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막. 때는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부룩클린 색슨가의 빈민가...
부두노동자인 에디와 그의 부인 베아트리스, 그리고 조카 캐서린 이렇게 셋은
비록 가난하 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러던 중 베아트리스의 사촌인
마르코와 로돌포가 이탈리아에서 밀입국하고 이들과 함께 살게 된다.
로돌포를 본 캐서린은 첫눈에 반하게 되고 이들은 서로 사랑한다. 이것을 눈치 챈
에디는 몹시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로돌포를 싫어한다. 베아트리스는 그런 남편에게
화가 나고 이들의 갈등은 깊어진다. 에디는 알피에리에게 찾아가 로돌포를 탓하지만
알피에리는 조카에 대한 에디의 지나친 사랑을 충고하자, 에디는 원망스럽고 답답하다.
어느 날, 저녁식사 후 에디는 로돌포에게 권투를 가르쳐주는 척, 그를 한 대 먹인다.
집안 분위기는 바뀌고 마르코는 의자를 쳐들고 에디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2막. 로돌포를 미워하는 에디로 인해 캐서린은 걱정하며 로돌포에게 이탈리아로
떠나자고 말하지만 로돌포는 거절한다. 에디가 원망스럽기만 한 캐서린은 로돌포에게
자신의 모든 걸 맡기며 의지한다. 그 사실에 에디는 점점 더 불안하고 초조하다.
알피에리를 찾아가 로돌포가 시민권을 얻기 위해 자기 조카와 위장결혼하는 것이라며
호소하지만 알피에리는 법적인 근거나 권한이 없다며 둘의 사랑을 축복해주길 권한다.
법적인 해결이 불가능해지자 에디는 결국 이 둘을 밀입국자로 신고한다. 결혼을
강행하려는 캐서린과 로돌포, 베아트리스와 에디 사이에 신경전은 점점 더 고조되고
그러던 중 수사관이 들이 닥친다. 에디가 신고한 것을 눈치 챈 마르코는 격분하고
이를 안 가족들과 이웃들은 에디를 원망하며 비난한다. 에디와 마르코는 격분해서
몸싸움을 벌이다 결국 에디는 죽게 된다.

1950년대 뉴욕 브루클린의 항구 지역. 이곳은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거칠고 활기 넘치는 동시에, 가난과 불안이 상존하는 곳이다. 2차세계대전 후,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밀입국해 생계를 이어나가며 아주 작은 꿈을 꾸며
비록 어려운 환경이지만 사랑과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순박하고 착하디 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비극으로 끝난다. 가난하지만 선한 사람들이 모여서
왜 이런 비극적 결말을 맺게 되는 걸까?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은 단순한 물리적 조망을 넘어선다.
이는 변호사 알피에리의 시선을 통해,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비극적인
삶과 그들이 겪는 도덕적, 윤리적 갈등을 객관적이고 법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다리는 브루클린과 맨해튼을 연결하는 것처럼,
이민자들의 삶과 주류 사회의 법, 그리고 개인의 운명과 피할 수 없는 비극을 연결하는
상징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실제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보다는, 뉴욕 이민들의
어둡고 치열하며 비극적인 인간 드라마를 상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의미한다.

멜로 드라마적인 요소를 부각시키기위해 에디와 캐서린, 로돌프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아서 밀러의 사회성과 도덕성에 관한 문제의식을 읽어 보는 것도 연극을 보는 하나의 재미가 될듯하다. 에디의 근친 상간적 욕망과 이를 지키기 위한 괴팍한 성격 변화, 그리고 자기합리화로 치닫는 마음의 갈등이 작가의 세밀한 터치로 표현된 수작이라 하겠다. 밀러는 불신과 폭력과 복수가 만연하는 사회에 맞서 타자에 대한 믿음, 배려, 용서의 정신을 대치시킨다. 불법이민자라는 약자의 위치에 선 타자, 연민이 필요한 타자, 궁지에 몰린 타자에게 시선을 돌려 다원화된 사회에서의 타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또 이 극에서 밀러는 에디의 근친상간적인 성적 집착과 밀입국자들인 로돌포와 마르코와의 관계를 통해 동일성의 폭력 문제와 타자의 망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밀러는 이들의 관계를 통해 주체가 자신의 시선에서 타자를 판단하고 심판하며, 자신에게 동일화하지 않는 타자를 제거하려 하는 현실세계의 실상을 문제 삼는다. 밀러는 에디의 왜곡된 성적 자기애를 단초로 삼아 한 인간이 타자를 포용의 대상이 아닌 배제의 대상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타자를 동일화 시키고자 하는 폭력성을 윤리의식과 책임의식의 결여로 보고 인간의 비극을 심화시키는 심각한 사태로 규정한다. 밀러는 극의 기능을 관객 자신이 타자와의 상호성이라는 계시에 의하여 타자를 어루만질 수 있도록 자각시키는 것으로 본다.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단절된 인간관계와 인간 소외를 극복하는 길은 오로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밀러는 현대 사회가 타자와의 상호적인 윤리적 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타자의 인간적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점점 더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마찬가지로 레비나스도 우리 사회가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현시대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 진단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파시즘과 홀로코스트 등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직접 체험한 양자는 타자를 군중 속의 익명적 존재로서 망각해버리는 동일성의 폭력성에 대해 극히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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