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근형 '아오모리의 비'

clint 2025. 6. 24. 07:49

 

 

짧은 인생의 어느 순간, 
예기치 않은 비를 맞게 되는 때가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연착되는 배를 기다려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간혹 내 안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거짓말처럼...


 
무대는 아오모리에서 훗카이도로 가는 페리선 항구다. 
하체불구의 늙은 여인과 오랜 지기로서 그녀를 돌보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가진 할머니, 
공개적인 밀월여행을 떠나는 남녀와 남편을 따라 동승한 부인, 
페리선 승무원 셋, 할아버지를 찾아 바다로 나가려는 정체불명의 
치과의사 하나, 이렇게 4개의 서사에 한국인들로 일본에 에로영화를 
촬영하러 온 감독과 에로배우들의 이야기가 더해져 
맛깔스런 5개의 이야기들이 차려진다. 

 

 


무대에 등장하는 17명의 배우들은 모두 문제적 개인으로 그려진다. 
에로 배우들의 자극적인 성애장면으로 관객의 오감을 순식간에 
집중시켰던 극 초반 흥분요소는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휘발되어 버린다. 
인물들이 쏟아내는 우울한 과거들과 만만치 않은 현실, 트라우마, 
전반적으로 평온하며 조곤조곤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드러내더니 
천둥소리와 함께 찾아온 악천후로 예정되어 있던 페리선의 출발이 
무한정 지연되면서 그 본색을 드러낸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점철된 본질적 테마들이 터져나온다.
한국에서 사창가를 전전하던 제니조차 “포르노 배우는 있어도 
포르노 인생은 없다.”는 감독의 말처럼 자신이 가야할 ‘길’에 대한 고민을 
절절하게 토로한다. 이것은 페리가 출발하기 직전 제니의 행방불명에 
대한 복선으로 작용하며 후에 자살로 밝혀진다.

 


극단 ‘골목길’ 박근형이 직접 쓰고 연출한 이 작품은 한-일 합작품이다. 
역량 있는 한국과 일본의 배우들이 뒤섞여 절묘한 연기를 선보이는 
연극 ‘아오모리의 비’는 골목길이라는 극단 이름처럼 서로를 향해 
또는 자신을 향해 꼬이고 얽혀버린 삶의 길에 대한 물음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아오모리의 비’는 각각이 가진 삶의 길들을 점차 심화시키며 
갈등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서로를 이어주는 마음의 길을 놓아 
위안을 삼는 혜안을 보여주어 감정의 균형의 꾀한다.
평행선처럼 서로의 길에 대한 정다운 목격자일 것 같았던 인물들의 
관계는 어둡고 낮은 조도의 조명, 계속적으로 들리는 빗소리, 
비로 인해 두껍고 갑갑해진 의상들과 어울려 얽히고설킨 
골목길임이 밝혀진다. 이들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그것이 어떠한 길이든 인간적 ‘믿음’을 버리지 않는 것, 
다소 진부한 결론이지만 연극 ‘아오모리의 비’가 들려주는 
촉촉한 이슬비의 향연은 분명 삶의 희망을 속삭이고 있었다.  



아오모리에서 홋카이도로 가는 페리 선착장 대합실, 대합실에서는 각각의 이유로 출항을 기다리는 4쌍의 가족들이 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각기 서로 다른 가족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의 과거 인물과 사건들이 언뜻 비친다. 아오모리는 거짓말처럼 비가 온다. 빗소리에 취해 소주잔을 기울이 다 보면 아깝게 줄어드는 소주 위로 언제 그랬냐는 듯 지금 낮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햇빛이 쏟아진다. 아오모리에 내리는 거짓말 같은 비는 인간의 삶과 묘하게 닮아있다. 때로 우리들은 자신에게 조차 거짓말을 하고 살고 그것을 완벽하게 믿고자 애쓴다. 하지만 삶이란 우리가 믿고 있던 것들이 전복되는 순간 더욱 극명하고 직설적으로 다가온다. 일기예보를 믿고 있다가 예기치 못한 비로 인해 스스로의 궤도를 놓쳐버린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준비되지 않은 시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연착되는 배를 기다리며 자신을 냉혹하게 직시해야 하는 순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창밖을 노크하던 빗소리가 잦아든다. 그러나 언제 다시 비가 내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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