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오노레 드 발자크 '사기꾼'

clint 2024. 3. 29. 09:28

 

 

 

파산한 투자 사업가 메르카데는 점점 더 압박을 받는

채권자들을 안심시키려 애쓴다. 이를 위해 그는 인도에서 큰 사업을 

위해 떠난 옛 파트너인 고도를 불러들이려는데, 그 고도가  빨리 돌아와

자신의 빚을 관대하게 갚아줄 거라고 채권자를 설득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채권자들이 참을성이 없어지자, 메르카데는 딸 쥘리를

부유한 청년인 무슈 드라 브리브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드라 브리브는  메르카데보다 훨씬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게다가, 쥘리는 이미 가난한 청년 마나르와 사랑에 빠졌고.... 

메르카데는 젊은 드라 브리브의 가면을 벗기고 그 실체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계획에 끌여들여 고도라고 만들려 계획을 꾸민다. 
메르카데의 계획처럼 고도는 파리로 돌아와 친구의 채권자들에게 
돈을 갚아주고, 주식을 뻥튀겨 크게 한몫 볼 계획인데..... 

꿈처럼 깨진다.  파산 직전에 몰린 메르카데는 어떻게 될까....?
막판의 대반전은 딸과 사귀었던 미나르가 고도의 친아들로 밝혀지고 
인도에서 성공한 고도의 뜻대로 메르카데의 부채를 전부 갚게 되고 
부자 미나르는 쥘리와 결혼하게 되고.... 

메르카데는 부인과 시골로 가서 농장의 꿈을 이룬다.

 

 

 

1850년 발자크 타계 이후 9년 만에 희극 <사기꾼>이 보드빌 극장(Théâtre du Vaudeville)에서 재공연 되었을 때,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 1811~1872) '프랑스는 소설가의 명성에 버금가는 극작가 한 사람'을 잃었다고 그 연극을 높이 평가했다. 물론 이 판단은 만일 발자크가 <인간 희극(La Comédie humaine)>을 쓰지 않았다면 그의 희곡도 주목을 받지 못했을 만큼, 그의 소설이 후대에 끼친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나이 20세였던 1819년 작가의 꿈을 품고 있었던 발자크가 파리 레디기에르 거리 다락방에 기거하며 가장 먼저 쓴 작품은 5막 운문 비극 <크롬웰(Cromwell)>이었다. 그는 이 희곡을 야심차게 완성했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고, 1822년 발표한 3막 멜로드라마 <검둥이(Le Négre)>도 극장 공연을 거절당하게 된다. 1838년 발자크는 처음 희곡을 쓸 때와 같은 패기와 의욕을 잃은 채, 특별한 희곡 장르를 선보이거나 새로운 유행에 합류하지 못하고, 산문체의 범상한 희곡 <절약의 학교(L'École des ménages)>를 세 번째로 발표하면서 연이은 고배를 마셔야 했다. 결국 1840년 그의 4번째 희곡 <보트랭(Vautrin)> 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가 자신의 소설을 연극에 팔아 넘기려고 한다는 비평을 받게 되었다. 발자크 희곡의 수난은 1842년 오데옹 극장에서 20회 공연도 채우지 못한 5막 산문 희극 <퀴놀라의 자본(Les Ressources de Quinola)>으로 이어졌으며, 이듬해 게테 극장(Théâtre de la Gaîté)에서 선보인 부르주아 드라마 <파멜 라지로(Paméla Giraud)> 21회 공연으로 막을 내리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1848년 루이필리프의 퇴각과 함께 프랑스에 제2공화정이 설립되던 정치적 혼돈의 시기에, 한 가족의 내밀한 비극을 다룬 드라마 <계모(La Maratre)>가 마침내 호응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발자크 희곡에 대한 동시대의 평가는 무척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계모>의 인기에 힘입어, 1840년에 쓰인 희극 <사기꾼>은 작가 사후 이듬해인 1851년 당대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배우 프레데리크 르메트르(Frédérik Lemaître) 주연(메르카데 역)으로 공연되었다.

 

 

 

5막 희극 <사기꾼>의 시간 배경은 1839년으로 추정되는데, 발자크가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로 보인다. 7월 왕정(Monarchie de Juillet, 1830~1848)이 모든 사회 경제 현실에서 정점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희곡이 완성되었을 당시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제2공화정(IIe République, 1848~1851)이 막 들어서게 되었다. 정치를 사리사욕의 도구로 이용하고 부르주아 계층 사이에 황금만능주의가 본격적으로 부상하던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자크는 이 희극을 통해 자본주의의 속성을 해부하여 드러내 보인다. 발자크의 <사기꾼>에서는 프랑스 희극사상 최초로 돈의 문제를 다룬 르사주(Alain René Lesage, 1668~1747) <돈놀이꾼 튀르카레>(1709)와 같은 맥락이 엿보이지만, 파리의 증권시장이 주요 무대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시대적 차이를 보여준다. 이 희곡에서 작가는 몰리에르 희극의 전형적인 등장인물 구도에 따라 남편과 부인, 과년한 딸 그리고 하인들로 구성된 동시대의 평범하고 안락한 가정이 어떤 위기에 직면해 있는지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메르카데 부인은 <부르주아 귀족(Bourgeois gentilhomme)>의 주르댕 부인과 <타르튀프(Tartuffe)>의 엘미르처럼 완고하고 무책임한 남편과 아버지로 인해 각각 붕괴될 위험에 처한 가족을 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인물들의 성격을 본떴다. 그녀는 주식 놀음의 허황한 한탕주의에 빠진 남편에게 양심과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애쓰지만, 딸 결혼을 위해서 자신을 부잣집 마님처럼 행세하도록 조장하는 남편 의도를 받아들이며 번번이 그의 불안한 사기 행각을 눈감아준다. 이들의 외동딸 쥘리는 가진 것 없는 착실한 청년을 사랑하지만 부모의 권유로 원치 않는 상 대를 끝내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 인물들과 대칭 관계를 이루는 또 다른 등장인물인 집사, 가정부, 요리사는 자신들의 주인이 위기에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주인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동 쥐앙> 결말에서 자신의 급료를 달라고 외치는 하인처럼 밀린 월급을 계산하는 뚜렷한 경제관념과 현실적인 시민 의식을 대변한다.

 

 

 

<사기꾼>의 주인공 메르카데는 오늘날 월 스트리트에서 말하는 '정크본드'를 노련한 솜씨와 기술로 운용하는 업자다. 그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주식 가격이 떨어졌을 때 사뒀다가 오르기 시작하면 최고의 수익을 보장한다고 갖은 술책으로 매입자를 속여 되팔아 넘기는 수법이다. 희곡에 나오는 바스앵드르는 루아르강 상류의 아주 그럴듯한 광산지대를 가리키지만 실제로 가공의 지명이다. 업자는 먼저 이 주식이 동났다고 거짓 정보를 흘린 후 광맥이 발견됐다고 허위공지를 유포해 폭등한 주식가격을 통해 이득을 노린다. 이런 유령회사를 둘러싼 투기는 투자자의 사행심을 조장하고 정상적인 증권거래를 마비시키는 광풍을 연출한다. 사람의 심리를 가지고 노는 사기꾼, 메르카데는 은행 빚을 이용해 점점 더 대범하고 위험한 놀이를 펼치며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아버지에게 빚을 져서 영원히 빛을 이어가는 존재' 라는 철학적 논리를 내세운다. 주인공 메르카데는 자세히 보면 수전노와는 성격이 매우 다른 인물이다. 그는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단지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여기 저기 퍼뜨린다. 독선적이지만 고객을 친구처럼 생각하고 그들의 막대한 사업에 관여한다. 한푼 이득을 취하지도 못하면서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도취되어 허황된 망상을 뒤좇는 돈키호테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발자크는 일찌감치 소설 <나귀가죽(La Peau de chagrin)>(1831)에서 빚을 '상상력으로 빚어낸 작품(une oeuvre d'imagination)'이라고 정의한 바 있듯이 빚에 대해 냉철한 이성적 관점으로는 불가해한 개념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한평생 채무에 허덕이며 살았던 그는 채무자에게 미래에 도박을 걸어 비이성적인 위태로운 길을 걷고 있다는 미학을 부여해 사기꾼을 시인에 비유한다. 그들이 쌓고 쌓은 모래성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마는 꿈과 같다는 해석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투기꾼 메르카데는 본질적으로 돈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의 시나리오를 펼쳐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희곡에 나오는 탄광이며 금맥, 소금광산 등은 모두 환상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작가 발자크는 실제로 사르데냐의 은광산 사업이나 자신의 별장 자르디에서 집약 농업으로 파인애플을 재배하는 계획을 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메르카데를 자신의 분신이자 동료로 창조했음을 알 수 있다의심의 여지없이 풍습희극 범주에 속하는 이 희곡은 작가가 1842년 자신의 소설들을 총칭한 <인간 희극>처럼 당대의 사회상을 생생하게 해부했다. 이기적이고 메마른 감성을 드러내는 메르카데와 거짓과 사기가 난무하는 암울한 세계를 정치에 빗대어 읊조리는 드라 브리브의 대사는 그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발자크의 <사기꾼>은 마르크스 사상의 단면을 연극으로 옮긴 작품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은 화력을 뿜어대는 거친 기관차가 아니라 희극의 무기인 유쾌한 웃음을 통해 불합리한 사회에 예리한 칼날을 겨눈다. 냉소를 머금은 주인공 메르카데는 진지하고 무거운 갑옷을 떨쳐 버리고, 변장이나 술래잡기 같은 이별과 우연의 만남 같은 희극적 요소들과 함께 소설가인 작가 특유의 짜임새 있는 극적구성, 풍부한 묘사들을 통해 놀랍도록 사실적인 성격의 인물로 창출되었다. 그와 함께 이 작품은 프랑스 희극의 전통적인 장치들을 배제하고, 메르카 데가 현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인물, '고도(Godeau)'라는 이름의 신화적 주인공을 탄생시킨다. 고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뮈엘 베케트(1906~1989)<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의 작중 인물 고도와 기이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기꾼>의 기본적인 테마에는 고도라는 유령의 화신(化身)에 빗댄 '()'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으며, 그의 부재(不在)야말로 이 허구세계를 작동시키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공기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이 희곡은 1936년 앙드레 위공(André Hugon, 1886~1960)에 의해 영화로 연출되었고, 1972년 피에르 프랑크(Pierre Franck) 1984년 장 메예르(Jean Meyer)의 연출로 공연되었다. 최근 2000년대에 접어들어 발자크의 <사기꾼>은 프랑스 무대예술가들의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되어 관객의 호평을 받고 있다. 2007년부터 파리 시립극장(Théâtre de la Ville) 예술감독으로 재임 중인 에마뉘엘 드마르시모타(Emmanuel Demarcy-Mota, 1970~) 2013년 파리 시립극장에 부속된 아베스 소극장(Théâtre des Abbesses)에서 무대화 한 이후 수차례 재해석한 바 있다.

 

오노레 드 발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