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은준 '불씨'

clint 2025. 11. 7. 12:48

 

 

모란공원.
이제는 노인이 된 재준이 태일의 무덤가에서 태일을 그리워하며 술을 뿌린다. 

1970년 배고팠고 가난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재준은 태일을 그리워한다. 
재준의 그리움에 응답이라도 하듯 태일이 나온다.

1970년 평화시장.
1, 2층으로 나뉘어 일하는 곳엔 14살의 나이로 학교도 가지 못하고 
일하는 시다 영옥이, 전라도 시골서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옥분이, 
투덜대지만 마음이 따뜻한 점득이, 그리고 아픈 엄마와 누나를 위해 졸린 눈을 
비비는 재단보조 정호, 그리고 그 옆에 다른 피복 공장에서 일하는 재준.
하지만 이들은 모두 이름이 아닌 4번 시다, 1번 오야, 4번 오야, 재단보조, 
재단사로 불릴 뿐이다.
태일은 열악하고 삭막한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자신보다 동생들을 

돌본다. 그러던 어느 날 태일은 근로기준법에 대해 알게 되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한다면 모두에게 희망이 생긴다며 좋아하는데...



 

 


전태일은 우리 노동운동에 상징적 존재이다. 발전 논리 속에 묻혔던 노동자들의 인권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하면서 법적으로 인정된 노동 3권의 보장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노동운동의 불씨가 된 전태일을 다룬 '불씨'는 '전태일 평전'을 기반으로 해서 전태일이 일하던 현장과 동료들을 중심으로 영웅이나 열사 그 이전에 '인간'이자 '청년 전태일을 그려냈다. 
1970년과 현재의 50여 년이라는 시간적 거리를 지워낸 것은 전태일의 실제 친구인 김재준의 등장이다. 첫 장면에 극 중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와 함께 등장해 영정 앞에 꽃을 놓고는 술을 따라준다. 현재의 이야기가 되었고, 현재에서 다시 50년 전으로 간다.
'불씨'는 시종일관 유쾌하다. 마치 노래패 '노찾사'의 '사계'(재봉들을 쉴 새 없이 돌려야 하는 노동자의 피곤한 일상을 경쾌한 리듬으로 표현한 역설이 돋보이는 노래)처럼 환기장치 없이 비좁은 공간, 공간을 채운 먼지, 장시간 노동의 피곤함과 수면 부족 등 노동환경은 지독하게 열악하지만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밝다. 

 

 


노동의 피곤함을 잊기 위해 영화촬영을 상상할 때는 더더욱 발랄하고 귀엽기까지 하다. 이렇듯 유쾌하고 밝은 그들의 모습은 노동조건이나 환경과 더욱 대비되면서 개발 논리 속에서 묵인되고 침해당하는 인간과 인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작품의 미덕은 '인간' 전태일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열사라는 호칭 이전에 동료들을 사랑하고 아끼던 젊은 노동자인 인간 전태일에 집중했다. 이러한 제작진의 시선과 태도는 전태일이 태어나면서부터 유달랐다거나 엄청난 역경을 무한한 능력으로 헤쳐 나가는 영웅이 아님을 보여주면서, 특별하지 않고 평범하기에 누구나 전태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배고픔은 생존의 문제다. 전태일이 마주한 현실은 법이나 노동 같은 거대담론이 아니라 해소되지 못하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가난에 대한 근본적 탐색이었던 것이다. '불씨'는 청년이자 인간 전태일을 보여주면서 그의 고민이 죽음이 아닌 생존에 있었음을 조화로운 연기와 군더더기 없는 연출로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작 연출의 말 - 이은준

'전태일 평전'을 모티브로 전태일의 삶과, 그 시절 평화시장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 시절과 현재 우리는 무엇이 얼마만큼 달라졌는가?

2020년은 전태일이 몸에 불을 붙이고 고인이 된지 50주기다.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지키고자 했던 전태일 열사.

그 정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 태일의 일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