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풍은 문화유산해설사다. 자신이 담당하는 고택 선운당에 애정이 깊다.
역사책에는 '윤사평이 낙향했다'고 나와 있을 뿐이지만
윤사평의 낙향에다 '선비 정신'이라는 이야기를 불어넣고, '딸이 하나였다'는
사실에서 추론해, 시집간 딸을 그리워하며 가꾸던 정원이라는 감정을 보탠다.
연구 차 두루마을에 들른 고고학자 서혜는 진실이 아닌 감정을 이야기하는
남풍이 마뜩찮고, 관람객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비난한다.
하나의 갈등으로 보이지만 남풍과 서혜의 부딪힘에는 진실과 허구,
순차적인 절차와 순간적인 감정, 유지하고자 하는 구세대와 변화해야 한다는
신세대 간의 갈등이 중첩되어 있다. 선명히 드러나는 갈등은 풀어낼 수 있다.
하지만 갈등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될 때 우리는 난감해진다.
그래서 정우의 캐릭터에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다.
조용한 마을에 내려와 사법시험을 공부하는 정우의 마음속에선 남풍과 서혜가
둘 다 살고 있다. 법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법적 진실과 진짜 진실의 차이에서
회의를 느낀다. 남풍을 존경하면서도 서혜가 추구하는 객관성이 옳다고 생각한다.
차가운 진실을 선망하면서도 따듯한 감정에 휘둘리는 우리의 모습이다.
마을 이장인 대철은 그래도 법을 아는 정우에게 누가 옳은가를 판단할
권한을 주지만, 정우는 남풍이기도 하고 서혜이기도 한 자신을 두고
방황하다가 늦은 밤, 마을을 떠난다.

이 작품은 인간과 진실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리고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이치는
과연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가?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사실과 진실, 현상과 상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이며, 이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지 의문을 던지고 있다.
두루마을을 방문한 고고학자 서혜, 선운당 고택의 문화유산 해설사 남풍,
그리고 두루마을에서 나고 자란 대철과 미순네 등이 이 작품의 주요인물이다.
이들은 ‘역사’라는 공적 담론과 ‘사랑’이라는 사적 담론을 둘러싸고 시각 차이와
이로 이한 갈등을 드러낸다. 이들의 갈등은 결국 우리들이 고민하는 현실과 해석,
그리고 사실과 진실에 관한 근원적 질문에 맥이 닿아 있다.
이 작품에서는 질문을 던지고는 있지만 이에 대한 답을 내리지는 않는다.
사실과 현상에 집중하는 서혜, 상상과 환상 속에 삶의 진실이 있다고 확신하는 남풍,
드러난 사실과 숨은 내면의 진실 때문에 평생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는 대철과 미순네.
이들의 삶의 경험과 이들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삶의 경험이
어느 지점에서 만나 각기 다른 해답이 구해졌으면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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