉬가 삶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삶과 죽음의 관계에서 살펴보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에 앞서 프리쉬의 이전의 죽음을 알아봐야 할 것이다. 체계적이지도 소상하지도 않지만 그는 이 작품이 집필되기 오래 전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력했고, 또 이것은 이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는 죽음의 속성을 어느 만큼은 미리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프리쉬가 작품 이외의 다른 글에서 죽음에 대해 얘기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언급하는 경우에도 대부분은 죽음에 대 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을 뿐. 어떠한 답변도 주고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일기 『일기 1946-1949』 에 있는 다음의 글은 그나마 눈여겨볼 만하다.
우리는 매순간 삼고 죽으며, 이 두 가지의 것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죽어감으로써 살 수 있기에 태양이 그것의 열을 소모하듯 삶을 소모한다. 우리는 이러한 비존재에로의 끊임없는 기울음을 느끼며, 또 그런 때문에 표상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비유가 되는 기울음, 시간의 어떤 가시적인 기울음, 즉 구름의 흐름, 떨어지는 나뭇잎, 나무들의 성장, 경사져 있는 해변, 새로이 초록으로 갈아입는 가로수길, 떠오르는 달을 어디에서 보게 되건 우리는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프리쉬의 생각은 죽음과 상관관계에 있는 삶과의 비교에서 출발하고 있다. 삶이 죽음을 전제하지 않고선 상상할 수 없듯이. 그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서로 간에 무관한 별개의 것이 결코 아니다. 삶은 삶대로 죽음은 죽음대로 독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원래 하나인 것이 두 개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일 따름이며, 더 정확히는 삶 속에 처음부터 죽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순간 살고 죽으며. 이 두 가지의 것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이긴 하지만, 삶은 죽음의 시초인 것이며, 죽음은 삶의 종말로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삶과 죽음은 순서 없이 함께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은 일정한 방향으로 죽음이라는 종점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변화, 즉 삶의 소모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변화이며, 죽음은 이러한 변화의 끝인 것이다. 그런가하면 죽음은 표상할 수 없는 것이란 점에서도 삶과 구분된다. 죽음은 우리가 비존재에로의 끊임없는 기울음을 느낌으로써 사유해볼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삶과는 달리 직접적인 표상의 대상은 아니다. 기껏해야 〈시간의 가시적인 기울음〉 즉 눈에 보이는 시간의 흐름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구름의 흐름, 떨어지는 나뭇잎, 나무들의 성장 등등이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하는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프리쉬의 죽음관이라면 하등 새로울 게 없다.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죽음 관을 확인하고 있을 따름이다. 죽음에 대한 프리쉬의 생각이 이 같은 통념적인 것을 넘어서서 보다 발전된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은 이로부터 20여년 후에 쓰여 진 그의 또 하나의 일기 『일기 1966 ᅳ1971』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제 프리쉬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표상할 수 없는 대상이 아니다. 표상이 가능할 뿐더러 퍽이나 구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지는데, 그가 그리스 사람들의 명부 관과 비교하여 묘사하고 있는 죽음은 일견 삶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인들은 명부의 세계에 대해 어떻게 표상했을까: 출리콘 출신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부부가 장기놀이를 하고 있으며, 다른 곳에서는 순진한 땀들을 데리고 있는 한 가족이 있다. 감실에서는 어떤 뚱뚱한 핀란드 남자 《말로의 작품을 읽고 있다)가 여전히 혼자 있고, 그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조심스레이 몸을 구부려 인시를 나눈 다음에는 지루함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기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다. 그들은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옆 탁자로부터 내게 들려온다. 어디서 물건을 가장 잘 살 수 있는가- 게다가 그들은 살아있을 때처럼 커피를 마신다, 나중에는 바에서 얘기가 들려온다. 홍콩에서 식사를 가장 잘 할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런 다음 그 부인은 어떤 유태인 선생- 위트를 얘기한다.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웃는다. (….) 그러나 이 부인들은 더욱 많이, 더 빠르게 수다를 떨고 있다. (….) 평생의 반려자가 뇌졸중을 일으킨 후 그를 돌보고 있는 어떤 아내는 그에게 (....) 그가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을 이따금씩 말하고 있다. 촐리콘 출신의 그 부부는 느린 왈츠를 추고 난 후 이제 잠을 자러 갔다. (...) 지금은 열시이다. 내일도 날이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의 세계에 있는 자들의 생활은 살아 있는 지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그들은 살아 있을 때처럼 커피를 마신다〉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웃는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삶의 외양만 놓고 보자면 이들의 삶은 살아 있을 때와 전혀 차이가 없다. 이들의 대화는 〈어디서 물건을 가장 잘 살 수 있는가?〉 또는 〈홍콩에서 식사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이다. 하지만 윗글에서 밑줄 친 〈지루함〉,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을 이따금씩 말하고 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곰곰이 따져보면 죽음은 삶과는 먼 거리에 있다. 먼저, 죽음의 세계에서의 〈지루함〉이란 삶의 과정에서 존재하게 되는 일시적인 지루함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루함이란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에서 오는 무료함이며, 수행하고 있는 일이 있지만 그 일이 내적인 욕구나 흥미와는 무관한 데서 느끼는 따분함이다. 또한 삶이 변화 없는 것으로 여겨지거나, 차후의 삶이 현재의 삶과 다름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느낌에서 오는 권태로움일 수도 있다. 그렇긴 하나 이런 류의 지루함은 삶에서 이따금씩 찾아드는 것이며, 이럴 경우에도 엄밀히 말하면 동일한 삶이 아닌 유사한 삶의 반복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죽음에서의 지루함이란 생전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반복하며, 그것도 영원히 되풀이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삶의 어떠한 지루함과도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위 인용문에서 커피, 웃음, 물건사기, 식사 등과 관련된 일 들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음 이전의 삶을 있는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의 한 예이다. 이 삶의 되풀이는 한시적인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이다. 그런 만큼 이들이 반복에서 느끼는 지루함은 더없이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달래기 위해 이들은 대화상대자를 찾지만, 여기에서의 대화란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 이미 나눴던 대화, 생전의 대화를 주고받을 뿐이다. 특이한 것은 이들이 이 대화가 죽음 이전에 했던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무료함을 달리 해결 할 방도가 없기에 이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화자 가운 데 한 여자가 지루함을 깨뜨리기 위해 〈유태인 선생-위트〉 를 부리고 있지만, 그것이 생전에 했던 것의 반복을 의미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위트는 위트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을 뿐더러, 도리어 이들이 겪고 있는 무료함읍 강조해 주는 것이 된다. 대화자들이 〈더욱 많이, 더 빠르게 수다를 떠는 것〉도 나누는 대화가 흥미 있거나 재미있기에 그러는 것이 결코 아니다. 견딜 수 없는 무료함에서 그저 벗어나기 위한 시도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도는 재차 더 큰 무료함을 낳게 한다. 그럴 것이 그들은 수다 떨기의 내용이 이미 반복이 라서 따분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이들은 이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다시 그들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는 수다 떨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는 말하자면 무료함을 벗어나기 위한 수다 떨기가 역으로 무료함을 낳고, 이 무료함이 다시 수다 떨기를 요구하는 그런 방식의 악순환인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세계에서의 이러한 지루함은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자들에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완전한 지루함〉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죽은 자가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을 이따금씩 말하고 있다〉는 것은 삶의 세계에서 살아 있는 자가 대화상대자에게 기억을 환기시키거나 어떤 사실을 강조키 위해 그렇게 말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죽은 자들은 생전에 생각한 것 이외의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없고, 따라서 생전에 말하지 않았던 것을 얘기할 수 없다. 말할 게 있다면 그것은 오직 생전에 했던 얘기뿐이다. 뇌졸중을 당한 남편을 보살피고 있는 한 부인은 남편에게 그가 예전 (죽음 이전을 말함)에 알고 있었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는 그녀가 새로운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생전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기에 남편이 이미 알고 있는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기억을 환기시키려 하거나 말하는 내용을 강조하려는 뜻과는 상관없이 같은 사실을 두 번 혹은 그 이상 반복한 다는 것은 무의미하며. 그런 이유에서 이것은 일상생활에서는 회피되거나 있을 수 없는 일로 간주되기가 상례이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이를 할 수밖에 없으며, 또 끝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새로운 생각을 한다는 건 죽은 자들에게는 단 한 번도 허용되지 않는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을 이따금씩 말하고 있다〉에서 왜 〈이 따금씩〉이라는 표현을 했는가를 음미해보면 될 것이다. 이 부인은 죽음 이후에는 새로운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또 영원히 할 수 없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생전에 했던 얘기이고, 이 얘기를 한다 하더라도 반복이기에 무의미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생전에 했던 어떤 말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화의 부재에서 오는 끝없는 무료함을 견딜 수 없어서이다. 그러니까〈이따금 씩〉이란 낱말은 무의미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그녀의 대화상 대자인 남편이 뇌졸중으로 청취력이나 이해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새로운 생각을 영원히 할 수 없음에서 느끼게 되는 완전한 무료함을 최소한으로 줄여보려는 그녀의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죽음은 〈새로운 생각하기의 불가능〉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날지언정 결코 영원하지는 않는 삶과는 구별된다.
끝으로, 죽음의 세계의 삶에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이다〉는 생전의 삶에서의 변화 없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이다. 변화란 미래의 삶이 현재의 삶과 달라짐을 가리키는 거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는 차후의 삶이 새로운 것이 되리라는 기대를 전혀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죽음의 세계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현재의 삶이 생전의 삶의 반복이 듯 현재의 삶과 다른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에겐 미래 란 과거와 현재의 또 다른 이름일 뿐 새로운 것을 약속해주는 시간은 아니다. 그리고 미래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다만 생전 의 삶이 영구히 반복된다면, 희망은 물론이거니와 뭔가를 바라고 있음으로써 생기는 초조함이나 어떤 일이 실현되지 않음에서 오는 절망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요컨대 죽은 자들은 새로운 삶을 기대할 수 없기에 시간의 흐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일도 날이다〉는 그런 것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내일도 지금까지 있어왔던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가 될 것이니까 날의 바뀜에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다. 삶이 때때로 반복이라는 벽에 부딪히지만 전체적으로는 변화의 연속이고, 또 이 변화에 의해 현재의 삶이 차후의 삶에 대한 기대로 충만 된다고 볼 때, 기대가 영구하게 부재하는 죽음은 이 점에서도 역시 삶과 크게 상이하다.
이렇게 보면 프리쉬의 죽음관은 처음에는 죽음에 대하여 통념적인 해석에 머물고 있지만, 그 다음에는 〈완전한 지루 함〉, 〈새로운 생각과 기대를 영원히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진전되어 간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관은 이 후에도 계속 변화되고 확대되어져서 〈존재한 것의 영원함〉, 〈기대의 부재〉, 〈생각 바꾸기의 불가능〉이라는 것으로 발전 한다. 이는 바로 프리쉬의 죽음관의 핵심이며, 또한 이 글이 살펴보려는 작품 『트맆티콘』에 잘 나타나고 있다.
죽음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자들은 각자가 상이한 내용의 삶을 살고 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생전에 살았던 삶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생전과 다른 행동이나 사고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전에 경험한 것만을 경험할 수 있으며, 생전에 생각하고 말한 것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프롤은 생전에 결혼생활이 원만치 못하여 아내와 자주 언쟁을 벌였고, 그럴 때마다 낚시하러 가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습관은 죽음 이후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간간이 다른 등장인물과 대화를 나누는 몇몇 장면만을 제외하면, 그는 시종일관 낚싯대를 던지고 끌어당기는 것 이외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명부의 강에는 고기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낚시하는 일을 중단치 않는다.
주유소 임차인인 프롤의 아버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프롤이 어렸을 때 낚시하는 것이 서툴러서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곤 했으나, 프롤의 낚시는 늘 실패로 끝났다. 그때마다 그는 야단을 치고 재차 낚시 법음 가르치면서 〈저 녀석은 낚시할 줄도 모른다.〉는 비난 섞인 말을 하곤 했다. 사후세계인 지금에도 그는 프롤에게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을 반복하며. 생전에 프롤에게 가졌던 부정적인 생각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죽음 이전에서의 생각과 행동을 반복하는 것은 한때 부부였던 클라스와 카트린에서도 그렇다. 클라스와 카트 린은 생전에 생활습관의 차이로 잦은 부부싸움을 벌였고. 그 결과 이혼했다. 이들은 사후세계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도 두 사람은 과거의 싸움장면을 재연할 뿐 이전과는 다른 생각이나 행동은 하지 못한다.
죽은 자들은 이처럼 죽음 이전의 삶을 되풀이하면서 살아 갈 수밖에 없다. 이들의 삶에는 일어나지 않은 것은 결코 일어날 수 없고, 오로지 〈있었던 것〉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있었던 것〉은 이들의 사후에서 전혀 그 내용이 바뀌지 않을 뿐더러 영원히 존재한다.
부랑자 : (…) 있었던 것은 바뀌어질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영원함인 것입니다.
있었던 것이 영원히 존재하기에 죽은 자들의 생전의 삶은 그들의 사후 세계에서 입회 식으로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된다. 이들은 부랑자의 말처럼 〈지나간 것의 영원함 안에서 지내고 있으며, 자신들의 불쾌한 일을 다 핥아 먹을 때까지 핥아대고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있었던 것의 영원함〉은 그 자체 안에 애초부터 영구한 반복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롤이 극의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낚시하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거나, 카트린이 흔들의자에 앉아 의자를 흔들다가 이를 중단하고 그런 다음 또다시 흔드는 일을 거듭하는 것이 그러하며. 플룻을 부는 남자의 행동 역시 그렇다. 그는 연주하려는 곡을 끝까지 연주하려고 애쓰지만, 인성한 대복에 이르게 되면 번번이 실수를 한다. 이때 마다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만 재차 그 대목에서 실수를 저지르게 되어 또다시 처음부터 연주한다. 하지만 이러한 영구한 반복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무래도 비행 사고로 사망한 조종사와 그의 아이가 보여주는 공놀이 장면 일 것이다.
부랑자 : 이제 아이가 던집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받고요, 이제 아버지가 던져요, 이제는 아이가 받는군요... 아니에요, 아이가 받지 못하네요, 하지만 아버지가 공을 가져와서는 다시 한 번 던지네요. 이제 아이가 받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박수를 칩니다. 이제 다시 아이가 던집니다. 그러나 너무 낮게 던져서 아버지는 몸을 구부리지 않으면 안 되는군요. 이전에 그랬던 것과 똑같이 하고 있네요! - 그리고 이제 아이가 받습니다, 이제 아이가 던집니다, 이제는 또다시 아버지가 받고요. (...)
부랑자 : 코다크봄!
목사 :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부랑자 : 그들은 공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 그들은 공놀이를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이가 공을 던지고 받는 놀이를 계속하고 있다. 던지고 받는 행위가 지나치리만큼 되풀이되고 있음은 〈또다시〉라는 의미를 가진 유사한 낱말들, 즉 〈다시 한 번〉과 〈다시〉가 세 번에 걸쳐 쓰여 지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공을 주고받는 행위가 이 장면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윗 공놀이 장면의 끝 문장에서 〈또다시〉만 제외한다면 〈이제 아이가 던집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받고요〉라는 첫 문장과 끝 문장은 동일해진다. 첫 문장에서 아이가 공을 던지고 아버지는 받는다. 그런 다음 던지고 받는 주체가 세 번 뒤바뀌면서 끝 문장에 가서는 첫 문장에서와 똑같이 공을 던지는 쪽은 아이이고 받는 쪽은 아버지가 된다. 여기서 공을 던지고 받는 행위가 단지 세 차례 반복되고 있지만, 이는 던지고 받는 주체가 원상태로 회복되었다는 것으로서 이제 공을 던지고 받는 행위가 처음부터 다시금 시작되리라는 것을 암시해준다.
그런데 이 공놀이는 마치 한번 찍혀진 사진의 내용물이 영원히 보존되듯이 지속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들은 공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 그들은 공놀이를 했던 것입니다〉라는 부랑자의 말이 바로 그런 사정을 알려준 다. 이들의 공놀이는 지금 처음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전에 했던 공놀이가 그대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 이다. 그것도 영원히 말이다. 이럴 경우 사진에 자신의 모습이 찍혀 있는 당사자가 숙명적으로 사진을 영원히 반복해서 들여다 볼 수밖에 없을 때에 느끼게 되는 지루함을 공놀이의 당사자들도 가지게 될 것이다. 죽은 자들이〈존재한 것의 영원함〉속에 갇혀 생전의 삶을 영원히 반복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이 바로 이 지루함이다. 명부의 삶은 생전의 삶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이며, 〈있었던 것의 영원한 반복〉임을 사자 (死者)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는 카트린의 〈영원한 것은 진부한 것이다〉란 말은 이 같은 지루함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그런 삶의 무의미성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죽음에는 〈있었던 것만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죽음의 세계에는 그 대상이 무엇이건 앞으로 어떠한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 요컨대 어떠한 기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예시해줌이 된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기대〉의 문제를 따로 살펴보려는 것은 〈있었던 것만이 영원히 존재한다.〉의 문제가 있었던 것, 즉 과거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면 〈기대가 없음〉이란 다가올 것, 미래적인 것 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크사브와 카트린은 생전에는 연인이었고 동거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카트린이 크사브가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려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이들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어 급기야 그녀의 가출로 끝나고 만다. 이후 이들은 재결합하지 못한 채 죽게 되나, 사후에 다시 만나게 된다. 이 사후세계에서 크사브는 과거에 있었던 카트린과의 아쉬웠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고 그녀에게 접근하지만 그럴 때마다 카트린은 자신들은 이제 이전의 삶을 반복할 수밖에 없으며. 그 이유는 자신들이 죽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카트린 : 우린 더 이상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해요, 크사브, 우리는 죽어 있는 거예요, 크사브, 그리고 우리 가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시 못했던 건 그냥 그대 로 있는 거예요.
크사브가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려고 애쓰지만, 생전의 삶에 서 서로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을 죽음의 세계에서 새롭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상대방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감정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는 말을 한다 해도 그건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이 카트린의 생각인 것이다. 이는 죽음의 세계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즉 〈이미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그러므로〈있었던 것의 영원한 반복〉과 더불어 죽음의 세계의 또 다른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크사브의 기대가 그가 카트린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려는 일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의 죽음을 간간이 일시적으로 망각하는 데에 기인하고 있다면, 목사의 기대는 즉음의 세계의 이 같은 속성을 완전히 오인하는 것에서 출발 한다. 그는 몇몇 다른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죽음 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만, 이 죽음의 세계를 생전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그러니까 천국으로 가기에 앞서 존재하는 연옥의 세계로 이해하고 있다. 말 하자면, 그는 생전의 세계에서의 그의 소임인 구원의 임무를 이곳에서도 충실히 이행하려는 뜻에서 사람들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고 또 어떻게 하여 죽었는가를 알아보려 하며, 이를 통해 곧 있게 될 신의 심판 앞에서 가능한 한 이들이 구원되도록 도와주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이 죽음의 세계에서 머지않아 생전의 세계와는 다른 구원의 세계가 도래하리라는 걸 그가 믿어 의심치 않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의 태도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죽음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이들은 이곳의 삶이 생전과 다를 바 없음을 이미 알고 있고, 그러하는 한 이 죽음의 세계 이외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에 대한 힐난에 가까운 다음의 카트린의 말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존재근거를 두고 있는 종교 가 거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마저도 죽음의 세계에서는 무용한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죽음의 세계에서의 기대의 완전 한 부재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카트린 :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고 있어요.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의 삶에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 그의 소임이었지요.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는 그에게 더 이상 소임이 없다는 것읍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이라는 종교적 기대가 죽음의 세계가 생전의 세계와 동인해짐에 의해 무효화되는 것과 같이 죽음의 세계에서는 일체의 희망뿐만 아니라 다가올 것에 대한 두려움(넓은 의미에서의 희망의 한 변형임)까지도 이로 인해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희망의 대상은 그것이 새로운 것일 때라 이 희망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고, 두려움 역시 그것의 대상이 이전의 그것과 다른 것일 때 두려움으로서의 효력이 있으나, 그 대상이 늘 같은 거라면 권태로운 것이 될지언정 그 이외의 다른 의미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세계에서는 희망과 두려움이 없다〉라 할 때에 문제되는 희망과 두려움이란 그 대상이 항시 다르고 새로운 희망과 두려움이 아니다. 죽음의 세계에서의 희망과 두려움이란 동일한 대상에 대한. 그것도 이미 생전에 가졌던 희망과 두려움일 뿐, 항시 그 대상이 바뀐다는 의미에서의 희망과 두려움은 결코 아니다.
죽음에서의 이 같은 희망과 두려움에 비하면 삶에서의 그것은 그 성격에 있어 사뭇 다르다. 삶의 과정에서 인간은 일시적으로 뚜렷한 희망과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경우도 있고, 또 희망과 두려움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실현되고 해소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얼핏 똑같은 내용의 희망과 두려움이 지루하게 계속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간의 경과에 의해 그때마다 일정한 희망과 두려움을 갖게 됨은 물론이며, 이것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기 마련이다. 삶은 그런 점에서 늘 새로운 희망과 두려움의 연속이 만들어내는 긴장인 것이다. 크사브의 〈당신은 삶음 살아 본 적이 있습니까?〉 라는 물음에 노인 프롤의 〈아! 네, 가끔은…〉이라는 대답도 비록 그가 삶에서 그다지 많은 희망과 두려움을 갖지 않았고, 또 그것의 실현과 해소가 때론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일련의 새로운 희망과 두려움이 빚어내는 삶의 변화가 곧 삶의 의미라는 고백인 것이다.
크사브: 프롤씨, 당신은 삶을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노인 : 아! 네, 가끔은… 이곳에는 어떠한 기대도 더 이상 없소. 그것이 차이라오 […]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어떤 뭔가를 끊임없이 기대하오, 시시각각 말이오.… 하지만 이곳에는 어떠한 기대도 더 이상 없소, 어떠한 두려움 도 어떠한 미래도.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한 번의 죽음으로 영원히 끝이 나면, 요컨대 왜 모든 것이 그토록 무가치하게 여겨지는가에 대한 까닭인 것이오.
그러므로 〈죽음의 세계에서의 기대의 부재〉에서 문제되는 것은 기대 자체의 유무가 아니라 그 기대가 새로운 대상의 것이냐 아니냐, 인 것이다. 이것이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를 구분지우는 점이다. 죽음에는 이러한 기대가 완전히 부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있었던 것〉의 반복에 의해 이미 무의미해진 죽음의 세계에서의 삶은 이러한 단 하나의 기대도 없음으로 인해 그 무의미함은 더욱 완전해진다. 새로운 기대가 설혹 일회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있었던 것의 영원성〉이 만드는 완전한 지루함은 깨어지고 죽음에 서의 삶은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탈바꿈할 것이 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기대의 부재는 죽음의 세계에서의 삶이 완전한 지루함과 무의미함을 갖게 되도록 만드는 궁극 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극의 결말부인 제 3장면에 등장하고 있는 〈로제- 프랑신느 이야기〉는 〈생각 바꿔하기의 불가능〉이 죽음의 세계의 또 하나의 속성임을 보여준다. 로제와 프랑신느는 3년간의 동거 생활 끝에 헤어진다. 로제는 프랑신느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는, 즉 사랑이 가져다주는 황홀함. 동경, 불안. 쓰라림 등을 즐길 뿐이라는 생각에서, 프랑신느 쪽에서는 로제가 삶에 자신감을 가질 때는 그녀를 부담스럽기만 한 짐으로 여기고,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을 때는 그녀에게 매달리는 이중적인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 결별한다. 이후 로제는 미국으로 건너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프랑신느는 파리에 남아서 혼자 살게 된다. 이들은 이 기간 동안 한 번도 재회하지 않으나 몇 차례의 서신왕래는 갖게 된다. 그런데 이들은 이를 통해 관계를 개선할 수도 있었지만 서로가 자존심을 내세움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프랑신느는 병으로 죽게 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로제는 이때부터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반성과 후회의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이 결과 그는 결국 이혼에까지 이른다. 수년간에 걸친 프랑신느에 대한 회한을, 그리고 마음에 남아 있는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억누르지 못한 그는 어느 날 돌연 프랑신느와 헤어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파리의 어느 공원 부근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그는 예전에 프랑신느와 함께 앉아 있었던 벤치에 앉아 회상에 잠기는 가운데 그녀와의 이 마지막 만남에서 나눴던 대화를 되뇌이기도 하고 지금의 자신의 생각을 고백하기도 하는데, 그 내용은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그는 두 사람이 해어지기로 결심한 것은 서로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대방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나, 그것은 살아 있을 때에서나 의미 있는 것이고 상대방이 죽고 난 이후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또 과거에는 자신이 모든 점에서 정당했다는 주장을 하곤 했는데 그녀의 죽음 이후 그런 생각을 바꾸게 됐다는 것, 자신의 과거 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으며, 만나고 싶은 나머지 꿈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는가 하면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해 자실하려는 충동을 갖기도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녀의 죽음 이후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프랑신느와 대화를 나누려 한다. 말하자면 그는 이 대화를 지금까지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방안으로 여기고, 이를 실현해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화 (물론 여기에서 프랑신느가 하는 말은 그녀가 실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로제가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프랑신느의 말을 상기하면서 하는 독백이거나, 또는 순전히 그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프랑신느의 말, 즉 그녀가 살아 있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에게 하리라고 여겨지는 그런 말에 불과하다) 에서 그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침묵과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프랑신느의 말, 그리고 자신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낸 프랑신느의 말밖엔 아무것도 없다. 먼저, 이 프랑신느의 말이라 히는 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이 프랑신느의 말은 그의 기억에 있는 것으로서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에 대한 그의 응답은 언제나 기껏해야 〈당신은 그렇게 말했소〉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런가 하면 그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낸 프랑신느의 말 역시 새로운 것이 없다. 그의 상상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 프랑신느의 말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말, 즉 그녀가 생전에 실제로 한 말에 크게 의존해 있고, 또 그것에서 결코 많이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에 답답함을 못 이긴 그는 프랑신느에게 〈뭔가 말 해봐요!〉라고 다그치지만, 또 다른 침묵과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마지막 만남에서의 그녀의 말. 또는 마지막 만남 이후에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스스로가 말하는 것만 있을 뿐 새로운 것이라곤 없다. 마지막 만남 이후 그녀가 어떤 말과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거니와, 하물며 그녀의 죽음 이후의 그것에 대해서는 그로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로제가 자신이 갖게 된 새로운 생각을 그녀에게 전달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대화를 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그때마다 좌절된다. 그럼에도 그는 이 시도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예컨대 그녀의 침묵을 다른 시각에서 해석해 보려고까지 하면서 어떻게든 대화를 진전시키고자 한다. 〈당신의 침묵. 프랑신느 - 난 당신이 살아 있었던 한에는 당신의 침묵을 이해했소.〉라는 언급이 그런 것이다. 그는 침묵은 그 자체가 대화의 한 형태로서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또 침묵 다음에는 반드시 침묵을 깨는 대화를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의 그녀의 침묵은 그런 의미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끝없이 이어지기에 그로서는 그런 침묵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으니 침묵을 중단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토로 역시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전달함으로써 그녀로부터 새로운 생각을 들어보려는 일이 불가능함을 다시 한 번 자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연이어서 말하는 〈죽은 자들과는 얘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는, 인정 하고 싶지 않지만, 프랑신느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말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그녀의 말 외엔 달리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음으로 침묵이 있을지언정 새로운 내용의 대화는 바랄 수 없다는 탄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이것의 근본 원인을 생각 바꾸기가 죽은 자에게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신느 : (...) 그때 난 믿고 있었어요. 당신은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며, 나도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말이에요. 우린 죽어 있지 않았어요, 로제, 그러지 않았어요! "- 지금처럼은.
앞서 언급했듯이 로제와 프랑신느 사이의 모든 대화는 실상은 로제의 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윗 인용문에서 대사의 주체가 프랑신느로 표기되어 있지만. 위의 말도 로제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프랑신느가 만일 살아나서 진전이 없는 대화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자신에게 충고한다면 아마 위와 같은 말을 하게 될 거라는 것이다. 로제의 이 말은 상상적인 것이 지만. 이것은 어쨌든 그가 만들어낸 말이고 그의 심중 토로이다. 로제는 생각 바꾸기는 살아 있는 한에서만 기능하며, 죽은 자에게는 결코 허용될 수 없음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갑자기 깨닫게 되는 거요, 내가 항시 말해왔던 것, 언젠가 생각했던 것이 전혀 옳지가 않다는 것을〉 〈그 당시의 나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된다오…〉 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이 과거와는 다른 생각을 가졌음을 호소함으로써 이에 상응하는 대답이나 생각 바꾸기를 프랑신느에게서도 한사코 기대해 보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이 기대가 헛된 일임을 알게 된다. 자신은 살아 있는 자이기에 과거와는 다르게 생각 할 수 있으나, 〈있었던 것의 영원성〉안에 감금되어 있는 죽은자에겐 〈과거〉만이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이 깊어지면서 그가 애초에 가졌던 의도, 즉 자신의 생각이 예전과는 달라졌음을 알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랑신느로부터 그녀 역시 과거에 가졌던 생각을 바꾸었음을 듣게 됨으로써 오랜 세월동안 시달려온 죄의식에서 벗어나 미음의 위안을 찾으려는 희망은 절망으로 변하고 만다.
로제 : (...) 프랑신느, 하지만 그 당시에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해 봐요. 당신이 그 이후에 생각한 것을. 당신이 오늘 말했으면 하는 것을 우리의 이야기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을, 프랑신느!
〈그 당시에 말하지 않았던 것〉, 〈그 이후에 생각한 것〉, 〈오늘 말했으면 하는 것〉만이 그에게 이음의 위안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유일한 것은 삶과 죽음 사이 의 거리만큼이나 먼 곳에 있다. 로제는 이것을 얻어 보려는 생각을 수개월 전에 했음을 밝힌다. 프랑신느의 생각을 직접 들어보려면 죽는 길밖엔 없기에 자살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로제는 지금 이 순간 다시금 이 유일한 것 을 얻으려고 한다. 그는 〈뭔가 말해 봐요, 프랑신느, 계속해서 말해요!〉를 거듭하는 가운데 필사적으로 프랑신느에 게서 새로운 말을 이끌어내려 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귓전에 들려오는 것은 프랑신느가 그와의 마지막 만남 에서 했던 말뿐이며, 이 말은 점점 깊이 그의 뇌리를 파고 든 다. 마침내 그는 프랑신느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시도가 좌절 될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에서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로제의 죽음은 삶과 죽음의 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극과한 수 없는 괴리, 구체적으로 말해서 죽음의 세계에는 생각 바꾸기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낳은 결과이다. 그런데 생각 바꾸기의 불가능과 더불어 앞서 거론한 즉음의 이런저런 속성들은 비단 죽음과만 관계된 것일까? 죽음은 그런 것이니 그런 것쯤으로 이해하여 죽음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희망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말하려는 것만이 프리쉬의 의도일까? 그렇지 않다. 프리쉬가 죽음에 대한 성찰을 통해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삶과 삶의 의미이다. 죽음의 속성은 죽음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삶 속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삶과 죽음은 육체의 있음과 소멸로만 구별될 뿐 그 어떤 차이도 없다.
부랑자가 〈죽음이란 서서히 오는 것이다〉라 함은 바로 이를 두고 히는 말이다. 즉음은 새로 올 것도 별안간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죽음의 속성은 삶 안에서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며, 죽음은 다만 이 속성이 완전히 굳혀지는 단계라는 것이다. 구걸하는 것으로 살아오다가 술 취한 상태에서 죽은 부랑자는 처음부터 구걸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인 극을 상연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하룻저녁에 27번의 커튼콜을 받을 만큼 그는 인기가 꽤 있었으나 어느 날부터 관객이 줄어드는 바람에 구걸행각을 시작했는데, 그런대로 벌이가 되었기에 이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고, 또 그런 때문에 나태함이 몸에 배이게 되면서 그는 30년 동안을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 나태함이 서서히 그의 삶을 변화 없는 것으로 굳어지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이 같은 삶을 죽음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부랑자 : (...) 제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얘기하지요. 그건 30년 이 걸렸죠. 사람은 갑자기 죽는 것이 아닙니다.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태도 또한 죽음의 모습이 삶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프롤은 평소에 그의 아내 소피가 자신을 바보 취급한다고 여겨왔고, 소피 쪽에서는 프롤이 언제나 그 자신 만을 생각한다고 공박해왔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이러한 불화의 원인을 찾는다든가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들은 26여 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서로가 자기정당화만을 해온 셈이다. 프롤의 죽음마저도 이들 사이에 고착되어 있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바꾸지는 못한다. 소피가 프롤의 장례기간 동안 늘어놓는 말은 여태까지 견지해온 자기입장의 변호이거나 과거에 그녀가 해왔던 것과 같이 불만을 털어놓는 것일 뿐이다. 소피는 이미 죽은 프롤을 머리에 떠올리면서까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가 평소에 늘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는가를 따지며, 다른 한편으론 자신의 결혼생활은 프롤의 외면으로 이어진 인고의 세월이었다는 비난을 퍼붓는다. 상대방의 죽음 앞에서 예상해 볼 수 있는 있음직한 후회나 반성의 태도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피가 프롤을 이런저런 인간으로 이미 과거에 확정해 놓은 것을 지금도 그대로 견지하고 있음은 사랑을 결여한 고정관념적인 태도로서 이는 한번 가진 생각을 결코 바꾸지 못하는 죽은 자의 태도나 다를 바 없다.
생각을 고쳐 하지 못하는 것은 죽은 자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언정 살아 있는 자들의 숙명은 아니다. 노력여하에 따라. 사랑의 있고 없음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생각은 언제라 도 달라질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결핍으로 고정된 상을 버리지 않고 있음은 살아 있는 자들의 삶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죽음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
죽음과 구분되지 않는 삶은 의미 없는 삶을 되풀이하는 경우에도 나타난다. 클라스와 카트린의 결혼생활에는 틀에 박힌 일상적인 삶만이 반복될 뿐, 의미 있는 삶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에서 오는 삶의 활력의 상실은 권태를 야기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이들은 빈번히 다툼을 벌이지만, 이 다툼이 그들에게 새로운 삶이나 삶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적은 없다. 프롤과 일제의 부녀관계도 이와 유사하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바, 이것은 클라스와 카트린의 경우처럼 인간상호 간의 관계의 개선이나 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구속하는 삶 역시 그 안에 있는 반복이라는 성격 때문에 〈참 자아〉의 실현이나 〈실존적인 자유〉를 누릴 수 없는 부자유스러운 삶이라 볼 때, 그런 삶은 죽음의 세계에서의 삶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은행 털기를 하던 중에 살인 하여 9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죄수와 관련된 이야기 는 변화 없는 삶이 지속됨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서 〈있었던 것의 영원함〉이라는 죽음의 속성이 삶 안에서도 깃들여 있음을 실증하고 있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삶이 위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삶과 죽음은 그다지 명확히 구분되는 것만도 아니다. 명부의 세계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왜 사람들은 살지를 않지요?〉라는 크사브의 물음은 살아 있는 자들의 삶의 태도에도 충분히 해당될 수 있는 것이다. 삶을 부단히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상실하거나 그런 노력을 중단하는 순간은 곧 인간이 삶에서 죽음을 시작하는 순간이 된다. 삶에 대한 의욕상실로 삶이 무기력하게 된다면, 프리쉬의 말처럼 〈어쩌면 인간은 스무 살이 되면서 부터도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이 죽음이란 임상학적,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다. 반복됨으로써 〈치명적인 악취〉를 풍기는 삶을 일컫는 것이다. 삶은 인간의 태도에 따라 기대와 희망을 걸 만한 대상이냐 아니냐가 결정되겠지만, 이 희망과 기대는 오로지 삶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인간으로 하여금 일시적인 불만스러운 삶에 대해 반항하고, 잘못된 생각을 바꾸며,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삶을 교정하는 일을 허용한다. 그러기에 인간은 삶의 정체를 극복하고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끊임없이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죽음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삶의 본질적인 모습이며, 다른 한편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앞에서 언급한 죽음의 속성을 인식하면서. 삶에 존재할 가능성이 상존하는 이 같은 죽음의 힘에 대항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는 한에서만 비로소 인간의 삶은 삶으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프리쉬의 다음의 말도 그가 죽음의 속성을 나름대로 진단한 끝에 내린 삶에 대한 핵심적인 생각인 것이다. '반복이 시작되는 곳에 죽음은 존재한다.'
변화로서의 삶을 견지해보려는 것, 이것이 프리쉬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통해 얻은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의 죽 음에 대한 물음과 답변은 또한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 답변이기도 한 것이다.
의식을 다루는 극은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묘사하는 것이다〉라는 자신의 말대로 프리쉬는 이 작품에서 그가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갖게 된 즉음의 세계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형상화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죽음을 죽음에서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삶이 그것의 본질적인 모습을 잃는 것이 바로 죽음이며. 아마도 죽음 이후의 삶도 이 같은 삶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라는 것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삶과 죽음은 본래는 하나인 것의 두 가지 현상이지만, 두 현상을 경계 짓는 것은 생물학적인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서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에 있다함과 같다. 삶의 의미는 부단한 변화에 있으며, 변화의 중지가 곧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프리쉬는 이 작품에서 죽음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하기보다는 삶에 내재하고 있는 죽음의 모습을 찾아내는 가운데 삶의 재해석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단초라 할 수 있는 글들이 들어 있는 그의 일기 『일기 1966~1971〉을 쓸 당시 프리쉬의 나이는 이미 오십 중 반을 넘기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물음과 단상을 담고 있는 이 글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이 무렵부터 그는 나이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 이라기도 하듯 죽음에 대한 관심과 성찰을 점 차 확대해 나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얻게 된 것은 본 글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죽음의 속성에 대한 파악이었고, 동 시에 이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삶에서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인식이었다. 미래의 삶에 대한 기대가 점차 사라짐을 느낀다든가, 자신의 삶이 이미 살아왔던 삶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든가, 삶이 어떤 틀로 점점 굳어져 가고 있다는 자각이 그런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그로 하여금 다가오는 죽 음 앞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도록 만드는데,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바로 이 작품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이 작품은 프리쉬가 자신의 삶에 대하여 하고 있는 자기고백 으로, 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의식할 수밖에 없으며, 실존적으로 주어져 있는 조건인 죽음에 대한 답변으로 간주할 수 도 있다. 실상 인간의 실존에 관한 문제는 프리쉬의 작품세계의 핵심적인 주제 중의 하나이며, 죽음 또한 이 문제와 연관되어 다루어져 왔다. 그런 때문인지 이 작품은 그의 작품세계에서 거듭 등장하고 있는 실존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고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극작상의 발전이 아니라 단지 주제상의 작은 변화를 보여줄 뿐이라고 평가되기도 한 다. 그러나 이 작품을 죽음의 문제를 부차적이고도 단편적으로 다루어 왔던 이전의 작품과 비교한다면, 이러한 평가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이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작품은 프리쉬가 이전의 그의 작품이나 글에서 다루어온 죽음의 문제를 그 어느 때보다 심화시키고 확대하여 보여주고 있으며, 무엇보다 〈존재한 것의 영원함〉, 〈기대의 부재〉, 〈생각 바꾸기의 불가능〉 등은 적어도 그의 작품들만을 놓고 본다면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후 의 작품에서 죽음의 문제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트맆티콘』은 죽음의 문제에 관한 한 완결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여러 의의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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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안 마요르가 '영원한 평화' (1) | 2015.11.14 |
| 피터 바이스 '새로운 소송' (1) | 2015.11.14 |
| 웬디 와서슈타인 '로젠스비그 자매들' (1) | 2015.11.14 |
| 데이빗 마멧 '올리애나' (1) | 2015.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