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호 윤 노인의 그늘에서 남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강 수위는 슬하에 두 자식이 있다.
주인에게 대한 의리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강 수위와는 달리,
아들 석(중학생)은 이름난 개구쟁이고, 딸 미애(여대생)는 물고기처럼 발랄한 아가씨,
고등학교 때부터 펜팔로 사겨온 일선의 권인섭 하사를 열화같이 흠모한다.
6·25때 처자식을 잃은 윤 노인은 이들 두 남매를 손자처럼 사랑하는데,
윤 노인의 후실인 여사장은 그녀의 사생아 영호를 윤노인의 상속자로 만들어놓은 터라
이들 두 남매가 눈에 가시다. 군에서 제대한 권 하사가 꿈에 그리던 미애를 찾아
별장에 오든 날은 불행하게도 윤 노인 임종의 날.
미국에서 재산상속 차 임시 귀국한 영호 때문에 권하사는 석별의 정도 나누지 못하고
낡은 트렁크 하나만 미애에가 맡기고 떠난다.
30여 년간 주인을 모신 정성으로 강 수위는 윤노인에게서 별장을 물려받고,
미애는 영호의 꼬임으로 가슴이 부풀었으나. 모든 것은 일시적인 꿈이련가....
하루아침에 생활의 토대를 잃은 이들 가족은 속수무책으로
석은 구두닦이가 되고 미애는 누드쇼에 출연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이 실정을 안 장 건축기사를 자칭하고 자신의 설계에 따라 별장이 헐린다고
교묘히 속여 미애를 괴롭힌다. 한편 개구쟁이 석은 주간신문기자인 박 기자에게
자신이 맹아 구두닦이라고 속이고 형들을 6·25와 4·19와 월남전에 잃었다고
거짓말한다. 박 기자는 이를 특종기사로 싣고자 별장으로 취재차 찾아온다.
이를 맞은 영호는 석의 거짓말을 사실인 것처럼 조작한다.
다음 주 신문에는 석의 기사가 특종으로 대서특필되어 여러 사람들이 찾아온다.
석의 옛 담임은 학생들의 성금을 가져오고, 홍순경은 상부 지시로 내사에 나서고,
윤노인의 생존시 주치의였던 김박사는 각막이식 무료수술을 제시하고
그 뿐만 아니라 박 기자는 각계에서 성금과 선물이 답지한다고 알려온다.
교묘히 그때그때마다 장 기사의 연출로 위기는 모면되었지만
각막이식 수술이란 말에 놀란 석은 도망하고 만다.
한편 사업확장에 혈안이 된 여사장은 관광호텔을 짓기 위해 기어코 별장을
강제철거하기에 이르는데 본 남편이 나타나므로 곤경 속에 빠지고,
자식(석)을 기다리는 강 수위는 헐린 집터에 눕고 만다.
미애는 기사에게 속은 걸 인식하고 모든 사실을 고하고 새 생활을 하자고
실의에 찬 강 수위를 설득시키는데 꿈에 그리던 권인섭이 찾아오나
미애는 떳떳하게 맞이할 길이 없다.
이때 등산객이 찾아와 산에서 동사한 석의 죽음을 알린다.
작가의 글 - 박운원
큰 병을 앓고 난 사람은 생명의 소중함을 안다. 건강할 때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생명의 소중함을 병자가 되면 절실하게 느낀다. 그 병이 고질이면 고질일수록 길면 길수록 생명에 대한 절실함은 더하다. 대단치 않는 병을 가볍게 앓고 나면 약의 소중함을 아는 정도로 끝나리라. 병상을 지키며 환자못지 않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병자를 수발하는 사람은 인술의 고마움을 인식하는 것으로 끝나리라. 그러나 큰 병에 시달리는 당사자는 약의 가치보다 의술의 고마움보다 원초적인 생명 그 자체의 소중함을 통감하고 생명에 대한 향수, 생명에 대한 동경, 생명에 대한 애착으로 몸부림친다. 실로 오랜 세월을 큰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병과 싸운다. 약과 의술과 갖는 비방을 다 동원하여 오직 내 한 목숨만을 살리기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안간힘을 다한다. 그러나 오랜 병과 싸우다 보면 병을 이겨 내겠다는 집념이 내 자신만을 위하는 투쟁이라기보다 오히려 병상을 지켜보는 듯한 이웃과 같은 병으로 신음하는 수많은 동료 환자를 위해서도 이겨내야한다는 신념으로 변모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투병은 약과 의술보다도 환자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이때 비로서 환자는 인간 실존의 고독을 느낀다. 숱한 날의 절망과 체념과 집념 끝에 더디게나마 쾌유되어가는 순간 화재 끝에 남는 잿더미처럼 주변에 스산한 바람이 불고, 남은 생명이 비록 짧고 역부족이라도 그 생명의 존재가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러가지 이름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위해 약이나 인술이 아닌 또다른 의미의 비방이 되어 진실한 처방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다.
나는 오랜 병과 싸워 왔다. 극문학이라는 병과. 연극은 놀이다. 놀이는 놀이만으로 충분히 즐겁다. 어떤 종류의 놀이라도 놀이 그 자체는 즐거운 것이다. 놀이는 인간 생명체의 호흡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우리는 저 18~19C의 산업혁명과도 같은 시대와 사회속에서 살고 있다. 이 의미깊은 와중에서 나만이 즐길 수 있는 놀이에 도취하기에는 현실은 너무도 벅차고 연극은 너무나도 값비싼 충혈이다. 그리고 현실의 초극이 아닌 실험을 위한 실험을 추종하는 것도 사치스럽게만 여겨진다. 이 작품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한 인간의 증발을 구조주의적인 관점에서 그린 작품이다. 국외(局外)에 버려진 무명 극작가의 작품을 쾌히 받아들인 연출 呉史良先生과 극단大河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극평론가 Robert Pignarre 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내 투병기의 말미를 맺고자 한다.
“연극이 물질적으로 억압되고 예속되어 죽을 지경에 이르면 영화나 라디오나 텔레비젼같은 그 어떤 후계자를 가지고도 연극이 하는 것과 같은 사회의 공동체를 만드는 사명을 대행할 수는 없다.” 막은 올라야 한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임 두 도둑 이야기 (1) | 2025.02.16 |
---|---|
이상훈 '장난감 병동' (1) | 2025.02.16 |
안현정 '선인장' (1) | 2025.02.14 |
오태영 '보행연습' (1) | 2025.02.13 |
김희창 '바보와 울보' (1) | 2025.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