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작은 섬.
이발소를 하는 홍길과 영순의 셋째 딸인 미희와 만석은 결혼식을 올린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상황이지만 두 사람의 결혼으로 모인 사람들은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흥겹게 웃고 떠드는 가운데 만석은 미희의 언니 진희에 대한
속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미희는 우울하기만 하다.
어느 날 가수지망생으로 부대 클럽에서 노래하는 둘째 딸 선희는 군수 물품을
얻어오지만 영순에게 뺨만 맞고 뛰쳐나가고 한쪽 다리를 잃은 일본인 중좌 시노다가
다리를 씻기 위해 이발소에 오자 진희는 정성스레 씻겨준다. 이를 본 미희가
시노다에게 무슨 다른 마음 있는 거냐고 비아냥거리는 바람에 만석과 크게 다툰다.
만석과 진희에 대한 불편한 마음으로 괴롭던 미희는 포로감시원으로 징병 된
원창과 격정을 나눈다. 포로감시원으로 징병 된 원창과 신병들이 이 이발소에서
사람들의 격려 속에 출정식을 갖고 떠나자 미희는 말리는 만석을 뿌리치고
원창을 뒤쫓아 가고 전역을 하게 된다는 시노다를 보내고 진희는 혼자 오열한다.
포로감시원으로 징병된 춘근의 옷을 만들기 위해 식구들이 모인 날 시노다는
하사관 한 명과 찾아와 막내딸인 정희에게 기지 지도를 빼내 공작 파괴 활동을
했는지 추궁한다. 모든 걸 시인한 정희가 따라나서는 순간 함께 활동한 남자가
도망치자 총을 든 하사관이 뒤쫓고 이를 본 정희도 쫓아가다 둘 모두 총을 맞는다.
소집영장을 받은 만석은 진희에게 아직도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는데 진희는
먼 과거 속의 일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이때 미희는 임신 사실을 알리고
진희는 섬을 떠나기 전 인사하러 온 시노다에게 미래를 함께하자고 한다.
그러나 일본 군인에게 막내딸을 잃은 영순이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동안 정의신의 작품 중 재일교포나 한국인을 등장시킨 이야기는 종종 있었지만, 아예 한국 자체를 배경으로 쓴 것은 이번 작품이 처음이다. 작가 스스로도 한국에서 살아보지 않은 채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이 자칫 건방진 일처럼 여겨질 수 있어 조심스러웠으나, 재일교포 한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역사는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으로 용기를 냈다고 밝히고 있다.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의 시대적 배경은 1944년, 전쟁이 끝나기 바로 직전의 한국(당시는 조선)이다. 전쟁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당시는 한일 양국에 일촉즉발의 긴장된 시기였다. 패전을 앞두고 있던 일본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내보내거나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탄광에 보냈고, 학생들은 수업 대신 비행장 활주로 공사에 동원시켰다. 작품 내에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들이 직, 간접적으로 계속 제시되고 있는데, 자칫 민감한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작품으로 만들고자 한 데는 작가의 개인적인 사연이 있다. 정의신은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의 구상을 헌병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출발했다. 15살에 일본에 건너가 헌병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그의 아버지는 이후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다가 50년이 지난 뒤에야 할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직 어렸던 정의신은 왜 아버지가 그토록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돌아가지 못하는지 의아해했었는데, ‘아버지는 일본군 헌병을 해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까봐 돌아갈 수 없었다.’는 어머니의 설명을 듣고서야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역사에 휩쓸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해자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전쟁이란 극한 상황 속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선택을 강요당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해 오랜 세월 비난과 자책감에 괴로워해야 했던 사람들. 아버지에 대한 기억 속에서 그들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된 정의신은 언젠가 그런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이야기로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오랫동안 품어온 그 생각을 이번 작품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를 통해 실현하게 되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조선인 헌병인 대운 정도가 아버지를 반영한 인물이라 할 수 있으나 극중 그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애초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출발하긴 했지만, 작품을 쓰면서 작가의 시선이 헌병보다는 전쟁의 광기 속에서 살아남고자 했던 한 가족의 삶 전체에 맞춰졌기 때문이다. 언제나 한 개인보다는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인물 모두에게 고루 향하곤 하는 작가의 시선이 이번 작품에서도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의 공간적 배경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섬이다. ‘섬’이란 말이 주는 격리된 느낌 때문인지 전쟁 막바지라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이 섬은 여전히 따스하고 평온한 느낌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역사적 고증을 거친 실재하는 섬이라기보다는 작가가 꿈꾸는 곳,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이상이 담긴 공간이기도 하다. 작품의 배경이 된 섬은 작가의 경험과 환상이 뒤섞여서 만들어낸, 실재와 허구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작가 정의신은 몇 년 전 최양일 감독과 함께 한국 이곳저곳을 여행하던 중, 목포로부터 배를 타고 두어 시간 들어가야 하는 작은 섬에 들른 적이 있다고 회상한다. 여객선이 들어가지 못해 작은 어선을 타고 한참 섬 뒤쪽을 돌아야 겨우 내릴 수 있는 작은 섬이었다.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한쪽에서는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섬의 광경을 둘러보면서 정의신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서 만났던 한 할아버지가 자신을 일본인으로 생각했는지, 예전에 이곳에 일본 헌병이 살았는데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렇게 작고 평화로운 섬에도 그런 시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었다는 사실이 작가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러한 경험이 이 작품을 쓰는 데 기본적인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영향 때문인지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에 등장하는 섬은 역사적, 시대적 상황을 매우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상향의 아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이번 작품의 연출도 직접 맡은 정의신은 연습 과정을 통해 이러한 현실과 환상의 교차를 입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정의신의 작품에는 언제나 ‘가족의 사랑’이 그 중심에 있다. 그것이 재일교포의 이야기든, 쥐의 이야기든, 동성애자와 장애인의 이야기든,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은 그의 작품에서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정의신이 자매를 자주 등장시키는 것 역시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정의신의 어머니는 네 자매였는데 이모들이 모이면 항상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보따리를 쏟아내는 것을 보면서 저렇게나 할 이야기가 많을까 궁금했었고, 그러한 기억이 자매라는 모티브를 자주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의 주인공은 홍길이네 이발소의 네 자매, 진희 선희 미희 정희이다. 그리고 이들의 남편과 전 남편, 애인 등 네 자매를 둘러싼 주위 인물들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작품의 주된 줄거리 역시 네 자매의 각기 다른 사랑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첫째 진희는 역시 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일본군인 시노다와 애틋한 마음을 나누고, 둘째 선희의 전남편 춘근은 이혼한 뒤에도 선희를 떠나지 못하고 그녀 주위를 빙빙 돈다. 학교 선생님인 셋째 미희는 언니를 마음에 두고 있던 만석과 결혼하지만 마음을 잡지 못하는 만석 때문에 속앓이를 하다 군인 원창과 불장난 같은 사랑에 빠진다. 한편 일본군에 대한 깊은 반감을 지니고 있는 넷째 정희는 어쩔 수 없이 헌병이 된 조선인 대운에게 연민을 느낀다. 네 자매는 서로 다른 자신들의 성격처럼 각기 다른 사랑을 하지만, 전쟁이라는 시대적 한계는 이들 모두의 사랑에 공통적으로 한계를 지운다. 네 자매 중 특히 진희와 시노다는 전쟁 중 일본군인과 한국인의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위험하게 보여질 수 있는 부분이다. 작가 역시 이것이 위험한 설정이라고 생각해 주저했지만, 각기 부족한 부분이 있는 두 사람이 시대적 상황을 뛰어넘어 서로를 보듬으며 하나가 되는 설정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이 작품에서 네 자매는 각기 다른 사랑 이야기를 그리는 동시에 전쟁에 대처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막내 정희는 반일 운동을 통해 가장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감을 드러내고, 클럽에서 군인을 상대로 노래하는 둘째 선희는 전쟁이란 상황을 이용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 하며, 학교 선생님인 셋째 미희는 일본에 협력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리고 불편한 다리 때문에 이발소와 집을 떠나지 않는 첫째 진희는 가장 전쟁과 관련 없어 보이는 인물이지만, 시노다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가장 전쟁의 영향을 깊이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처럼 서로 다른 캐릭터 속에서 전쟁에 대해 각기 다른 반응과 선택을 보여주는 네 자매의 모습을 그리는 데 작품의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2008년 초연된 뒤 2011년 재공연 무대를 가졌던 정의신 작가의 <야키니쿠 드래곤>을 본 관객이라면 이번 작품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를 더욱 친숙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야키니쿠 드래곤>의 부제가 ‘용길이네 곱창집’이었다면, 이번 작품의 부제는 ‘홍길이네 이발소’라 붙여도 좋을 만큼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야키니쿠 드래곤>과 이어지는 지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생활력 강하고 억센 어머니와 말없이 자식을 지켜보는 아버지, 각기 다른 성격의 자매들 등 주인공 가족의 구성원도 비슷하고, 이들 가족 주위에서 이런저런 관계를 맺어가는 인물들의 특징도 유사한 점이 많다. 이렇듯 자매를 둘러싼 인물 구성은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20세기 소년소녀 창가집>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들 작품들을 통해 자매를 중심으로 한 가족에 대한 정의신의 각별한 애착을 확인할 수 있다.
<야키니쿠 드래곤>이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직전의 간사이 지방을 배경으로 재일교포 가족의 삶과 애환을 그렸다면,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는 1944년 해방 직전 한국의 한 외딴 섬을 배경으로 전쟁의 극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아픔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힘겨운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가족의 모습을 그린다는 점에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시대적․역사적 배경이 다른 만큼 이들 가족의 모습은 서로 비슷한 듯 하면서도 조금씩 다르다. <야키니쿠 드래곤>을 본 관객이라면 두 작품의 어떤 점이 서로 통하고 어떤 점이 또 다른지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가족이 중심에 있다는 점은 같지만, <야키니쿠 드래곤>의 중심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있었다면 이번 작품의 초점은 서로 다른 네 자매에 맞춰져 있다. 네 자매의 각기 다른 사랑이 극의 중심으로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인 홍길과 영순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대신 이들은 극의 시작과 마지막에 등장해 과거의 이야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모든 일이 다 지나고 난 뒤 담담하게 지난 과거를 추억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역사의 풍랑을 온 몸으로 겪고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보다는 한 발짝 뒤에서 이야기를 지탱하는 인물인 홍길과 영순을 통해 그들의 눈에 비친 시대, 그들의 눈에 비친 그 시절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에는 체홉의 <세 자매>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나 대사들이 종종 등장한다.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체홉이라고 밝힌 바 있는 정의신은 <겨울 해바라기>에 <갈매기>의 오마쥬를 사용하고, <20세기 소년소녀 창가집>에 의식적으로 <세 자매>를 반영하는 등 전작에서도 체홉에 대한 동경을 직, 간접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작가는 의도적으로 <세 자매>의 인물이나 상황을 겹치게 그려 넣고 있다. 이는 100년 전 체홉이 그렸던 세상은 아직 변하지 않았고, 그가 우리에게 던졌던 질문 역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작가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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