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 여자를 만나다
우린 타자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다만, 내가 보고자 하는 너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보게 된다.
〈사막, 반경 10m〉은 이러한 인간의 만남 속에 드러난 엇갈림과 소통의
어려움을 표현한다. 무대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막은
소통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또한, 이 거대한 막에 비추어진 그림자는 우리들의 자의식의 상징이다.
우린 이러한 자의식을 통해 타자에 대한 왜곡된 기억을 간직하게 되며,
이렇게 형성된 기억은 타자와의 정상적인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저, 거대한 자의식의 벽을 넘어 남자와 여자는 과연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이 작품은 이러한 만남의 가능성을 시도한다.

세상은 참으로 물기는 적고 증발은 빠르다!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 앞에 놓여있는 환경 -거리,
경기장, 상점, 학교, 교회, 집 등-은 실제로 사막 위의 신기루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맺고 있는 숱한 관계 모두 역시 그림자 놀이와도 같은
허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우리 앞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것은
세상이 얼마나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인지를 망각시켜주는 견고한
투명의 벽일 뿐. 참으로 많은 사람은 이 벽을 인식 못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통하여 자신의 건조한 삶을
촉촉한 습기로 적실 수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과연 우리는 우리들의 벽을 넘어 우리만큼 소통을 꿈꾸는 자들의
실체를 본 적이 있던가?
단지 관계맺음을 위하여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유발되는
너와 나의 있음에 대한 '흔적'과 끊임없이 유희를 하다가
어느새 우리의 벽이 그 흔적들로 채워지면
그 벽을 떠나 또 다른 벽을 찾아 다시 방랑길에 나서게 된다.
그게 바로 우리가 소위 세상이라고 부르는 이 '사막'에서
살아가는 생존방식이다. 무너뜨리고 싶지만 견고하게 서 있는 벽,
그림자 밖에 볼 수 없는 타자의 있음. 그리고 이러한 타자들과
나누는 흔적의 유희... 이러한 것들을 그림 그리는 그림자극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작가의 글 - 김덕수
고독, 우리가 고독하다는 것, 어느 지점에선가 침투가 불가능해져서 서로를 이해할 수도, 소통할 수도 없다는 것은 이미 고독한 개인들에게 굳이 판 벌려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해나 소통과 같은 이성적 영역과는 거리가 멀다. 사랑이 반드시 이해나 동질감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랑은 그것들보다 먼저 온다. 먼저 와서 그것들을 지배한다. 따라서 사랑은 일종의 '홀림'이다. 무조건적인 조화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연인들 사이에 놓인 '홀림'의 막은 홀연히 사라진다 - '홀림'의 상태가 영원하다면 그것은 이미 '홀림'이 아닐 것이므로 - 또다시 침투가 불가능해지는 지점, 壁이다. 즉, 이해와 소통, 타협의 이성적 영역으로의 귀환이다. 우리는 비행을 준비하고 있다. 상공 및 피트? 아무튼 그 어떤 쇳덩이도 오르지 못한 높이로 비행할 것이다. 비행의 정점에서 거대한 구름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壁. 그앞에 관객을 모두 내려 놓은채 우리는 서둘러 귀환할 것이다. '홀림'에 대한 격렬한 향수로 거기에 남아있거나, 우리를 따라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거나, 또는 구름壁을 뚫고 더 높이 솟구치거나 하는 것은, 모두 관객의 몫이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어떻게든 더 높이 날아가주길 바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쌓아놓은 壁은 몹시 견고해서 끔찍해보이기도 하지만, 산산이 부서지고픈 욕망으로 세워진 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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