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지영 '그라고 다 가불고 낭게'

clint 2026. 3. 26. 20:41

 

 

 

1948년 가을, 순천. 12살 귀복은 서울로 떠나 첫사랑 경희를 찾겠다는 꿈을 꾸지만, 
여 순항쟁의 혼란 속에서 그 꿈은 하루 아침에 무너진다. 이념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비극, 총성과 불길,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죽음 속에서, 평화롭던 마을은 공포와 
침묵으로 잠긴다. 수십 년이 흘러 여든여덟의 노인이 된 그는, 잊고 싶었던 그날의 
끔찍한 기억, 특히 형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깊은 죄책감을 다시 마주한다.

 

 

 

2025년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 우수상 선정작인 윤지영의 작품이다.
<그라고 다 가불고 낭게>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라는 이제는 상투형이 되어버린 
주제를 다룬다. 하지만 이 작품이 과거사를 다루는 작품의 상투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80세가 넘어 죽음을 목전에 둔 인물과 그의 12세 어린 시절을 공존하는 
시간으로 구성하기 때문이다. 70년의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낸 노의의 죽음 직전 
유년의 기억을소환하여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동화적이라 할지라도 
우리 시대에는 이와 같은 치유의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한 지도 모른다.




윤지영 작가의 말
길쭉하고 호리호리하던 나의 할아버지, 마을에서 가장 잘 생겼던 사내는 매일 소주 한 짝을 비워야만 잠이 들곤 했다. 평생 술에 잠겨 살다. 오십을 조금 넘겨 그렇게 하늘로 가셨다. 마루에 앉아 멀뚱히 지는 해를 바라보다 어설프게 걷던 손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짓던 그분이, 어린 시절 형님을 잃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분이 돌아가시고도 한참 후였다. 돌에 맞고 죽창에 찔리는 형님을 대숲에 숨어 봤어야 했던 12살의 소년 소년이 50세가 되기까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버티는 것뿐이었을 테지. 그러다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의 어린 자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옅게 웃다 그것이 미안해 다시 표정을 없앴을 테지. 한평생 무표정했던 마음들이 읽혀 나는 늘 할아버지가 그리웠다. '그라고 다 가불고 낭게'는 여순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평범하게 아침을 맞았던 사람들이 맞아 죽고, 찢겨 죽고, 총에 맞아 죽었다. 둑에 쌓이고, 다리에 널브러지고, 강줄기를 피로 물들였다. 10월의 한 주 동안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가족이 죽었다고 목 놓아 울지 못했다. 입을 닫고, 가슴에는 지퍼를 채웠다. 그리고 운이 좋아 버텼다면 이제 여든여덟이나 여든아홉이 되어 다가오는 죽음을 마주 보고 있다. 작년, 순천의 쪽방에서 나흘을 보냈다. 순천역과 순천고, 재래시장과 다리를 걸으며 그 끝에 제대로 된 '여순 기념관'이 있으리라 내심 기대했다. 어느 낡은 사무실, 2층 그곳의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어 문만 한참 보다 돌아나왔다. 울음도 하소연도 어느 것도 내뱉지 못하고 삼키고만 있는 것이 77년 전이나 매한가지인 것 같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보지 말아야 할 것과 알지 말아도 될 것들이 어마어마한 스크린에 쏟아지고 있는 이 광속의 시대에, 구석에 접힌 채 쓸쓸히 시간이 지나기만을 버티고 있는 '여순의 이야기'를, 그렇게 늘 숨죽이며 불안한 삶을 사셨을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이제는 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기어코 해야만 하지 않을까, 라는 열망으로 글을 쓰고 마쳤다. 

 

윤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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