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도 신주쿠구 가부키초. 아시아 최대의 환락가.
'이치로'는 이곳에서 밤이사 업체를 운영한다.
의뢰인이 새로운 신원,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증발 이후의 삶까지 책임지려 고군분투한다.
한편 '메구미'는 이곳 뒷골목에서 새벽까지 식당을 운영한다.
이치로가 보낸 증발자들을 맞이하며 그들의 정착을 돕는다.
그리고 매일 향을 피우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린'은 13년간 증발한 상태로, 메구미의 식당에서 일한다.
'켄'은 20년째 증발하여 청소노동자로 살아간다.
한편, '마야'는 증발 이후의 삶도 이전의 삶도 놓지 못한다.
그러다 이치로에 의해 이사를 택한 마야는 완전 증발하지도,
원래 삶으로 향하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화려한 환락가 거리로 의문의 '소년',
선물을 든 '시즈오', 녹음기를 든 '시오리'가 찾아온다.
이곳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러....

이 작품은 인간의 자발적 실종에 해당하는 '인간 증발' 현상을 다룬다.
'인간 증발'이란 1990년대 일본에서 발생한 용어로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갑자기 가족과 직장으로부터 사라져 버리는 현상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작품은 증발하는 인물들, 그들을 찾아다니는 가족들, 그리고 증발과
정착을 도와주는 인물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인 캐릭터가
극을 이끌지만 정서적 거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데, 이것은 '인간 증발이라는
현상보다는 이를 둘러싸고 경험하게 되는 인간의 심리적 갈등과 고통에 극의
초점을 맞춘 데서 연유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눈길을 끄는 것은 '인간 증발'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며,
갈등과 고통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여기서 작가는 경제적 파산이나 가정폭력과
같은 증발의 동기, 증발자들의 개인적인 사연, 혹은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 깊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보다는 증발 이후의 갈등 상황과 심리적 고통에
시선을 집중한다. 증발한 자와 그 가족 간의 갈등을 다루되, 철저하게 외부자적
시선을 유지한다. 가족을 배반하고 가정을 파괴한 죄를 묻는 목소리와 죽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고 항변하는 목소리를 공평하게 들려줄 뿐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설명적 언어가 아닌 침묵과 생략을
통해 각기 다른 고통의 깊이를 전달한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작가가 아닌
관객의 몫이 된다. 관객을 딜레마 상황에 빠뜨리고 고민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극작술이라 할 수 있다.

도쿄 신주쿠 가부키초를 배경으로 밤이사 업체를 운영하며 증발을 돕는 이치로.
정착을 돕는 식당 주인 메구미, 증발자 켄, 린, 마야, 그리고 이들의 가족 시즈오와
시오리 등을 중심으로 극이 전개된다. 따라서 증발자들의 사연이나 낯선 곳에서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는 현재의 삶이 극적 서사의 중심을 이룰 것 같지만 의외로
이 연극은 이들의 ‘이야기’를 재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들을 찾아 나선 가족들의 등장으로 봉착하게 되는 딜레마적 상황, 그로
인해 불거지는 증발자들의 내적갈등과 남겨진 가족들의 고통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켄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가족을 떠나 증발한 지 20년이 된 인물인데 어느 날
딸로부터 결혼 소식을 전해 듣고 가족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켄의 흔적을 추적해 온 아내 시오리는 그가 사라졌던 20년 동안 남은
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이야기하며 완벽한 절연을 선언하고
냉정하게 떠난다. 이제 버려지고 남겨진 것은 가족이 아니라 켄이다. 따라서 켄은
죽음이라는 영원한 증발을 선택하며 기차에 뛰어들고 이치로는 그가 남긴 짐을
메구미의 식당으로 가져온다. 린의 경우는 아들이 찾아온다. 빚과 남편과의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증발을 선택한 린은 13년 만에 자신을 찾아온 아들 시즈오와 갈등한다.
가출한 어머니 때문에 온갖 추문을 들으며 지내야 했던 유년기의 불행, 그녀의
거처를 찾았음에도 집으로 돌아와 극단적 선택을 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하며
시즈오는 린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그러나 린은 아들의 자해 소동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또 다른 증발을 선택한다.
가정폭력 때문에 증발해 메구미 식당에 정착했던 마야는 켄과 린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천천히 증발하는 쪽을 택한다.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증발하고
증발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마야가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할 것으로 예견되지만 집으로 돌아갔던
마야가 다시 메구미 식당으로 돌아오는 결말 장면을 통해 증발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암시해준다.
세 인물의 증발을 둘러싼 극적 상황이 다큐멘터리 형식처럼 사실적으로 다뤄진다
이들의 ‘이사’를 돕는 이치로와 ‘정착’을 돕는 메구미의 대사와 극 행동은 상당히
상징적이며 시적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이치로가 왜 증발자의 이사를 돕는 것인지, 이치로에게 열쇠를 받아 그의
집에 머물다 떠나는 소년은 누구인지, 소년이 이치로의 집에서 잠겨 있는 방문을
왜 열려고 하는지, 메구미는 왜 증발자의 정착을 돕는지, 메구미의 식당에 쌓인 짐은
무엇을 상징하는지, 메구미와 이치로는 어떤 관계인지 등등, 극 전체에 걸쳐서
모호하게 제시된다. 그러나 이 극은 이러한 모호함을 애매함으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여기서 메구미는 마야에게 짐 이야기를 해주는데 이때 과거 재현 장면을 통해
비로소 소년이 바로 어린 이치로였음이 드러난다.
부모에게 폭행당하고 길거리를 헤매다가 메구미의 식당에서 따뜻한 밥을 얻어먹는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은 이치로가 현재 증발자의 이사를 돕는 이유와 아울러
메구미가 훨씬 오래전부터 이러한 증발자들에게 또 다른 ‘집’을 제공해 왔고
그들의 흔적이기도 한 ‘짐’을 맡아왔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마지막 장면은 어둠 속에서 메구미가 식당 뒤편에 산더미처럼 쌓인 짐 앞에
향을 피우고 문밖을 향해 합장하는 첫 장면과 수미상관을 이루면서 문과 짐,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메구미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서 ‘짐’이 존재의 흔적을 의미한다면 ‘문’은 이곳과 저곳, 떠나온 집과 새로 찾은
집 사이의 경계 공간을 의미할 것이다.
그 문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니 메구미는 시공간을 초월해 상처받고 고통받은
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수호신과도 같은 인물에 해당하는 셈이 된다.

작가의 말 - 김주희
증발은 경제 붕괴와 매우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버블경제 붕괴, 글로벌 금융위기로 증발자와 자살자 수가 급증한 바
있습니다. 매년 10만 명 이상의 실종,
한밤중 스스로 조용히 사라져 새 신원으로 사는 일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시대, 책임져야 할 것이 늘어가는 시대에
이것은 '기회'일까요, '도피'일까요?
이 극은 어느 기이한 문에 대한 시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삶을 꿈꾸는 일에 대해, 현실, 환상, 정체성, 실존에 대해 짚으며,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누구일 수 있는가"를 묻고자 합니다.

▶ 수상. 선정
2024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 대상 수상
2024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대본공모 선정
2022 서울문화재단 유망예술지원 비넥스트 선정
2018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세대예술가 극작 부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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