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데이빗 마멧 '올리애나'

clint 2015. 11. 14. 08:12

 

 

 

 

 

미국의 현역극작가 가운데 데이빗 마멧처럼 논쟁을 잘 일으키는 작가도 없다. 그를 경험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스스로도 남이 함께 일하기가 무척 어려운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일뿐더러 그가 쓰는 극마다 미국 연극계에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으니 사람과 작품이 모두 도발적인 모양이다. 논쟁이 격해지는 까닭은 극의 소재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작품에 대한 가치판단이 엇갈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올리애나의 경우는 두 경우 모두에 해당한다. 우선 극의 소재가 미국사회를 끊임없이 강박하는 성희롱인데, 극이 초연된 시점이 1992년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흑인 클래런스 토마스 (Clarence Thomas)의 대법관 임명을 위한 상원의 청문회 때 이전의 부하직 원이었던 아니타 힐(Anita F. Hill)로부터 성희롱을 추궁당하면서 1년 내내 미국사회를 들끓게 했던 것이 1991년이니까<올리애나〉는 작가가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미국사회의 가장 민감한 이슈에 대해 연극적 발언을 시도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실제 클래런스 토마스는 결국 이 청문회의 문을 통과하지 못해 대법관 임명이 좌절되었다. 직장상사로서의 그의 행위가 과연 성희롱에 해당하느냐 아니면 동료애의 표시로서 인정할 수 있느냐를 놓고 미국사회 전체가 논쟁에 휩싸였었는데<올리애나〉는 행동의 장소만 대학으로 옮겨왔을 뿐 소재도 같고 사건의 끝도 같아서 똑같은 논쟁이 극장에서도 재연된 것이다. 실제로 많은 연극평론가들이 그런 관객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올리애나>의 상황이 결코 과장됐다거나 극적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한결같이 그것이 미국의 대학에서 매일 매일 발생하는 일상사라고 그들은 고백하고 있다. 한국의 대학사회에서도 점차 그럴 조짐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교수도 학생도 다 성인인 대학에서 오랜 동안 가부장적 남성중심적 가치관에 따라 특히 남성의 여성에 대한 성적 희롱이 묵인되어온 사회적 부정의가 문제시되고 단죄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데, 문제는 문자적이고 편집중적인 '정치적 정확성'이라는 잣대를 사용하는 데 있다 뉴욕대학에서 아동청소년 연극을 가르치는 원로교수 로월 스윗젤(Lowell Swortzell) 로부터 미국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신경질적인지를 설명들은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예를 들어 초등학교에서 한 어린 학생이 운동장에서 놀다가 다쳐서 무릎에 피를 홀리고 있을 때, 만약에 그 학생의 담임선생이 같은 성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지만, 성이 다를 경우는 그 울고 있는 어린 제자를 안거나 반지는 것도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올리애나>가 성희롱을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에 논쟁이 시끄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작가가 성희롱의 개연성이 한층 강한 대학의 캠퍼스에서 늙지 않은 남자교수와 젊은 여학생 둘 만을 등장인물로 설정해놓고 이 사회적 병리 또는 병든 심리현상을 반박 하자니, 다시 말해 성희롱의 혐의를 더 짙게 채색한 채 그것을 고발하는 근거가 된 '정치적 정확성'의 위선적 의도적 부당한 파괴성을 고발하려고 시도한 데서 논쟁은 불가피하게 더 정당화되고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올리애나>에서 작가는 캐럴로 하여금 위의 상담자가 충고한 몇 단계의 조치들을 생략한 채 곧 바로 존을 고발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캐럴이라는 인물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셈이다. 존에게 직장과 가정과 사회생활의 환경을 여러 가지 장치로 제공하면서 그를 이해하고 동정하도록 한 처리와는 정반대다. 나는 마멧처럼 중년 남자교수를 일방적으로 두둔하여 성희롱을 '정치적 정확성'의 무기로 삼는 적대적 여성주의에 대해 공격할 생각은 전혀 없다. 아니 그렇게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미 작가가 자기 작품을 직접 연출하면서 여학생을 인간미가 전혀 없는 단세포적 괴물처럼, 그리고 반대로 교수는 학생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자상하고 헌신적인 인물로 그림으로써 그런 방향의 읽기를 일반화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너무 편협하게 흑백 논리적으로 해석하여 논쟁의 방향을 일방적으로 확정한 것이 자신이 쓴 극을 과연 공정하게 읽은 것이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자 할뿐이다.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논쟁도 아니다. 쟁점이 너무 선명하여 도무지 다틀 일이 없기 때문이다 쟁점이 있으려면 다투는 쌍방이 모두 정 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여지를 가져야 하는데, 마멧이 연출한 공연에서는 미국평론가들의 보고를 종합해보건대 그는 철저히 남자교수의 편에 서서 작품을 읽었다. 그래서 극의 마지막에서 분노한 교수가 여학생한테 실제로 폭력을 행사할 때 오히려 관객들이 응원하는 함성을 질렀다고 한다. 극 안에서 무죄한 남자교수를 성희롱혐의로 고발하는 고약한 여학생을 극 밖에서 관객들이 위증죄로 몰아 탄핵하는 형상을 생각하면 토마스청문회에 마멧이 얼마나 분노했는지가 이해되지만 작가가 정반대로 고발자의 정당함을 전혀 인정치 않고 일방적으로 매도함으로써 거꾸로 피 고발자인 교수의 정당성을 너무 표백 처리하여 연극적으로 오히려 약화시킨 것이 아니냐 하는 의심을 나는 갖는다. 따라서 이 글은 좀 더 공정한 인물 읽기의 가능성을 발견함으로써<올리애나>를 진정한 논쟁극의 자리로 되돌려놓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평론가들 사이에 충돌하는 반응들을 능동태 적 질문으로 요약해본다.
1) 과연 교수 존은 성희롱의 혐의를 받을 만 한 행동을 했는가? 아니면
2) 여학생 캐럴이 '정치적 정확성'의 실현을 위해 성희롱의 올가미를 교수에게 씌운 것인가? 같은 질문들을 수동태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1) 캐럴은 정말로 성희롱을 당했는가?
2) 존은 캐럴의 함정에 빠져 '정치적 정확성'의 희생자가 됐는가?

 

 

 

마멧은 스스로 이 작품의 초연을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작의를 분명히 드러냈다. 제레미 저라드(Jeremy Gerard)는 버라이어티(Variety)지 10월 26일자에 기고한 리뷰에서 "아무도 존의 단점들이 그가 결과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을 정당화한다고 믿지 않는다, 고 하면서 마멧의 연출의도를 그렇게 읽었고 같은 맥락에서 캐럴을 "합법적이고 중요한 이슈들이 남성들을 파괴하려는 보편적 여성주의의 음모로 용해되어버리는 편집중적 상상력의 산물로 치부한다. 요컨대 캐럴이라는 등장인물이 인간성에 기초한 완전한 입체적 인물로서보다는 이념의 실현을 위해 관념적으로 잉태된 불완전한 평면적 인물로 창조됐다는 판단인 듯 싶다. 뉴욕타임스의 프랭크 리치(Frank Rich)는 10월 26일자 리뷰에서 이 공연이 그 해 미국의 연극 중 가장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그 도발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캐럴의 인물에 대해서는 앞의 제레미 저라드와 비슷하게, 다소 온건하긴 하지만, 그 입체적이지 못함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러나 〈올리애나〉여자 주인공이 좀 더 많은 차원을 가졌더라면, 설령 그것들이 불쾌한 것일지라도 훨씬 충실한 극이 되었 을 것이다. 이 여자주인공의 1차원적 성격창조에 대해서는 알리사 솔로몬(Alisa SolomonH 가장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그녀는 11월 24일자 『보이스(Voice)』 에서 우선 마멧의 의도를 아주 교활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관객들이 그가 쳐놓은 함정에 빠졌음을 개탄한다. "극이 끝날 때쯤 나는 관객들이 마멧의 교활한 올가미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음을 발견했다. 몇몇 사람은 교수가 학생을 폭행할 때 추호의 의심도 없이 '학생은 맞아도 싸다, 학생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라고 확신하면서 심지어 응원의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관객들이 이렇게 반응을 하게 된 원인은 작가가 여성주의를 대변 하는 캐럴이라는 등장인물의 성격을 “얼토당토않고” "괴물처럼 (monstrous)"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자 주인공을 동정 받는 인물로 설정하고 더구나 그를 선하지만 약점이 있는 인간적인 다차원의 인물로 만들어 놓은 다음 그를 파멸시키는 여자 주인공을 여성주의라는 이념 이외에 어떤 인간적 가치도 지니지 못한 단세포적 인물로 성격창조 함으로써 힐-토마스 청문회 이후 가장 격렬한 성의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공연은 도무지 토론할 거리가 없다고 단정한다. 미국에서 가장 단호한 평론가로 꼽히는 존 사이먼(John Simon)은 New York의 11월 9일자 리뷰에서 캐럴뿐만 아니라 극 전체가 "인간적 리얼리티를 단 한 방울도 갖고 있지 못하다' 며 극의 독단성과 비현실성을 일갈한다. 그래서 1막에서 나타나는 캐럴의 언어적 무능력도 2막 이후 나타나는 갑작스럽고도 가공할 유창함도 전혀 설득되지 않는다며 마멧이 작가로서의 책임의식 때문에 너무 서두른 나머지 날림공사를 한 것이 아니냐고 힐난한다.
그러나 곰곰이 따지고 보면 마멧이 창조한 여성인물 가운데 캐럴처럼 온전하게 실현된 인물이 없다. 마멧은 주로 남자들에 대해서 희곡을 쓴다. 순전히 남자들로만 구성된 희곡도 여럿이고 여자가 등장한다 해도 극소수이거나 아주 사소한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올리애나〉는 그런 의미에서 예외에 속한다. 그런 연유인지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캐럴이라는 등장인물을 다차원적으로 읽거나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한 평론가들도 있기는 있다. 예를 들어, '월 스트리트 저널'의 밀레니 커패트릭 (Melanie Kirpatrick)은 10월 29일자 리뷰에서 알리사 솔로몬처럼 극을 일방적으로 읽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마멧이 이 극에서 성희롱을 고발하는 학생보다 고발당한 교수가 오히려 진짜 희생자일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데 동의하지만 또한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 하고 있음을 이울러 지적한다. 이 평론가에게 “<올리애나〉의 지적인 호소력은 젊은 학생과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교수 사이에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설령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어렵다는 데 있다.” 그 판단이 어려운 까닭은 교수나 학생이나 다 극 안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인물이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갖지 못하고 다른 인물에게 파국을 가져다주는 기능만을 행사할 때 연극적 존재로서의 정당성은 확보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커패트릭은 캐엉이라는 인물의 1 차원적 읽기를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캐럴을 단세포적 인물로 보는 견해의 요지는 그녀가 교수를 파멸시키기 위한 적대적 여성주의의 하수인으로서 진실보다는 이념에 입각해서 행동하고 이념을 위해서는 아무런 갈등 없이 거짓을 남조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는 로봇이고 괴물이지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잭 크롤 (Jack Kroll)은 11월 9일자 『뉴스위크』에서 커패트릭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만일 둘 다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그게 도대체 가능할 수 있는 일인가?” 라는 질문으로 캐럴이 진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 극의 행동을 점검한 뒤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표피적으로는 그녀의 고발내용은 그 치명적 부조리 성으로 인해서 매우 경악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그녀가 진실, 그녀의 진실, 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들에게 캐럴은 결코 우리가 그 속을 환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이념의 하수인, 단세포적인 인물이 아니라한 선한 인물을 잔인하게 파괴하는 행동마저도 이해될 수 있는 복잡한 배경 과 동기를 가진 인물로서도 읽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캐럴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올리애나>는 효과적인 논쟁 극이 될 수도 있고 실패한 선동 극이 될 수도 있다. 브로드웨이의 원로 평론가 클라이브 반즈 (Clive Barnes)는 뉴욕포스트들의 10원 26일자 리뷰에서 후자 쪽의 반응을 보였다 "아마 이 극의 의도는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에 분노하라는 것인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극이 나한테 너무 지루했기 때문이겠지”차 반면에 타임지의 월리엄 헨리 3세(William A. Henry III)는 11월 2일자에서 전혀 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관객들은 불의와 몰이해가 자행된 것에 분노하여 실제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리를 격노하게 만드는 힘은 우리를 슬프게 만들거나 즐겁게 만드는 힘과 마찬가지로 연극의 장래를 위해서 우리가 환호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최소주의적인 구조 단순한 극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읽기가 이렇게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분명히 성격창조 때문이다. 나는 캐럴의 성격을 단순하게 읽지 않을 고안과 장치가 극 안에 충분히 깔려 있다고 보는 입장에 선다, 다만 그 고안들이 명시되지 않고 암시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암시를 읽는 것은 가능성을 읽는 것이지 확실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 이미 마멧이 스스로의 연출을 통해서 교수 편에서 여학생 읽기를 시도했으므로 나는 이 글에서 그의 반대편에 서서 여학생의 성격이 다차원적으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을 발굴하고 성희롱을 고발하는 그녀의 행동이 극적으로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변호하고자 한다.

 

 

 

1막이 존이 제시하는 캐럴과의 타협을 다루고 있다면 2막은 존의 성희롱을 둘러싼 공방, 그리고 3막은 캐럴이 제시하는 존과의 타협을 다룬다. 막과 막 사이의 이 엄청난 변화를 작가는 전혀 텍스트 안에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캐럴로 하여금 "그룹"을 언급하게 함으로써 막과 막 사이의 기간 동안 캐럴이 이 단체와 상의해왔음을 전해줄 뿐이다. "그룹”은 앞에서 『코리아 헤롤드』에 인용된 전문상담사 애니와 똑같은 충고를 캐럴에게 제공했고 캐럴은 그것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러니까 캐럴이 개인적 차원의 성희롱을 확인하는 2막과, "그룹”을 위해 여성전체를 대 변하여 존의 교육내용을 간섭하고 그를 강간 미수로 고발한 것이 확인되는 3막에서의 행동을 순전히 "그룹”의 영향 때문이라고 전가할 수 있을 만큼 이 단체의 존재는 부재하는 현존으로서 막강하게 느껴진다. "그룹” 과 캐럴 사이의 상호작용을 전혀 극화하지 않고도 "그룹”의 실체를 이렇게 강하게 느끼도록 만든 것은 마멧의 최소주의 적 구성이 갖는 위력이다. 2, 3막의 캐럴을 “그룹'의 꼭두각시로 읽음으로써 캐럴의 1차원적 성격 창조를 주장할 수도 있지만,1막을 어떻게 읽느냐, 1막에서 캐럴이 받은 성적 수취감과상처의 크기를 어떻게 가늠하느냐에 따라서 그 “꼭두각시“ 성마저 연극적으로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 나는 굳이 교수를 적대적 여성주의의 희생자로 읽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은 오히려 그렇게 읽힐 가능성이 더 많게 쓰여 졌다. 다만 그런 읽기는 작가가 이미 자작연출로 실현했기 때문에 나는 캐럴의 편에 서보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녀를 성희롱의 희생자로 본다면 사회적 성적 착취에 대한 분노가 그녀로 하여금 1막의 수줍은 학생으로부터 2, 3막의 웅변의 전사로 변화하게 했음이 수긍될 수 있고 그것을 또한 당연한 극적 발전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읽음으로써 이 극의 의미충위를 심화하고 확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고 이 극은 또 그렇게 취급될 만큼 잘 쓰여 진 희곡이라고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