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게오르크 카이저 '산호'

clint 2023. 12. 18. 09:51

 

 

게오르크 카이저는 1918년을 전후한 사회개혁에 관한 드라마들에서 사회질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작가의 목표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고 순수한 이념적인 것이다. 즉 카이저에겐 사회형태의 물질적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윤리적 변화가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일차적으로 인간 개개인의 변화를 추구하고, 나아가 이에 뒤따르는 사회의 변화 및 개혁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회 개혁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산호>, <가스> 그리고 <가스2>로 구성된 <가스 3부작>으로, 카이저는 이들 3부작에 나타난 개개인의 운명 즉 억만장자, 억만장자 아들, 억만장자 노동자의 운명을 통해 현대산업사회의 인간이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첫 번째 작품인 <산호>의 주제는 아직 순수한 개인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중심인물인 억만장자는 가난과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하나의 집념으로 대기업 최고경영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끊임없는 도피의 인생을 영위하고 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미 어린 시절에 사회의 고난과 궁핍을 체험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노동으로 피폐해진 몸으로 회사에서 해고당한 후 마지막 임금을 갖고서 더 이상 양육할 수 없는 가족의 곁을 떠난다. 이날 밤 그의 어머니는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러한 상황에 부딪쳐 소년이었던 억만장자는 심한 충격을 받는다. 이후 불행과 궁핍으로부터의 도피가 그의 인생철학이 되었으며, 그 결과로 억만장자가 된 것이다. 이제 그는 이렇게 일으킨 재산을 자신과 어린 시절에 체험했던 공포 사이에 둠으로써 가난과 불 행에 대한 기억을 떨쳐 버리고자 한다. 그는 한 달에 한번 "열린 목요일"에 불행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재화를 나누어 주지만 결코 이들을 직접 만나지는 않는다. 그는 외관상 자신을 꼭 닮은, 단지 시계줄에 달린 산호에 의해서만 구별되는 비서로 하여금 그 역할을 수행하게 한다. 비서는 자신의 개성이 전혀 없는, 억만장자로부터 분열된 존재로서 억만장자가 불행과 마주치는 곳이면 어디에나 등장해 그를 대신하며, 동시에 그를 현실의 카오스로부터 보호하는 외적 분신역할을 한다. 억만장자는 또한 자식들에게 어떠한 불행도 근접치 못하게 하며, 아들을 "태양이 비치는 해안", 즉 낙원에서 밝은 생을 살게 한다. 아들은 억만장자의 이상적 자아를 대신하는 내적 분신이기도 하다. 억만장자는 아들을 통해 자신이 갖지 못했던 행복한 청춘을 살고자 한다. 이러한 외적, 내적 분신들을 통해 그는 현실에서 벗어나 아무런 고통과 어려움이 존재하지 않는 주관적 세계로 도피코자 한다.

 

 

 

그러나 부()의 바리케이드도 현실과 현실에 대한 공포를 지속적으로 멀리할 수는 없다. 억만장자의 아들은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호화 여객선인 '바다의 자유'호를 타고 인생을 즐기는 대신 석탄을 나르는 화물선에서 화부로 일하면서 가난하고 불행한 자들의 생활을 직접 체험한다. 여기서 그는 내면의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인간이 되고자 함으로써 아버지의 의도와 정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있은 다음에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인 작업조건을 항의하며 농성을 벌이자 억만장자는 작업을 즉각 재개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해고하겠다고 위협한다. 이에 구세대의 인간과 새로운 인간 사이의 마찰이 일어난다. 아들은 아버지를 살인자라 부르면서 자신은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겠다며 아버지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절망한 억만장자는 탈출구를 찾으며 이렇게 소리친다. “누가 내게 첫날부터 밝은 자기 인생을 줄 것인가?! 아래로 내려간, 아들에게선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어! (...) 난 누구의 내면으로 들어가 이 불안과 엄청난 혼란을 떨쳐 버릴 것인가?! 누가 윤택하고 훌륭한 인생을 갖고 있는 가나의 인생 대신에?!”

 

 

 

그는 다른 인간의 영혼으로 도피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유복하고 평화로운 과거를 지닌 자기 비서를 사살하고, 산호와 함께 비서의 행복했던 소년 시절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 대가로 그는 자신의 생명을 치러야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심오한 행복을 얻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다르게 된 낙원에 대한 상징이 바로 인간을 생의 고뇌에서 해방시켜 주는 산호인 것이다. 즉 산호는 억만장자에게는 가난과 불행, 공포와 고통이 없는 원초적인 삶을 의미하며, 동경하는 낙원의 고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산호로의 도피가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빈부 갈등이란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일 수는 없다. 기이한 개인의 운명, 대기업주의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산호로의 환상적 도피는 시선을 사회문제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다. 따라서 드라마 의 핵심문제에 대한 해결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 해결은 사회적 의무를 의식하고 있는 억만장자 아들의 새로운 인간으로의 변화 속에서 단지 암시되고 있을 뿐이다. 카이저는 인간의 개혁과 이에 따른 사회개혁에 대한 희망을 다시 다음 세대에 걸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