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레싱 '에밀리아 갈로티'

clint 2024. 3. 28. 17:57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마지막 베르테르의 주검 옆에 펼쳐져 있던 책으로도 유명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보다 2년 앞서 출간되고 공연되었다.

<에밀리아 갈로티>는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꾸준히 상연되는, 독일 비극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또 18세기 독일문학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작품이다. 이 작품이 단순히 한 가정의 비극을 그린 가정극인가, 아니면 독재자와 절대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정치 극인가 하는 문제가 논쟁의 핵심이다.
<에밀리아>의 소재는 기원전 5세기 로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권력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평민계급의 순결한 처녀 비르기니아에게 반해서 유혹하려 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그녀를 수중에 넣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부당하게 권력을 휘두른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가 딸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딸을 칼로 찔러 죽인다. 비르기니아의 아버지와 약혼자의 종용에 따라 격분한 민중이 봉기를 일으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를 위시한 독재자를 내쫓고 민주적인 제도와 법질서가 회복된다. 비르기니아 전설은 중세부터 유럽 여러 나라 작가에 의해 작품화되었다. 레싱도 일찍부터 이 소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1757년 말 비극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 이래 우여곡절 끝에 근 15년 만인 1772년 초에 완성한다.<에밀리아>는 원래 예정대로 당시 레싱의 고용주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부인의 생일(3월 3일)에 브라운슈바이크 궁정극장에서 초연된다.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명백히 두 집단, 즉 귀족계급과 시민계급으로 나뉜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작은 공국 구아스탈라는 모든 권력이 영주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절대주의 국가다. 지배계급인 귀족이 추구하는 최고 목표는 영주의 총애를 얻어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궁정사회는 권모술수와 가식, 형식과 체면, 그리고 아첨과 아부가 지배하는 사회다.
이외는 달리 오도아르도 가족이 대표하는 시민계급은 정치에서 제외된 피지배계급이므로 시선을 바깥 세계로 돌리지 못하고 자신의 내부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활동 무대는 가정으로 제한된다. 그들은 이 좁은 공간에서 도덕성을 길러 인간적인 성숙을 꾀하는 한편 정치가 이루어지는 궁정사회를 권모술수가 판치는 부도덕한 사회로 간주하여 가능한 한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구아스탈라의 백성으로서 영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의 운명은 그들의 바람이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권력자의 자의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그들의 도피 성향은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무기력 상태를 가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배계층이 부당하게 그들의 영역에 침투하더라도 피지배계급은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단이 없고, 오직 수동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 에밀리아는 엄격한 도덕관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윤리적 • 종교적 원칙만 배웠지, 그것과 다른 세상사나 외부의 지극에 대처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등 자신의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은 키우지 못했다. 그녀는 관능과 같은 감정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죄악시한다. 오도아르도는 딸에게 엄격한 도덕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딸의 독자적인 행동이 실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시민적 도덕교육의 취약점을 드러낸다. 자율적 인간을 지향하는 계몽주의 이상이 미덕의 이름으로 왜곡되는 것이다. 이런 교육을 받았으므로 에밀리아는 순수하기는 하나 미숙한 인간이다. 그녀는 자력으로 자신의 운명을 타개할 능력이 없고, 그 때문에 파멸한다. 결정적인 장면인 5막7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그녀의 도덕성을 위협하는 폭력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그녀 내부에서 나온다. 지금까지 억눌러왔으나 이제 눈뜨기 시작한 관능을 억제할 자신이 없다. 관능을 부도덕한 것으로 보는 그녀의 도덕관이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방지할 길은 죽음뿐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죽음은 믿음이나 신념을 위한 순교가 아니라 시민적 교육의 도덕률에 따른다는 것을 천명하는 최후 수단이다.

 

 

 

 

 

레싱은 시민적 도덕교육의 이상이 죽음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것으로 그림으로써 그 교육을 비판한다. '진정한 폭력'은 에밀리아의 말과는 달리 '유혹'이 아니라, 치욕으로의 추락을 막기 위해 딸을 죽이는 아버지의 행위다. 살인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도덕률,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딸을 죽이고 가정을 파괴하는 도덕 지상주의는 권력을 남용하는 유혹자의 자의보다 나을 것이 없다. 아버지에 의한 딸의 살해는 인간에게 자신의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가르치지 않고, 도덕지상주의를 고수하기 위해 강제하고 감시함으로써 오히려 그 역량의 배양을 가로막는, 도덕성에 집착한 나머지 부자유와 미성숙을 결과하는, 다시 말해 계몽주의 이성 교육 프로그램을 왜곡하는 시민 교육의 좌절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작가가 시민교육의 결점만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것은 아니다. 비극적 파국의 책임은 원래 영주의 절제되지 않은 열정, 그리고 권력을 남용해서라도 그것의 충족을 허용하는 절대주의 체제에 있기 때문에 그 체제 역시 비판된다. 이것은 작품의 구조에도 반영되어 있다. 영주와 마리넬 리가 에밀리아를 손에 넣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1막 6 장 또는 그 음모에 따라 습격이 이루어지고 아피아니가 살해된 뒤부터는, 가족 간의 갈등을 축으로 하는 시민비극이 중단되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대결하는 전혀 다른 비극이 시작된다. 오도아르도는 일이 벌어진 후 시종일관 우유부단하고 수동적인 태도를 보인다. 딸의 자유와 순결을 지키기 위해 능동적으로 딸을 찌른 비르기니우스와는 달리 그는 딸이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권위와 자존심에 의문을 제기하자 마지못해서 딸을 찌른다. 이 두 아버지가 이처럼 상반되게 행동하는 이유, 즉 오도아르도가 “남성적 미덕의 귀감”이라 일컬어지는 것과는 달리 가족의 안전보장이라는 가장의 기본적인 책무마저 이행하지 못하는 원인은 그들이 처한 상이한 시대와 사회체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로마 시대의 자유시민 비르기니우스는 가정에서 절대권을 가지며 권력자의 부당한 처사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고, 그가 딸을 살해한 행위는 민중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오도아르도의 상황은 다르다. 구아스탈라의 절대주의 체제는 제도적으로 피지배계급을 정치에서 배제하여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력한 존재로 만든다.<에밀리아>의 무대는 명목상 16세기의 이탈리아이지만 실제로는 사회체제가 같은 18세기의 독일이다.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오도아르도는 권력자가 자행하는 불의에 자기 가족이 희생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합법을 가장한 통치자의 교활한 음모에 저항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의 무기력한 수동성은 백성을 통치의 대상으로만 보는 절대주의 체제에서 기인한다. 오도아르도는 퇴역 대령이고 경제적으로도 자립 기반이 있는 만큼 일반 대중보다 월등한 지위에 있긴 하지만 정치 적으로는 무력한 백성에 불과하다. 그에게 저항 의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영주가 에밀리아를 부모와 떼어놓으려 하자, 즉 그의 가장으로서의 권한을 제한하려고 하자, 그는 "법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법 위에 군림하는 자 만큼 강력하다”(5막 4장)는 입장을 취해 영주에게 저항할 의지를 보이고 칼을 빼려고 한다. 이것이 아마 그의 남자다운 성격과 우리의 정서에 부합하는 대응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아직 민중의 정치의식이 깨지 않은 당시의 독일에서 혁명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 영주의 불법행위를 "장터에서 큰 소리로 외쳐대겠다" (4막 5장)는 오르시나의 말은 이 가능성을 암시한다.-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도아르도의 저항의지가 영주의 다독거리는 말 한마디에 봄눈 녹듯 사라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작가는 그의 저항의식을 실천 의지가 없는 충동적인 것으로 그린다. 이것은 일반 대중이 배제된 것과 맥을 같이하며, 그 시대 사람들의 정치의식의 한계를 반영한다.

 

 

 

용감한 고급장교 출신인 오도아르도가 수동적으로 부당한 조치에 따를 수 밖에 없는 원인이 절대주의 체제, 즉 통치자가 부도덕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권력을 남용해도 막을 길이 없고, 모든 불행의 단초를 제공한 영주가 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피해자인 오도아르도를 살인범으로 재판하는 정치 구조에 있다면,<에밀리아>는 이런 절대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비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도아르도가 딸을 칼로 찌른 후 자살하지 않고 법의 심관을 받겠다고 자청하는 것은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절대 권력의 폭력성을 폭로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영주가 전형적인 폭군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인간성을 추구하는 계몽군주의 면모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극이 일어나는 것을 통해 절대주의 체제의 위험성이 부각된다.
<에밀리아>는 고삐 풀린 열정의 파괴력, 이성과 감정의 부조화, 계층 간의 갈등을 그림으로써 자율성보다는 강제에 의해 담보되는 시민계급의 도덕률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지배계급의 도덕 불감증을 비판하는 비극이다. 레싱은 이 두 가지 비판을 연결함으로써 시민계급의 해방운동이 자체의 모순과 적대 세력에 의해 좌절할 위기에 처한 역사적 현실을 효과적으로 그려내는 대가다운 면모를 보인다. 아버지가 딸을 죽이는 이 비극의 결말이 미학적 • 도덕적 • 정치적 어느 관점으로도 관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평자가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관점이나 계몽주의 관점에서 보아도 비인간적이다. 주어진 계기와 그에 따른 극단적인 행위가 심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어 자연스럽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세상사를 주관하는 신의 섭리는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에 의한 딸의 살해는 아무도 원치 않은 결과이고, 등장인물 모두 실패하기 때문이다. 만족스럽지 못한, 그래서 열린 결말은 그 의미를 숙고하게 만든다. 파국에 이르게 한두 가지 요소, 즉 자율적 문제해결능력을 저해하는 시민계급의 교육과 권력 남용이 함께 비판된다는 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시민계급은 소극적으로 사적 영역으로 움츠러들어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킬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회생활에 참여하고 지배계층의 간섭과 월권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제가 없는 도덕성, 감성과 이성을 조화시키는 능력, 자율적 문제해결 역량 등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권력자는 감정에 지배당할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통제하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펼쳐야한다. 이 두 가지가 어우러질 때 인간은 한충 더 인간답고 행복하게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에 다가갈 것이다. 이것이 계몽운동의 목표다.

 

 

 

 

작가소개
레싱은 1729년에 태어나 라이프치히 대학교와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한다. 목사인 부친의 뜻에 따라 신학 공부를 시작하나 문학에 끌려 신학자의 길을 접고 일찍이 문필 활동과 언론계에 투신한다. 평생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다가 1781년 눈을 감는다. <에밀리아 갈로티>외에 독일 최초의 시민비극<미스 사라 샘슨>, 독일 3대 희극의 하나로 꼽히는<미나 폰 바른헬룸, 또는 군인의 행운>, 종교 및 민족적 편견의 극복과 관용의 실천을 주제로 하는<현자 나탄〉등이 대표작이다. 그 밖의 주요 저술로는 《비극에 관한 서신교환》, 당대 문하에 관한 평론집《문학 편지》, 미술과 문학의 차이를 규명하고 문학이 상위의 예술임을 주장하는 《라오콘: 미술과 문학의 경계에 관하여》, 1767년 개관해서 1769년 3월 문을 닫을 때까지 전속 평론가로서 함부르크 국민극장 무대에 오른 작품과 공연에 대해 쓴 평론 《함부르크 연극론:», 인류는 끊임없이 발전해 나간다는 계몽주의자 레싱의 종교철학 내지 역사철학이 담긴 《인류의 교육》,《에른스트와 팔크: 프리메이슨 회원을 위한 대화》 등이 있다. 칸트는 <계몽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글에서 계몽주의를 “인간이 자초한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이라고 정의하고, 용기를 내서 너의 이성을 시용하라"는 구호를 제창했다. 이 구호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레싱이 아닌가 생각된다. 레싱은 독일 계몽주의 시대에 문학평론가, 이론가, 작가로서 또 언론인으로서 문화전반에 걸쳐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고, 독일문학이 낙후성을 극복하고 세계문학의 정상권으로 도약하는 준비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독일 최초의 전업 작가, 시민비극의 창조자, 전제 군주제와 교조적 루터교의 비판자, 시민계급의 선구자, 관용과 지혜의 화신 나탄의 창조자, 독일 근대 희곡의 아버지 등으로 칭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