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글
나는 1992년 9월 25일 이 연극의 시연회 동안 내내 링컨 센터의 예술 감독인 내 오랜 친구 앙드레 비숍 옆에서 거의 반 충격 상태로 앉아 있었다. 내 생각에 〈로젠스비그 자매들〉은 나의 가장 진지한 노력이었다. 단일 세트에 극도 비 삽화적이고 시간과 장소와 행동의 일치들이 완벽하게 지켜졌고 역사적인 사건의 전야를 일부러 택해 시대배경으로 삼았고 그리고 심지어 지난날 모스크바를 열망했던 훨씬 더 유명한 연극적 세 자매들을 짐짓 반향 하는 듯한 꾸밈마저도 느껴지지 않느냐 말이다. 그런데 1막이 시작되고 5분도 되지 않아 관객들이 킬킬거리기 시작했고 조지어스 박사가 핑크 빛 가싸 샤넬 정장차림으로 비닐로 만든 루이 비통 짐 가방을 들고 등장했을 즈음에는 배꼽을 쥐고 웃는 것이었다. 앙드레가 내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물었다. “웨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런 일은 생전 처음 봤어.”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이 좋아하니까 반갑기는 하지만 내 작품에 대한 나의 평가가 영 빗나갔네.” 그래서 작품의 제목을 정하는 데 시간이 엄청 들었다. (조지어스 자매들〉, 〈유럽 연주회〉, 〈사라, 페니, 조지어스〉등이 처음 생각했던 제목들이었다). 그날 밤 만일 내가 〈메디아〉를 썼더라면 그것은 필경 옛 텔레비전 드라마 〈하루 동안의 여왕〉과 비슷하지 않았겠느냐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 시연회가 2막의 어두운 장면들로 진입하자 관객들은 점차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공연이 끝나고 연출자인 대니얼 설리반과 내가 출연배우들의 파티 장에 가고 있을 때 그는 내게 말했다. “힘든 작업은 이제부터야 균형을 찾아야 하거든.”
댄한테는 항상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집어내는 빼어난 능력이 있다 이 극은 진지한 극도 희극적인 극도 아니다. 희망 섞어 얘기하면 둘 다다. 이 극을 쓰고, 연기하는 요령은, 심지어 읽는 요령조차도 유머의 밝은 색깔들과 정체성, 자기혐오의 진지한 이슈들, 그리고 더 이상 가능해 보이지도 않고 또 슬프게도 더 이상 필요해 보이지도 않는 사랑과 친밀한 관계의 가능성 사이에 균형을 찾는 것이다.
난 작가가 굳이 희곡을 설명해야 한다면 그 희곡은 극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체홉한테 세 자매가 있었던가? 조지 커프만과 모스 하트가 그것을 더불어 가져가기를 원했을까? 그리고 노엘 카워드가 삶의 설계도를 갖고 있었던가? 나는 이런 류의 질문들은 늦은 밤의 애매한 토크 쇼의 객원 해체주의자들한테 미뤄둔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로젠스비그 자매들〉이 방금 말한 네 명의 극작가들한테 빚진 바가 많다는 사실뿐이다.
기록을 위해서 밝혀두는데. 나는 세 자매의 막내다. 제일 큰언니는 인조 모피상과 한 번도 데이트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내가 아는 많은 여배우들이 늙는다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해서 좋은 연기기회들을 놓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40이 넘은 여성들을 위한 영리하고 재미있는 역들을 의도적으로 써내는 일에 착수한 것이다. 희망 섞어 얘기하자면 이 자매들 가운데 한 사람과 첫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지는 아주 좋은 남자 역도 하나 창조했다. 이 작품은 성난 연극이 아니다. 가능성에 대한 극이다. 나에게 희곡 쓰기를 처음 가르친 선생님은 예술에는 질서가 있고 인생에는 그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주장은 예술가가 기존의 변수들을 바꾼다면 인생이 예술을 모방할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모조 동물보호피복계의 세계 1인자 머빈과 국제적인 금융가 사라는 낭만적인 환상이 아니라 우리가 무대 위에서 자주 보지 못할 뿐인 어른들이다.
〈로젠스비그 자매들〉에 관해 자주 논의되지 않았던 이슈가 있다면 그 것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이 극의 인물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고 세계적인 연출가인 제프리는 그가 사랑하는 페니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 전혀 짐작할 수 없을 때의 기분을 몰라!” 이 극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다 성숙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과 심한 갈등을 느끼고 있다 이 세 자매들이 다 브루클린 출신이면서 극이 런던의 퀸 앤즈 게이트에서 벌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연극은 희곡으로 출판됐을 경우조차도 협력 작업이다. 이 극은 지면에서 무대로 옮겨졌을 때나 거꾸로 무대에서 지면으로 다시 되돌아갔을 때도 대니얼 설리반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내가 알기로 댄은 〈로젠스비그 자매들〉을 그가 다룬 유태인 주제의 삼부작 가운데 세 번째 작품으로 간주 하고 있다. 이 극에 앞서 그는 허브 가드너 작 〈아버지와의 대화〉와 존 로빈 베이츠 작 〈불의 내용〉을 연속적으로 연출했었다. 어쩌면 댄은 연극의 구세주일지도 모른다. 시애틀 출신의 아일랜드 사람으로서 나쁜 일은 아니다.
이 극은 앙드레 비숍과 나한테도 삼부작인 셈이다. 그는 나의 지난 두 작품 〈하이디 연대기〉와 〈참 낭만적이지 않아요?〉를 플레이라이츠 호라이즌스에서 제작했고 이 극은 우리 둘이 링컨 센터에서는 처음으로 손잡고 일한 작품이다. 나는 자주 사람들한테서 미국의 신작희곡들을 다루는 앙드레의 천부적인 은사가 정확하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을 받아왔다. 앙드레는 항상 언제 자기의 의견을 강요하고 언제 남의 의견을 따를지를 아는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 때 그것은 절대로 강요가 아닌 것이, 이는 당혹스러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는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캐스팅을 도와준 대니얼 스위, 가혹하게 때리고 자상하게 감싸준 드라마터그 앤 카타네오, 그리고 첫 독회 때부터 세 명의 로젠스비그 자매들 모두를 으깬 우리의 무대감독 로이 해리스에게 감사를 드린다. 우리의 세 자매들은 캐볼린 애론, 크리스토퍼 듀랑, 월리엄 핀, 미치코 카쿠타니, 피터 파낼, 그리고 폴 러드니크의 변함없이 관대한 우정을 통해서 많은 자양을 얻었다. 내가 이 극을 처음 끝냈을 때 난 등장인물 어느 하나에 대해서도 그들 이 어떻게 무대에 등퇴장하고 어떻게 충계를 오르내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는 바가 없었다. 더 더군다나 나는 조지어스 박사의 의상에 대해 매우 세밀한 묘사를 포함시키기는 했지만 알고서 그렇게 묘사한 게 전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녀는 모조 웅가로 칵테일드레스를 입고 등장한다.” 라고 지문을 썼는데 실제로 나는 내가 그 옷을 어쩌다 입고 있다 해도 그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 극에 내재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일치들은 무대장치 디자이너인 리 비티와 의상 디자이너인 제인 그린우드가 창조해낸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로젠스비그 자매들은 조명 디자이너인 팻 콜린즈가 없었더라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하이디 연대기〉의 기술연습 중에 나를 옆으로 끌어내더니 집에 가서 희곡을 하나 쓰라고 말했던 장본인이다.
〈로젠스비그 자매들〉이 개막된 지 한 달이 지난 일요일 낮 공연 때 나는 이 연극을 보러 미치 뉴 하우스 극장을 다시 들렸다. 내가 조명실에 은둔을 하지 않은 것도, 또는 객석의 맨 뒷줄에 익명으로 숨어서 시연회의 메모를 끄적이지 않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연극을 보면서 나는 솔직히 작가에 대해서 조금 질투를 느꼈었다. 누가 이 극을 썼든 그는 정말로 빼어난 배우들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날 저녁의 성공은 작가가 배우들 하나하나와 연습 때 항상 함께 있었던 사실에 힘입은 바 크다.
그날 저녁의 끝에 가서 내가 관객들이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고 실제로 우는 것을 봤을 때나는 작가가 아주 성숙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가족 및 개인의 역사를 확신하고 있었고 잘 짜여진 극의 도전과 전통에 대해 신념이 확고했다. 그녀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는 게 확 실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내가 이 극의 작가이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웬디 와서슈타인 뉴욕에서, 1992년 12월

웨디 와서슈타인(Wendy Wasserstein}은 동시대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극작가 가운데 하나다. 그녀의 희곡이 여성주의를 논할 때 지주 언급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여성주의는 와서슈타인에게 있어서 하나의 소재로서 작용할 뿐이다 그녀가 천착하는 주제는 대체로 그 이념적 경계를 늘 상회한다. 예를 들어 퓰리처상 희곡부문 수상작인<하이디 연대기 (The Heidi Chronicles)>1989)에서도 주인공 하이디는 비록 미국미술사에서 그동안 조명되지 않았던 미국의 여류화가들의 그림을 찾아내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맡은 큐레이터이고 자의든 타의든 독신여성으로서 삶을 꾸려나가는 인물로 설정됨으로써 여성주의 적 화두를 풍요롭게 생산하고는 있지만 극의 결말에 이르면 그녀는 남성 중심사회가 여성의 대표적인 정체성으로 강요하는 모성을 실천하려는 듯, 아이를 하나 입양 하는 것이다.
이 점은<로젠스비그 자매들 (Sisters Rosenswcig)>(1993)경우도 마찬가지다. 체홉의<세 자매>를 연상케 하듯 이 극은 로젠스비그 가의 세 자매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데, 그 자매들이 특별히 남자들 또는 남성적 가치들을 정죄하지도 않거니와 맏언니 사라처럼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적 지위를 쟁취한 자매도 있지만 고저스처럼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에 충성하는 자매도 있고 양성애자인 남자를 떠나보내는 막내 여동생 페니도 있어서 이러한 인물구성에서 딱히 이념적 여성주의를 지향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읽기 어려운 것이다. 굳이 여성주의와 연관을 지어본다면 주인공을 여성으로 삼고 극의 행동을 발전시키는데 신체적 접촉 같은 여성적 이디오싱크러시(idiosyncrasy)를 자주 사용하면서 그들에게 완전한 크기와 깊이의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자배우에게 좋은 역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적 여성주의의 시도가 발견되기는 한다. 내가 이 극을 이념적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읽기보다 관습적인 방법으로 읽기를 택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에 보다 적합하다는 판단과 함께 작품을 인간 보편적 측면에서 성적 경계를 뛰어넘어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뉴욕의 연극평론가들은<로젠스비그 자매들〉의 I992년 10월 22일 링컨 센터 밋치 E. 뉴 하우스에서의 초연과 이듬해 3월 배리모어 극장에서의 브로드웨이 공연에 대해 다소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뉴욕 연극평론가들의 비평 모음 (New York Theatre Critics' Reviews)』(이하 NYTCR)의 1993년 제4호에 수록된 주요 언론방송매체의 연극비평들을 종합해 보면 일단 링컨센터의 공연이나 브웨이 공연은 일부 캐스트가 바뀐 것 이외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짐작된다. 두 공연 사이의 현격한 발전이나 사이를 기록한 비평은 찾아볼 수 없고 첫 비평 때의 의견을 두 번째 비평에서 재확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극에 대한 가치평가에서도 일관된 입장을 표명하였다. r버리이어티(Variety)』의 제레미 지라드는 상업적 성공을 위한 결말부의 낙관적인 처리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면서도 이 극을 벤디 와서 슈타인의 “기술적으로 가장 완벽한 극"이라고 평가했다(NYTCR, 70). '뉴욕포스트(New York Post) 의 클리이브 반즈는 “사랑스럽고 재미있는" 이 극에는 “뭔가 새로운, 지속적인 미스터리가 있다.” 며 근년에 접한 "최고의 상업적 희극 가운데 하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NYTCR,72).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 의 데이빗 패트리 스턴즈는 헤디 와서슈타인이 "요즘의 연극에서 듣기 힘든 재치 있고 세련된 대화와 정서적 밀도로” "아주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희곡을 썼다."고 평가한다 (NYTCR, 74). 『데일리 뉴스(Daily News}』의 덕 워트는 이 극을 “웨디 와서슈타인의 가장 풍요롭고 가장 자신 있게 쓰여진 희극'이라 했고 (NYTCR, 77). r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멜 거소우는 ''재치와 통찰이 있는 희곡”이라 평가하면서 작가가 세 특이한 여성들과 그들의 사랑, 정체성 및 자아실현에 대한 매우 매혹적으로 관찰했다고 했다. (NYTCR, 79). 『뉴욕(New York)』의 까다로운 평론가 존 사이먼마저도 이 극이 지금까지 웨디 와서슈타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NYTCR, 81).
위와 같은 긍정적 평가의 다른 한 편에서는『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의 토니 벨렐라처럼 "희극성은 강하지만 깊이가 없다“(NYTCR, 78)고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평론가들도 발견된다. 헤디 와서슈타인의 대학시절 스승이었던 뉴 리퍼블릭 (The New Republic) 의 로버트 브루스티인은 관객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이 작가의 재능을 인정 하면서도 이제는 그녀가 자신의 장기에 안주하는 버릇을 내던질 때가 되지 않았냐고 따끔하게 훈계한다. (NYTCR, 79).
긍정적인 평가를 하든 부정적인 평가를 하든 뉴욕의 연극평론가들이 이 극의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 예외 없이 동의하는 바는 그 상업성이다 그리고 맏언니 사라와 모피업자 머브의 결합으로 마무리되는 종결부가 상업성의 대표적인 증거로서 지적된다. 이러한 해피 엔딩은 관객들의 욕구에 야합하는 것일 뿐, 극이 원래 추구했던 세 자매들의 진정한 관계 발전이나 고통을 통한 정체성의 발견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훼손한다는 의견인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플롯과 성격창조와 주제가 해피엔딩을 필요 충분하게 정당화하지 못하는가?
비록 이 극이 유태인 가족의 세 자매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해도 작가는 예수의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기독교적 해피엔딩의 틀을 차용하여 극적 행동이 금요일 늦은 아침에 시작해서 일요일 새벽에 끝나도록 시간을 설정한다. 이러한 설정은 그 정당한 실현여부를 떠나서 작가가 해피엔딩을 처음부터 의도했음을 시사한다.
극은 세 자매의 맏언니인 사라의 54번째 생일을 축하하러 막내 여동생인 페니와 둘째 자매인 고저스가 사라의 집에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하는 데 이 1막 1장과 2장에서 작가는 사라를 특히 그 성경적인 이름이 암시하듯 난소종양 때문에 자궁을 적출당한 육체적 불임 녀로 설정한다. 더 나아가 딸 테스로부터는 유머 감각이 없는 무신론자로 동생 고저스로부터는 메마른 여자로 규정함으로써 그녀의 정서적 종교적 불임을 강조한다. 금요일 늦은 아침과 오후의 시간설정과 이와 같은 성격창조는 무관할 수 없다.
작가의 의도를 더욱 확연히 드러내주는 상징물이 하나 있다. 페니가 인도에서 가져온 시바상이다. 페니는 팔이 많이 달린 이 시바상을 "희망과 부활'의 상징이라며 조카 테스에게 주려하자 테스는 “희망과 부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은 바로 엄마라고 말하면서 사라의 절망과 황폐함을 대신 중언한다. 결국 페니는 사라에게 시바상을 건넨다. 그러니까 이 극에서 가장 명백한 상징물로 사용되는 시바상의 종착지는 사라인 것이다. 물론 사라가 머브와 결합한 뒤에 시바상을 머브에게 건네주기는 하지만 이때는 이미 극적 행동이 사실상 완료된 뒤다. "희망과 부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라에게 "희망과 부할'의 상징인 시바상 이 안착함으로써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극의 행동선이 시간설정의 의미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극은 세 종류의 인간관계를 상호 반영 적으로 추적한다. 모녀관계, 자매 관계, 남녀관계 등이다. 세 관계가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갈등에서 화해로 오해에서 이해로 발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러한 극 구조는 해피엔딩을 3중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로서 읽힌다. 극 초반에 작가는 위의 세 관계 모두에 긴장과 불화를 심는다. 해피엔딩의 결말 구조가 언해피한 시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먼저 모녀관계의 시작 상황을 살펴보자.
이 극은 보이는 모녀관계와 보이지 않는, 그러나 현존하는, 모녀관계를 나란히 병치하면서 같은 주제를 동어반복 적으로 강조한다. 사라와 테스가 보이는 모녀관계를 이룬다면 사라, 고저스, 페니 등 세 자매와,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아직도 이 딸들의 의식과 무의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리타는 보이지 않는 모녀관계를 형성한다. 이 두 가지 모녀관계는 극의 첫 장면에서 이미 막내 여동생 페니에 의해서 성격적으로 연결된다.
극은 테스가 사라의 대학시절 노래를 듣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작가가 이 극에서 모녀관계의 주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곧이어 페니가 사라의 생일을 축하하러 멀리 인도에서 도착하는데 둘은 만나자마자 포옹하고 춤을 출 만큼 가깝다. 그러나 이 친밀한 질녀 이모 사이의 첫 대화에서부터 사라와 테스의 긴장된 모녀관계가 드러난다. 이세 남녀관계의 시작상황을 살펴볼 차례가 됐다 이 극에서는 세 쌍의 남녀관계가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된다. 맨 아래 세대로는 좌파적 이념을 신봉하는 사라의 딸 테스와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위해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청년 톰이 이념적 열정으로 서로를 사랑하다가 결국은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의 차이로 인해 헤어지게 된다. 그 위로 세 자매의 너무나 다른 애정행로가 극 안팎에서 펼쳐지는데, 먼저 작가 겸 기자이기도 한 커리어 우먼 페니와 연극연출가이며 양성애자인 제프리는 애정관계로 출발하지만 제프리가 남자를 그리워하며 떠나기로 하면서 둘의 관계는 우정관계로 정리된다 하버드 출신의 변호사 남편 헨리와 가장 완벽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고 여겨지던 고저스마저 극이 진행되면서 남편의 실직과 그로 인한 정신적 장애로 인해 그녀 스스로 가장의 역할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실토하지만 헨리는 극에서 등장하지 않는 인물인데다가 둘 사이의 관계는 이미 애정이니 우정이니 하는 관계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맨 위로 그리고 극적 행동의 중심에서, 이혼녀인 사라와 홀아비인 머브 사이의 로맨스가 펼쳐진다. 이 글의 초점이 해피엔딩의 정당성 여부를 점검하는 것이고 또 이 극의 해피엔딩이라고 하면 그것은 사라와 머브의 결합을 주로 말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사라와 머브를 중심으로 남녀관계의 시작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앞에서 언급한 다른 남녀관계들은 자매관계와 모녀관계의 발전을 점검할 때 더 요긴하게 활용될 것이다. 사라의 동의 없이 제프리의 일방적인 초대를 받아 머브가 사라의 생일 파티에 찾아오는 것은 1막 2장에서다. 작가는 그를 "따뜻한 인간미가 금방 느껴지며” "섹시”한 인물로 묘사한다. 그래서인지 페니나 고저스는 그를 처음 만나자마자 금새 경계의 벽을 허물고 허물없이 대한다. 그러나 사라는 왠지 처음부터 적대적이다. 페니가 테스를 만나러 나가면서 둘만 남게 되자 사라는 "문가에 서서 머브가 자발적으로 나가주기를 기다리고” 자꾸 시계를 보면서 떠나라는 암시를 보이며, 그래도 머브가 넉살 좋게 자리를 버티자 손을 내밀어 작별인사를 하고 머브가 충실한 유태인임을 알고는 유태교 교리 상 먹기 곤란한 음식이 제공될 것을 통고하면서 "무례한 행동으로" 그를 쫓아내려고 한다. 머브가 홀아비 된 사실과 자기가 이혼녀라는 사실을 교환하고 나서는 재혼하지 않을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면서 사라는 머브를 쫓아내는 대신 스스로 자리를 뜬다. 서브텍스트를 일단 차치하면 적어도 텍스트 상에서 사라는 사람 좋고 섹시한 머브를 적대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애초부터 긴장과 대치국면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세상이 하도 혼돈과 무질서와 가치상실에 빠져 있는 탓인지, 인간성이 하도 황폐화된 탓인지, 평론가들은 연극의 해피엔딩을 습관적으로 감상주의적이고 상업적인 처리로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극의 분위기와 상관없이 극의 결말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서 어둡고 우울하고 참담하고 위악적으로 그리면 그릴수록 평론가들은 또 습관적으로 작품을 동시대 사회와 동시대인들의 진실한 초상으로 평가하기 일쑤다. 요컨대 작품을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하지 않고 선입견이나 선입관을 잣대로 삼는다.<로젠스비그 자매들>을 해피엔딩을 이유로 상업주의적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 해피엔딩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작가의 극 개념상의 시발이고 종착이며 중간의 통과의례가 매우 치밀하게 정서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또한 연극 미학적으로 그러한 발전을 정당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막스 프리쉬 '트맆티콘' (삶과 죽음의 세 장면) (1) | 2015.11.14 |
|---|---|
| 피터 바이스 '새로운 소송' (1) | 2015.11.14 |
| 데이빗 마멧 '올리애나' (1) | 2015.11.14 |
| 하워드 새클러 '위대한 백인의 희망' (1) | 2015.11.14 |
| 토니 쿠쉬너 '미국의 천사들' (1) | 2015.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