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피터 바이스 '새로운 소송'

clint 2015. 11. 14. 10:34

 

 

 

 

 

 

작품해설 : 거짓 질서에 항소하다
페터 바이스는 1916년 독일 베를린의 노바베스Nowawcs 에서 헝가리-유대인 출신의 직물업자인 아버지와 스위스 바젤 출신의 여배우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브레멘과 베를린으로 옮겨 다니다가, 절박한 시대사정으로 1935년에 영국으로 이주했고, 2년 후에는 체코 쪽으로 다시 옮긴다. (이 무렵 그는 회화 외에 글쓰기 작업도 병행하며. 헤르만 헤세를 방문하기도 한다) 그 사이에 프라하 예술아카데미에서 수업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회사에서 디자인 일을 하기도 한다.
1941년에 바이스는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이주했고, 1943년 헬라 헨쉔과 결혼한다. 1944년에는 스웨덴어로 첫 작품을 쓴다. (이것은 1947년에<십에서 성으로〉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1946년에 그는 스웨덴 시민권을 얻고 1947년에는 베를린 통신원으로 활동한다. 1952년에 첫 번째 실험영화를 제작했고. 이때 평생의 동반자인 팔름스티르나(G. Palmstimu)와 만난다. 그 사이에 희곡 〈탑〉이 초연되고, 에세이집 《아방가르드 영화》가 스웨덴어로 출간된다. 1960년에는 《마부 몸의 그림자》가 첫 번째 독일어 작품으로 출간되었고 이듬해에는 소설《부모로부터의 작별》이 나온다. 그 이후 《소실점》(1962). 《길을 가는 세 사람의 대화》(1963) 이외에 1964년에는 큰 반향을 일으킨 〈마라/사드〉를 초연하였고, 팔름스티르나와 결혼한다. 이 무렵 그는 아우슈비츠 재판을 방청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도 방문한다. 1965년에는 아우슈비츠 재관을 희곡화한 〈심문〉을 동서독에서 공연한다. 이때 이후 그는 현실 참 여를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미국의 베트남전을 비판하고, 반전 평화운동에 뛰어들거나 희곡작품인 《망명지의 트로츠키》 (1969)와 《휠덜린》(1971)을 쓴 것은 이때를 전후해서다. 1970 년 심장발작을 일으킨다. 1972년에 생애의 결산 작이라고 할 수 있는 방대한 소설인 《저항의 미학》에 대한 노트를 시작했고, 이 해에 딸이 태어난다. 1975년에 카프카의 《소송〉〉을 희곡화한 〈소송〉을 브레멘에서 초연했고. 《저항의 미학》 제 1부가 출간된다. 1976년에는 첫 그림 전시회를 갖는다. 1978년에<저항의 미학》 제 2부가 나왔고. 1981년에 제 3부가 출간된다. 이 작품에 대한 《노트Nmizhach》 4권도 연이어 출간된다. 1982년 '뷔히너 상'을 수상했고, 〈새로운 소송)을 스톡홀름에서 초연한 후, 같은 해 5월 스톡홀름에서 죽는다.

 

 

 

위에서 대략 드러나듯이. 바이스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 사회정치적 위기로 인한 끊임없는 이주와 망명의 삶이다. 이런 이주로 말미암아 베를린에서 브레멘으로, 독일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체코로 다시 스웨덴으로 옮겨 다니며 그는 살아야 했다. 그는 스웨덴 국적으로 스웨덴어를 쓰는 스웨덴 시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국어인 독일어를 놓지 않았다. 잦은 이주와 국적변화 그리고 불안정한 삶은 이런 삶을 야기한 기존의 정치경제적 질서에 대한 거리 두기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고. 강대국의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 적인 입장에 대한 비판의식은 아마도 이런 거리 두기에서 나올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바이스가 여러 예술장르를 거침으로써 젊은 시절부터 표현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실험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열여섯 살 무렵 회화수업을 시작하였고 그 때 이후 연극 실험영화와 기록영화, 아방가르드 운동, 소설 등 예술의 거의 모든 장르나 흐름을 섭렵하였고, 이 각각의 장르마다 매체가 제공하는 최대한의 묘사 가능성을 그 나름으로 시도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렇다는 것은 문학의 사회정치성에 그가 깊이 관여하면서도. 이때의 관여가 그의 아방가르드적 성향과 다매체적 표현 가능성의 실험으로 말미암아 단순 리얼리즘적 미학을 넘어서는데 이르렀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것은 《마라/사드》에서 전개되는 여러 내용 형식적 시도 (극 속의 극. 정신병자가 내뱉는 진위의 모호성 등)에서 단편적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것은 아무래도 《저항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옆에 희곡 《소송》 이나 《새로운 소송》이 있다. 바이스는 끊임없는 이주와 망명의 불안정한 삶 속에서 정치적으로는 강대국의 모순된 억압 정책을 문제시했고. 실존적으로는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삶을 지향했으며. 언어적으로는 형식 내용적 실험을 부단히 탐색하였다. 왜냐하면 표현적 가능성의 극한에서야 말로 어떤 새로운 각성에 도달할 수 있고 이 각성을 통해 기존과는 다른 삶이 시작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 작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다른 작가와의 관계가 간단할 수 없다면. 이것은 바이스와 카프카의 경우에서도 그렇다고 함수 있다. 바이스는 청년 시절부터 카프카 작품 읽었고, 이 혼 적은 《노트》나 《저항의 미학》의 곳곳에 나타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1975년에 초연된 희곡 작품인 《소송》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스는 《저항의 미학》을 생애 말년에 거의 10년에 걸쳐 쓰면서 그 전까지 해 오던 연극 작업에 대한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특히 1975년에 초연된 〈소송〉이 여러 기법상의 이유로 실패한 것이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고 그래서 그는《저항의 미학》을 탈고한 후 이를 다시 쓴 것이다. 이렇게 쓴 것은 1982년에 〈새로운 소송〉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된다. 그는 이 작품을 직접 감독한 후 3개월 있다가 세상을 떠난다.
바이스의 희곡 《소송》이 카프카의 원작을 충실하게 재구성하고 있다면 《새로운 소송》은 그와는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제목이나 주요 인물들 그리고 사건의 얼개만 빌려 올 뿐 그 이외의 것은 이 후자의 작품에서 거의 모두 바뀐다는 데 있다. 인물들은 상당 부분 축소되고 각 장은 제목 대신 숫자표시만 된 채 이어지며 시간적 배경도 1920- 30년대가 아니라 바이스가 살던 현재 1980년대를 전후로 한 동시대로 바뀐다. 또 법원이나 변호인과의 관계가 사건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행, 기업의 사적 경제활동이 줄거리를 끌고 가는 주요 동인이 된다. 사장이나 사장 대리인, 미국대사나 장군, 검사는 이런 기업 연합 (재벌)의 이사진으로 활동한다. 그리하여 이들의 활동은 단순히 산업경제 적 영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군사적 외교적 분야에서도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특히 미국 대사나 장군의 역할이 그렇다. 이런 구체적 현실 연관성으로 인하여 카프카 작품을 지배하던 어떤 비의적이고 모호하며 신비적인 분위기는 상당부분 탈락하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분위기가 압도하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소송》이나 《새로운 소송》은 별개의 독자 적인 작품으로 나뉘어 분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별개의 독자성만큼이나 필요한 것은 이 두 작품의 연속성이고, 이보다 중 요한 것은 바이스의 카프카 읽기의 내용이 될 것이다. (이것은 여기에서 쓸 수 있는 원고 매수의 제한 때문에 더 그렇다). 즉 바이스는 카프카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하며 재구성하였는가? 그리고 이렇게 재구성한 것은 오늘의 나/우리의 현실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독자는 무릇 이 두 가지 사항, 바이스와 카프카의 관계 이상으로 카프카를 읽는 바이스가 나에 대해 갖는 현재적 관계를 놓쳐선 안 된다. 다시 이 관계를 재구성하면 그것은 바이스-카프카-독자의 관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두 작품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물론 어리석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문학작품은, 그것이 뛰어난 것이면 뛰어난 것일수록 한두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의미적 불확정성의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러 주제를 가지고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그렇지만. 몇 가지 의미로 파악할 수는 없을까?
이 작품에는 체포/ 법/ 재판/ 판결의 자의성과 폭력성, 고통과 희생의 반복, 세계의 모호성 혹은 거꾸로 된 세계, 승진에의 압박과 경쟁 사회, 다가오는 전쟁, 매끈하게 흘러가는 세계의 부조리함, 이 부조리함 속에 개처럼 죽어 가는 삶 등 여러 가지가 서술된다. 그 핵심은 무엇일까?

 

 

 

1) 자기기만 - 부자유의 삶
주인공인 K는 어느 날 갑자기 체포되지만, 왜 그가 체포되었는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누가 이러한 명령을 내렸는지 알지 못한다. 말해지는 것이라곤 "당신은 체포되었을 뿐. 그 이 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호성은 현실의 모호성이기도하면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호성이기도하다. 사람이 말하는 내용이 반드시 명백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분명할 때가 많고, 명료한 것이라고 해도 이 명료한 것의 앞과 뒤에는 불분명한 것이 도사린다. 혹은 말해지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은 것은 여전히 불분명성의 영역 안에 자리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이런 모호성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이용' 하기도 한다. 자기 이익을 위해, 혹은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하기 때문에 혹은 성가시기 때문에 그냥 주어진 일을 해 왔던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K를 체포하러 온 사람이 이 일에 나선 것은 그저 '상부'로부터 돈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모 관계는 그러나 K를 둘러싼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시민들 사이에 잘 나타나지만 이 모든 걸 관찰하고 직시하는 K에게도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법정의 판결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변호하는 것을 결국에는 "소용없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이 "너무 늦었고”, "새로운 시작이란" 자기에게 “더 이상 없다”고 말한다. 그 점에서 K는, 적어도 희곡 《소송》에 나타난 K는 카프카 적 인물에 닮아 있고. 어떤 점에서는 지나치게 순응적이거나 너무 모호하거나 혹은 종교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K는 "판사는 어디에 있소? 어디에 상급법원이 있소?” 라고 묻는 적이 있지만. 가령 '신의 법정' 이란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법정은 왜소하고 제한석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너무 모호한 면모'는 다른 각도에서 보면 보다 넓은 현실을 직시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인간의 정당성이란. 엄격하게 말하자면. 작거나 부분적 정당성이다. 이 점에서 바이스는 "자기기만”을 본다.
"이사회의 대변자들은 비열함과 거짓 속에서 자기를 드러낸다. K는 이 모든 걸 분명하게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늘 그를 다시 거짓의 옹호자인- 억압에 봉사하는 판사와 법정에게로 이끈다. 그의 계획에서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기만에 있고 그는 이 기만에 헌신한다. 그에게 나타나는 사람들은 가장 지위 낮은 관리나 막일꾼 그리고 앞잡이들이고 그래서 그는 더 높은 심급에 가게 해달라고 간청하며. 이들에게 도움과 정의를 얻고자 한다. 이에 반해 저 위에서는 거짓과 강제의 진짜 관리자들이 머무르고 있다. 그가 지칠 대로 지쳐 순응하게 되는 것은 사실 이 사람들 때문이다. 그가 관계하는 소매상인이나 속물들, 부패한 출세주의자들은 그에게 사적으로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들은 체제의 도구일 뿐이고. 그래서 그 자신만큼이나 부자유하다.” 한사회의 많은 것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함께 어울려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최 상부 층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중간계층이나 하부계층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일정한 자기기만속에서 작가가 지적하듯이, "이 기만에 헌신하며” 사는 까닭이다. 이들은 기만-부패-불합리의 열매를 한 편으로는 누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열매 때문에 고통 받고 신음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마치 K가 그러하듯이. '자기 허약성에 무너지는' 것이다. "모든 것의 무의미” 는 이렇게 해서 순환된다.
2) 억압의 편재화
끔찍한 일은 '지나치게 일반적으로'. 너무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그 일은, 우리가 적당한 이름을 붙인 사이도 없이 그래서 제대로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나타났다가 곧 사라진다. 남는 것은 그렇게 엄습한 사건에 우리가 당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체제에서 인간은 거부하거나 부정하기 어렵다. 그는 주어진 조건대로, 위에서의 명령에 따라 산다. 여기에는 현대의 산업 사회적 조건 이윤과 수익을 위한 무한경쟁의 무자비한 체계가 자리한다. 사람들은 이제 부단히 다른 자리로 옮아 다녀야 하고, 이런 자리에서의 실적을 통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야 한다. 옮겨 가지 않거나 올라가지 않으면. 언제든 도태된다. 자리를 옮기라는 회사의 명령에 K가 "그렇지만”이라고 말하자, 라벤 슈타이너는 "그렇지만 이란 말은 없어요! 관리처에 그러나란 말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항구적 자리 옮김의 상황은 삶의 곳곳에서 일어난다. 시간적 압박과 정체성의 상실. 이런 상실에서 느끼는 개인의 내적 모순은 회사에서 일어나듯이 하숙집에서도 반복 된다 (《새로운 소송>에서는 하숙집마저도 회사 소유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적 이유의 메커니즘은 소규모 사적 공간에서부터 대규모공적 공간으로. 나아가 다국적 재벌기업으로까지 걸 쳐 있고 이런 맹목적 활동에는 경제인들만이 아니라 정치가들(미국 대사 등) 그리고 군인(장군과 대위)까지 관여한다. 삶을 위협하고 관계를 격리시키며 자유를 옥죄는 요소는 공간의 성격과 활동의 영역을 불문하고, 전 방위적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등장인물들은 이런 전 방위적 억압 구조에 노출되어 있다. K는 기소된 후에는 재판에 몰두하느라 회사 일도 하시 못하고, 결국 개처럼 죽는다.
이런 전 방위적 구조를 두고 아도르노는, 발터 벤야민에 기대어 "반복 강제의 단조로움" (Monotonia des Wiederholungs-zwangs) 이라고 일컬었다. 누구든 살아남기 위해 이윤-효율-수익-시장이라는 자본주의적 규율에 적응해야 하고, 누구든 밀리지 않으려고 거짓과 매수의 그물망에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엮어 놓아야: 한다. 개인이 집단의 구조에 시달리듯이 여성은 남성 사회적 억압에 시달린다. (이것은 사장 대리인에게 농락되는 뷔르스트너 양이 잘 보여 준다). 폭력의 연관성은 겹겹으로 위계화 되어 있고. 이렇게 위계화 된 강제 체계는 시작도 끝도 없이 재생산된다. 그래서 K는 이렇게 탄식한다. "도처에서 사람들 이 어떻게 부추겨지고 쫓기고 학살되는지." 여기에서 개인은 이런 체계에 참여하는 공모자이면서, 이 체계를 지탱하는 수혜자로 산다. 그래서 이런 불합리 아래 “소송을 한다는 것은 이미 소송에서 패했다는” 뜻이 된다. 법정소송 역시 하나의 거래와 같다. 억압적 요소는 강제적 반복 체세 아래 도처에 그리고 무수한 형태로 자리한다. 그것은 권력일 수도 있고 정치체제일 수도 있으며 언어일 수도 있고, 어리석음과 편견 혹은 탐욕일 수도 있다. 인간은 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요인에 이끌려 그것에 강제된 채 이것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그리 절실해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필요한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그 노동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일까? 아도르노가 카프카에게서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사물화 된 삶에 대한 암호문을 읽었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바이스의 작품에도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것은 무기력한 몸짓에 비틀어지고 기형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혹은 편집증 적이거나 강박적이고 정신분열적이어서 우리 안의 동물처럼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다. 어떤 것도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전적인 기생 상태라고 할까. '충족된 삶에 대한 갈구'는 어디서도 없는 듯하다. 그래서 "거짓은 세계의 질서가”된다.
3) "어떤 다른 질서”
모든 것이 거짓인 세계에서는 어떤 판단이건 또 어떤 평가나 진술이건,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적으로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체포되면 선고가 되고, 이 선고의 유무죄에 따라 수감되거나 방면된다. 그러나 방면 된다고 해도 기소/체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진다. 훼손과 낭비, 어리석음과 부패. 억압과 속박, 불안과 고갈이. 마치 시간을 잊은 듯 초시간적으로, 하나의 밀폐된 공간 안에서처럼, 되풀이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체포-방면 혹은 피소-항소의 무자비한 반복 과정을 진술-오해-해명의 과정으로 바꾸어 해석할 수도 있다. 혹은 텍스트와 이해, 창작과 수용의 과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단순히 법률적 판결 적 차원을 넘어 삶의 일상적 경험과정으로 이해된다. 나날의 삶에서는 의미 없음의 동질적 질서가 무한하게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러는 한 소송의 항의 과정은 무한하게 이어지고, 또 이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역사는 전혀 나아가지 못한 것일까? 나아간다고 여겨질 때조차도. 지나고 보면, 그만큼 뒤로 다시 물러나 있다.
이런 항소의 과정은 무엇보다 K 에게서 나온다. 특히 〈〈새로운 소송》의 K는 이런 해명의지로 가득 차 있다, (그러면서 이 의지는 특히 레니를 통해 정의감으로만 차 있는 것이 아니라 포용, 행복, 헌신, 사랑과 이어진다. 이 중요한 점은 더 자세히 논의되어야 한다). 이런 의지 역시 그러나 결국에는 현실에 부딪혀 좌초된 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고, 스스로 설명하여 자신에게 납득시키고자 한다. 그는 "일이 더 잘 돌아가면 갈수록,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적다"고 말하면서, '확고하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어떤 다른 질서' - '모든 것이 일치하는' '하나의 더 큰 세계'를 원한다, 고 말한다. 이런 그가 예술에 기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예술은 기억과 표현을 통해 기존과는 다른 세계를 암시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더 정확하게 서술되어야 한다. 삶의 다른 질서란 예술 이외의 활동, 예를 들면 정치나 경제나 과학이나 철학도 만들 수 있다. 예술은 이들 활동과는 달리 첫째, 집단이 아니라 개인과 관계한다. 둘째, 이때의 관 계 방식은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감각에 호소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셋째. 그러면서도 개인적 감각에의 호소는 사회역사적 차원, 보편성의 차원으로 나아간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술의 언어는 정치적 슬로건이나 철학의 개념적 논증 혹은 과학의 실증언어와 분명하게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소송》에 나오는 정치 집회의 한사람은 '발전이란 당신들 스스로 해야-하는 것'이고.'모든 것은 당신에게서 오며, 그것이야 말로 봉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다른 질서'를 위한 노력, 항소 적 행위는 행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항의는 철없어 보이거나, 너무 늦었거나. 그럴 여력이 나질 않기 때문이다. 선의가 행해진다면 현실에서 그것은 '그럴 듯한 명분 아래' 이루어진다. 이것은 사장이나 대사가 일련의 연설을 통해 '휴머니즘적 원칙'을 강조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들은 평등이나 소통, 평화나 우정 등의 말을 내세우며 전쟁을 획책한다. 그리하여 사물화 된 삶, 인간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누군가 혹은 외부의 힘에 휩쓸리며 자기 생애를 고갈시키는 반복강제의 삶은 지부하게 계속된다. 세계의 불의는 처음에서처럼 지금까지 이어졌고, 지금껏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이어질지 모른다. 삶에 '다른 판결'은 불가능 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 점을 바이스는 보여 준다. 거짓의 세계 질서에서 이 질서에 짓밟힌 상처를 기록하며 다른 질서로 질주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이스의 희곡 언어이고 카프카의 소설 언어이다. 예술은 미비한 것, 아직 이루지 못한 것, 그르치고 만 것의 음울한 재고목록이다.
인간은 낯선 것에 포박되어 세계의 잉여 물로, 그 찌꺼기가 되어 산다. 온갖 부당하고 편파적이며 속물적인 것들은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만큼 당연한 것으로 나타나고, 우리가 무감각한 만큼 산만한 현실을 이루며 자리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에서도 박탈된 채 마치 재고품처럼 생애를 탕진해 가는 것이다. K가 자주 할 말을 잊고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물의 구제처럼 인간의 구제처럼 이젠 자기 구제도 어렵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질서'를 꿈꾸지 않는다면 이 질서를 생각하며 질의하지 않는다면, 불협화음은 세계에 더욱 커 갈 것이다. 당연시되는 것들의 부당한 횡포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피조물의 구차한 삶음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물음이 핵심'인 것이다. 항소하는 물음, 그것이 예술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