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레싱 '필로타스'

clint 2024. 1. 16. 10:38

 

 

필로타스는 레싱이 1756-59년 사이에 영웅적 소재로써 구상했던 여러 작품 계획 가운데 유일하게 완성된 단막극으로서 7년전쟁의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레싱과 가까운 친구인 프러시아군 장교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그리고 글라임은 詩를 통해 애국사상과 조국에 대한 영웅적 희생정신을 찬양. 고무했을 뿐만 아니라 클라이스트는 7년 전쟁 중에 전사하였다. 그러나 원래 작센 출신인 레싱이 프러시아에 팽배했던 군국주의적 분위기와 애국사상에 휩싸이지 않고 인도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필로타스>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열광적인 애국사상을 찬양하는 듯하는 겉보기와는 달리 실제로는 영웅적 행위의 도덕적 문제성을 폭로하는 반영웅적 희곡이 때문이다. 아들이 아니라 왕자로서 아버지가 아니라 군주에게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제공하기 위한 필로타스의 엄청난 자기희생은 군주로서가 아니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아들의 안전을 위해 어떤 대가도 치르려는 아리데우스 왕의 인간적 결정과 대비되어 비인간적이고 무모하며, 그래서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행위로 비쳐진다. 이는 동정심, 연민을 비극의 요체로 내세워 초인간적인 순교자나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는 비극을 배척한 레싱의 기본입장과 통하는 것이다.

 

 

 

 

『필로타스』에 관한 문학사적 비평은 영웅과 아들라는 양극을 기점으로 진동한다. 한편에는 정치적 맥락에서의 애국주의가 자리하며, 다른 한편에는 개인적 맥락에서의 나르시시즘이 자리한다. 필로타스가 영웅인가 아니면 아들인가에 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논의는 마땅히 영웅에 관한 진정한함의 파악이다. 영웅은 영웅주의에 대립된다. 영웅은 자신의 영웅적 위치 여부에 전적으로 무감하고, 자기희생이라는 영웅적 역할에 결코 매혹되지 않으며, 그의 행위속에 자기 반영적 물음이 일절 부재한다. 영웅주의의 비호 하에 상연되는 자기 희생이라는 연극은 오롯이 대타자의 심연적 질문에 대한 회피이자 은폐일 뿐이다. 때문에 영웅주의는 나르시시즘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영웅을 꿈꾸는 필로타스는 비극적 파토스를 행위 이전에 이미 선취한다.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보여줌으로써, 그는 상상적 이자관계에 위치하는 거울상에 매혹된다.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거울 앞의 자아는 완전하고 통일된 거울 속의 상을 나르시시즘적으로 응시한다. 그의 오인은 결코 인지되지 않는다. 이를 인식하기 위한 대타자, 즉 상징적 질서가 필로타스에게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작품 속에서 부재하지만, 부재의 형태로 그는 역설적으로 편재한다. 필로타스는 상징적 아버지가 아닌 초자아적 아버지의 욕망을 스스로 내면화 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통해 초자아의 메시지에 회신한다. 영웅적 물음에 대한 비영웅적 회답, 바로 나르시시스트로서의 필로타스가 위치하는 지점이다.

 

 

 

역사 속의 필로타스
(고대 그리스어: Φιλώτας, 라틴어: Philotas, ? - 기원전 330년 10월)는 알렉산더 3세를 모신 마케도니아 왕국의 장군 중 하나로 중신 파르메니온의 아들이다. 필로타스는 알렉산더 3세를 가장 오래 수행한 장군 중 한 명이며, 마케도니아 군에서 가장 중요한 8개의 지대(각각 225명의 기수)인 기마부대로 편성된 기마군단의 총사령관이었다. 기원전 334년, 그라니코스 전투 이후 밀레투스 공방전에서 필로타스는 밀레투스 항구를 포위한 페르시아 함대의 착안을 방해하여 적의 침공을 막았다. 그러나 동방원정에 종군하던 중 필로타스는 젊은 장교들이 기획한 알렉산더 3세 암살 미수 사건의 주모자로 그 이름이 올랐다. 알렉산더 3세는 일단 필로타스를 용서했지만, 그때 필로타스의 의형제로부터 새로운 증언이 나오면서 다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유죄를 선고 받고 처형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뒤에서 알렉산더 3세를 비판하고 있었다는 밀고를 받은 알렉산더 3세로부터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암살 미수 사건의 주모자라는 오명을 쓰고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이후 그의 아버지 파르메니온도 알렉산더 3세에 의해 암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