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야지, 살아서 또 심어야지”
참외가 익어가는 여름과 가을 사이, 어느 해안가 마을.
부서지고, 허물어지고, 그럼에도 다시 쌓고 짓고,
흘려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파도처럼 밀려와 그곳에 쌓인다.
바다에 소중한 사람을 잃은 여인들은 돌탑을 쌓으며 삶을 붙들고,
할아버지는 매번 잠기는 참외밭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담을 짓는다.
술녀는 먼저 떠난 손녀 연을 놓지 못해 자신을 방 안에 가두고,
같은 공간의 지하에서는 개미들이 굴을 파고, 세대를 이어가고 있다.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사랑과 그리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개미굴을 닮은 그 경계 위에 '경계에 선 사내가 있다.
사내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네 개의 이야기를 오가고,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 경계들은 서서히 겹치고 확장되며
달큰하고도 서늘한 참외 향기를 풍긴다.
참외가 데굴데굴 굴러, 끝내 도착할 곳은 어디일까.
개미굴로 갔다. 개미들이 참외 맛을 보고 반한다.
그리고 개미굴에 심었는데.... 거기서 참외싹이 나와
굴을 뚫고 밖으로 넝쿨을 뻗어 자란다.

작품의 제목이자 중심 소재인 '참외'는 단순한 작물을 넘어 삶과 노동,
그리고 세대를 잇는 매개체이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참외는 곧 흘러가는 시간과
피할 수 없는 소멸을 의미하지만, 그 끝에서 새로운 넝쿨이 돋아나듯 삶의 순환은
계속된다. 이 작품은 소멸하는 것들 속에서 영원히 남아 이어지는 사랑과 기억의
힘을 담담하고도 아름답게 비춰준다.

“지상의 사람 공간과 지하의 개미 공간을 연결하는 시선, 말과 지문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좋았다.”
“소중한 연을 잃은 사람들의 풍경으로 생명을 키우고 지킨다는 의미를 보여주려
한 작품” - 낭독공연 심사평 중
2025 신춘문예 당선작가들이 신작 장막 희곡 집필과 낭독공연을 거쳐
최종 무대공연 선정작으로 2025년 11월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김다솔의 작품이다. 장한새 연출, 극단 배다 공연.
이야기의 중심에는 한 줄기 참외 넝쿨이 있다.
그 넝쿨의 한쪽 끝에는 술녀가, 다른 끝에는 손녀 연이 서 있다.
묵묵히 돌담을 쌓는 할아버지, 끝없이 돌탑을 올리는 여인들,
쉼 없이 일하는 개미들도 그 곁에 있다.
술녀는 넝쿨 끝에 선 연이를 놓아줄 수 있을까?
돌을 쌓는 이들의 간절함은 끝내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무한히 반복되는 일상의 굴레 속에서, 개미들은 존재 이유를 찾게 될까?

연극은 손녀 연을 먼저 떠나보낸 할머니, 사랑하는 사람을 바다에서 잃은 돌탑을 쌓는 여인들, 참외밭을 지키기 위해 돌담을 쌓는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 그리고 개미굴에서 애벌레를 키우는 개미 두 마리 등 네 가지 이야기를 병치시킨다. 여기에 이 상황을 지켜보고 경우에 따라 인물들과 얽히게 되는 사내까지 등장한다. 인간의 서사는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소멸, 상실과 회복이라는 화두를 다루고 있고, 비인간의 서사는 인간들의 행동과 어우러지며 돌봄과 순환이라는 키워드를 가시화한다. 이 작품은 극적 구성보다는 감각적인 묘사를 기반으로 관객의 해석가능성을 열어두는 최근 연극의 경향과 맞닿아 있다. 지문이 깊이 각인되는 아름다운 문장임에도 어떤 방식으로 가시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낭독공연의 경우 지문을 읽는 방식으로 이 같은 고민이 해소될 수 있지만, 본 공연의 경우 대본에 담긴 심상을 관객과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 모색해야 한다. 특히 움직임이 거의 없는 낭독 공연에서 무대 한 편에 자리를 잡고 해설자이자 관조자처럼 각 영역을 응시했던 사내의 형상에 대한 고민도 이어졌을 것이다. 이 같은 고민의 결과 본공연에서는 인물들이 보다 명확한 지시적 의미를 가지고 발화하며 행동한다. 또한 사내가 네 개의 세계를 건너다니면서 돌담을 부수거나 허물며,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낭독공연의 사내가 알 수 없는 신의 형상에 가까웠다면 본공연의 경우 세계의 존재들을 잇는 매개적 역할 또한 수행한다. 희곡 <참외는>은 개성이 분명한 작품이다. 독자를 상상하게 만드는 소설적 지문을 비롯해 인간들의 서사로 구성된 19개의 챕터 안에 비인간의 이야기를 끼워두며 세계를 연결해가는 구성이 그러하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과 관련된 비극적 정조를 강화하는 대신, 경우에 따라 인간의 세계에 거리를 두는 동시에 이들의 서사와 병치되는 개미의 이야기를 삽입해 정조를 조절한다. 그리고 재난과 죽음을 거스를 수 없지만 인간과 비인간의 간절한 염원이 세계의 지속이라는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인물들은 성숙한 태도로 만물의 순환이라는 흐름을 받아들인다. 이 작품은 예측할 수 없는 재난과 관련하여 위로와 기다림이라는 행위를 구현했다.

작가의 말 - 김다솔
삶은 지긋지긋하면서도 참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언젠가 죽을텐데 왜 열심히 살아야 할까,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했습니다. <참외가 데굴데굴 굴러가면>을 통해 많은 분과 이런 고민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염원'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유한한 시간을 알고 있음에도 생기는 간절함, 그 마음이 중력을 거슬러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건 아닐지 생각합니다. 그 힘은 결국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습니다. 나 자신과 다른 존재를 향한 사랑, 고개를 갸웃 거릴 만큼 기이하고, 한편으로는 눈물 나게 애틋했습니다. 부서지고 허물어지는 경계에서 삶으로 등을 떠미는 건, 켜켜이 쌓인 흔적과 기억이 아닐까요. 바다, 모래, 돌, 참외를 나누며 함께 부대끼는 이야기 속 존재들처럼 말입니다. 참외덩굴처럼 끈질기 게 이어지는 생명과 사랑의 궤적을 생각하며 이 희곡을 마무리합 니다. 이전 세대에게 받은 참외는 무엇이고, 다음 세대에 전할 참외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 희곡을 이미 만나신, 그리고 언젠가 만나게 될 분들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대화 나누는 그날까지, 펄펄 살아가시기를 원하고 있겠습니다. 우리 꼭 다시 마주쳐요. 노랗고 달큰한 참외를 데굴데굴 굴립니다. 고맙습니다. <참외가 데굴데굴 굴러가면> 이 세상에 나오도록 도움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할머니, 사랑합니다.

서울대학교 원예생명공학전공 박사과정.
2025년 <낯선 인연>으로 한국극작가협회 신춘문예 희곡 부문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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