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로제 비트라크 '빅토르 혹은 권좌의 아이들'

clint 2023. 10. 12. 07:08

 

비트라크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빅토르 혹은 권좌의 아이들>은 부모의 불륜을 고발하는 아이들이 주인공으로서 비트라크는 이들을 통해 가족이라는 것이 더 이상 원래의 순수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 못함을 보여준다. 또한 더 이상 불륜의 관계를 지속하지 않겠다고 어른들이 신과 아이들 앞에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빅토르의 복통이 계속되는 것은 종교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해 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장군이 이제 막 아홉 살이 된 빅토르의 말 타기 놀이의 상대로 전락하는 것은 군대나 맹목적 애국심에 대한 작가의 냉소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빼앗긴 알자스-로렌 지방을 되찾아야 한다는 프랑스 '황금시대(la Belle Epoque)'의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의 정서에 반하는 것인 반면 전쟁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던 취리히의 다다이스트들과 같은 지식인들 혹은 예술가들의 견해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극은 가족, 종교, 국가, 애국심과 같은 기존 가치에 대한 거부와 반항을 보여주며, 이것은 다다, 초현실주의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1920년대 파리에서 이 두 전위적 예술 운동에 가담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비트라크는 빅토르라는 아홉 살 먹은 아이를 통해 가족의 모순과 종교의 무력함. 맹목적인 애국심을 고발한다. 여기에서 아홉이라는 말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불어로 아홉을 뜻하는 'neuf는 '새롭다'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아홉 살 생일을 맞은 빅토르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지만 어른들의 모순을 꿰뚫어 보고 있는 그는 흉내 내기와 같은 연극 놀이와 상징적인 의미가 함축된 언어를 통해 어른들을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간다.

 

 

 

 

부르주아 가정의 위선과 허영 또한 비난의 대상이다. 빅토르는 자신의 집에서 바카라 산 크리스털 그릇들이 전시용으로 쓰이고 있음을 고발하고 나아가 부르주아 계층의 상징인 세브르 산의 커다란 화병을 깨뜨린다. 이것은 기존 가치의 전복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빅토르가 이 화병을 '다다의 알(coco de dada)'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이 알(화병)을 깨뜨리는 것은 기존 가치의 전복을 추구하는 다다가 이 알을 깨고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녀 릴리가 “이 아이는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아"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아무 부러울 것 없는 아름답고 부유한 여인인 이다 모르트마르트가 끊임없이 썩은 방귀 냄새를 풍기는 것 역시 이러한 부르주아 사회의 부패한 현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기존 가치에 대한 반항과 전복은 웃음과 울음의 혼돈에서도 나타난다. 비트라크가 그의 시집《죽음의 인식》에서 파트리샤가 기쁠때 울고 슬플 때 웃는다고 노래하고 있듯이, 에밀리의 웃음과 울음 역시 도치되어 있다. 자리(Jarry)의 '서로 상반된 것들의 동질성'을 확인하게 하는 이러한 웃음과 울음의 혼돈은 인간의 감정과 표현의 모순, 말과 행동의 모순, 결국 인간자체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트라크는 또한 인간 개개인은 모순된 양면 또는 다면을 갖고 있어서 어떤 한 면이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며, 나아가 인간성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동일 인물인 에밀리와 포멜 부인이 서로 마주 보고 살면 서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에밀리 자신이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의 자아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유일하고도 불변하는 자아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자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이다가 에밀리에게서 자신의 옛 친구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인간성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비트라크는 언어에 대해 자리가 시도한 것과 유사한 태도를 보여준다. 언어의 해체를 통해 관습화되어 공허해진 언어를 고발하고, 새로운 변형을 통해 신선한 자극을 유도한다. 그는 자리 식으로 단어의 변형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비어를 사용함으로써 부르주아적 가치에 반항하며, 관습적인 표현을 바꾸어놓고, 의도적인 오류를 범하며, 차라와 브르통처럼 언어의 분절과 뒤틀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제 막 아홉 살 생일을 맞은 빅토르는 하녀가 “무슨 일이지?"라고 묻는 말에 “난 아홉 살이야. 난 아빠와 엄마, 그리고 하녀가 있지. 그리고 휘발유로 가동하는 배도 있고…”와 같이 글자 그대로 대답함으로써 관습화되고 상투적이 된 언어를 고발한다. 비트라크는 이처럼 관습적인 언어 사용을 비판하고, 나아가 단어의 해체와 새로운 배합을 통해 습관적이고 공허한 언어 시용으로부터 벗어나고자한다. 마지막으로 이 극에서 시용된 두드러진 연극적 방식으로 흉내 내기가 있다. 아홉 살 생일을 맞은 주인공 빅토르는 아버지 샤를이 친구 에스테르의 엄마 테레즈와 불륜 관계에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것을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일종의 극중극 형식인 흉내 내기를 통해 폭로한다. 에스테르 역시 샤를이 자신의 집에 왔을 때 목격한 테레즈와 샤를 사이의 은밀한 광경을 이들 앞에서 흉내 낸다. 이들의 흉내 내기는 당사자들을 당황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샤를의 아내 에밀리를 경악하게 하고, 테레즈의 남편 앙투안 마뇨의 광기를 유발해 결국엔 자살로 이어지게 한다. 아이들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눈을 통해 어른들의 위선과 가식이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빅토르는 샤를과 테레즈의 불륜 관계 외에도 샤를이 하녀 릴리에게 치근댄다는 사실을 알고 샤를의 말과 행동을 똑같이 흉내 냄으로써 하녀를 놀라게 한다. 이처럼 이 극에는 삶의 모순과 비합리를 인정했던 다다 와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 통용되는 꿈의 세계를 탐색 했던 초현실주의의 이념들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극에서 발견되는 기존 가치에 대한 반항, 모순적인 상황들, 언어에 대한 실험, 논리적이지 못한 대화 등은 바로 50년대 부조리극을 예고하는 것이다. 한편 비트라크의 후기사실주의 극은 기존 가치에 대한 반항이나 꿈과 같은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세계의 묘사가 줄어든 반면 보다 가벼운 주제를 지닌 불바르극적인 성격이 강해짐으로써 초기의 작품과는 그 성격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하지만 극중극과 같은 연극적인 놀이와 비언어적인 표현 수단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비트라크가 전통적인 표현 양식과는 다른 새로운 연극 언어를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소개
로제 비트라크(Roger Vitrac, 1899~1952)는 프랑스 다다-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극작가로서 기존의 문학적 연극을 탈피하고 새로운 형태의 연극을 만들고자 한 시인이자 극작가다. 그는 1899년 11월 17일 프랑스 중부의 로트(Lot) 지역에 있는 팽사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2년 뒤에 가족이 그곳에서 멀지 않은 수이야크로 이사하게 됨에 따라 비트라크는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무절제한 생활과 도박으로 거의 파산 지경이 된 그의 가족은 1911년 다시 파리로 이사한다.<빅토르 혹은 권좌의 아이들>과<아버지의 검>은 바로 작가의 어린 시절을 소재로 하여 쓴 작품들로 전자는 어른들의 불륜을 아이들의 눈을 통해 고발하고 있으며, 후자는 어린 시절 부모를 둘러싼 시골 부르주아들의 풍속도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비트라크는 또 그가 15년 동안 살았던 파리의 팔레스트르 가(街)에서 목격한 그의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를<트라팔가르 전투>에 묘사하고 있다. 1920년대 초 학생장교 시절 비트라크는 르네 크르벨이나 자크 바동 등과 함께 다다를 접하고, 뒤이어 앙드레 브르통을 따라 무의식과 꿈의 탐구를 기반으로 하는 초현실주의 그룹에 합류한다. 브르통은 1924년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절대적인 초현실주의를 실천하는 열아홉 명의 인물 중에 비트라크를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곧 브르통과 불화하게 됨으로써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배제된 비트라크는 1926년 9월 앙토냉 아르토, 로베르 아롱과 함께 '알프레드 자리 극단<Le Tlieatre Alfred Jarry)'을 설립한다. 프랑스 부조리극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자리의 이름을 표방함으로써 이들은 기존의 연극과는 차별되는 새로운 연극을 할 것임을 시사한다. 다다 및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고 이어 '알프레드 자리극단'을 만들어 활동했던 시기(1921~1930)에 쓰인 비트라크의 초기 작품들은 세기 초의 이 두 전위 운동의 이념적, 미학적 특성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작품들은 종교, 애국심, 가족과 같은 기존가치의 거부, 서구의 전통적인 합리주의적, 논리적, 이분법적 사고 및 언어에 대한문제 제기, 그리고 인간과 삶의 모순 및 꿈과 같은 비합리적인 세계의 묘사로 특징지어진다. 이 시기의 작품들로는<화가>,<함정 아가씨>,,<독약>,<무료입장>,<사랑의 신비>,<하루살이>,<빅토르 혹은 권좌의 아이들>등이 있다.
비트라크의 후기 작품들은 이전의 작품들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초기의 꿈과 환상 같은 비 합리와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추구에서 일상적인 삶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비트라크가 초현실주의 그룹과의 단절과'알프레드 자리 극단의 해체 이후 대중들이 보다 가까이하기 쉬운 연극으로 다가갔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의 작품들로는<트라팔가르 전투>,<밤늑대>,<행상인>,<바닷가의 아가씨들>,<싸움>,<메도르>,<아버지의 검>,<선고받은 자〉,〈운명은 馬을 바꾼다.>등이 있으며, 이들 작품에서는 초기의 반항적이고 파괴적인 면은 많이 사라지고 보다 가볍고 기분 전환적인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후기 작품에서도 흉내 내기, 역할 바꾸기 같은 여러 가지 연극적인 놀이 및 비언어적인 요소들을 풍부하게 사용하고 있어 비트라크가 과거의 문학적인 연극과는 구별되는 총체 연극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비트라크는 자리, 아폴리네르 등과 함께 프랑스 전위극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서 50년대 전위극 작가들, 특히 이오네스코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제 이오네스코의 극에서는 비트라크의 극에서와 유사한 표현과 상황을 적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요컨대 프랑스의 부조리극이 자리로부터 시작되어 이오네스코와 베케트로 이어진다고 할 때 그 중간에 위치하는 작가가 비트라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Roger Vitr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