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잃고 낙향한 손참의는 당골네를 겁탈하여 아들 강수를 얻고
그 사실을 숨긴 채 자신의 집 노비로 삼고, 반항하던 당골네의
지아비 두엉영감의 다리를 못쓰게 만들고 역시 노비로 삼는다.
참의의 아들 손진사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강수와 혼인하기로 하였으나 진사를 남몰래 사모하던 분이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여 허망한 정념에 빠져든다.
한편 노론과 소론의 당파 싸움에 진사와 처가가 그 뜻을 달리하게 되고
그 와중에 부인은 자객의 손에 죽게 된다.
손참의는 병으로 숨을 거두며 두엉영감과 당골네, 강수에게
자신의 잘못을 빌게 되고, 부인의 죽음에 자책감에 빠진 진사는
분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뒤에 남은 강수가 진사 집안의 대를 잇게 되고
이 모든 죽음에 당골네는 그 넋들의 극락천도를 기원하게 된다.
1992년 국립극장 희곡공모가작 당선작 최현묵의 「불」
작가가 이 작품을 처음 구상했던 시기에는 계급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주제에 깊게 관심을 가졌었고 작품에서도 피지배 계급으로 설정된 가시와 분이가 손진사에게, 당골네와 두엉영감은 손참의에게 학대받는 이야기였다. 그 이후 `95년 첫 공연을 결정하면서 개작과정을 거쳐 주인공인 ‘가시’도 ‘강수’로 바꾸고 등장인물에 대한 성격도 바꾸었다. 분이는 강수보다 손진사를 남몰래 흠모하는 여자로, 강수는 성격도 천박하면서도 이기적인 인물로 바꾸었고, 옥녀는 요염하면서도 강한 집념의 여자로서 강수를 드러내놓고 사랑한다. 결국 개작된 작품 「불」은 애증과 욕망 그리고 집념등이 사건을 이끌어 내고, 그 사이에서 손씨가문이 몰락해가는 과정을 다루었다. 이로써, 주요등장인물들이 모두 사망에 이르는데서 끝을 맺지만, 이들 인물에 대한 씻김굿으로 구성된다. 부정풀이, 전상놀이, 씻김, 천도, 뒷전 등의 장면으로 짜여진 전형적인 굿의 형식으로 꾸며지며 연극 전체가 하나의 ‘굿’이 된다. 독특하게 공연의 형식은 우리 전통의 ‘굿’ 양식에서 차례와 순서를 모두 생략하지 않은 채 그대로 무대에 올려졌다.굿을 현대적인 연극이 온전하게 수용하여 보여준 작품이란 점이 이 공연이 갖는 연극적 특징이다.
‘굿’을 통해 인간이 갖는 욕망과 쉬쉬하며 행해졌던 모든 좋은 일 , 나쁜 일들이 백일하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 ‘불’ 공연에선 ‘알고도 모른 체, 모르고도 아는 체’ 하며 행해졌던 압력과 멸시 그리고 수군거림 등에 대한 인간적 모습들이 극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을 통해 대변된다. 물론 개인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되기도 하고, 순수한 연극의 세계에 대한 이여기이기도 하고, 관객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이번 공연의 백미는 ,정말 하고 싶어 하는 말은,. 넋풀이 -<공수놀이 / 해원 / 씻김>-* 공수놀이 : 무속의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죽은 자와 산자의 한풀이 (원작의 내용이 공수놀이에 녹아 표현된다.)- 이다. 결국 공연 전반을 통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더 이상의 억울한 희생자 없이 온전하게 예술을 위해 자기희생을 통한 헌신하게 바랄 뿐 이란 점‘이고, 그것이 더해져 떠나는 마당에 새로 올 사람과 남겨진 사람들 모두에게. 전상놀이 -<극중극>* 전상놀이 : 한풀이를 해주고 깨끗이 씻긴 혼백들이 떠나기 전에 굿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노는 놀이. 길닦음굿 -<천도 전에 길 닦아주는 의식>* 길닦음굿 : 한을 풀고 깨끗이 씻은 혼백들이 한바탕 놀고 난후 떠날 길을 열어 주는 의식을 통해 새롭게 다시 온전한 하나로 태어나길 원하는 마음이 소망이 담겨진 작품이란 것이다.
작가의 말 - 최현묵
처음 이 작품이 구상된 것은 '89년경이었다. 그때 나는 계급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주제에 일관되게 매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 작품도 사실상 피 지배 계급으로 설정된 강수와 분이가 손진사에게. 당골네와 두영영감은 손참의에게 학대받는 이야기였다. [...] 당시 백성희 단장님은 다양한 무대활용이 가능한 작품으로서 잘 만들면 좋을 것이라며 부끄러워하는 나를 부추겨 주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 작품이 공연될 때는 철저히 개작하여 좋은 공연이 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드렸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공연이 안 되는 모양이다 생각하고 있던 작년 여름, 불쑥 권성덕 단장님으로부터 공연이 있을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면서 작품의 손질이 필요하다는 말씀이 있었다. 그건 어차피 나도 약속한 일이었기에 흔쾌히 대답을 드렸다. 그리고 작품의 손질에 매달렸다. 개작이 아니라, 거의 새로 쓸 정도로 작품을 바꾸었다. (...) 결국 개작된 작품 <불>은 인간의 내면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애증과 욕망, 그리고 집념 등이 사건을 이끌어 내고, 그사이에서 손씨 가문이 몰락해가는 과정을 다룬, 약간의 표현주의적 기법을 차용한 사실주의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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