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멤논 家의 비극을 바탕으로 아이스킬로스, 유진 오닐의 작품들에 깊은 영향을 받아 일본제국시대를 배경으로 재창작한 작품이다.
일제 패망 직전의 지방 소도시. 조선 각지, 만주지방을 돌아다니며 징병 지원을 독려하던 최인식(아가멤논)이 거대한 저택으로 들어선다. 일왕에 자작 작위를 받은 터라 위풍당당한 풍채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최경진(오레스테스)마저 학도병으로 보낸 그다. 일본인보다 더 높은 충성심이 갸륵할 정도다. 아내 윤정혜(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들을 전쟁터로 내몬 남편을 증오할 따름이다. 최인석의 달콤한 휴식도 잠깐, 윤정혜는 정부 천태경(아이기스토스)과 함께 남편을 죽이고 만다. 자신의 불륜을 목격한 딸 최승림(엘렉트라)의 의심은 강하게 조여 오고, 윤정혜는 결국 천태경과 함께 떠난다. 도피 행각은 미얀마 정글에서 돌아온 최경진과 어머니 행적을 좇던 최승림에 발목 잡힌다. 실랑이 끝에 정부였던 천태경이 아들의 총에 쓰러지자, 윤정혜는 살아갈 이유를 잃은 듯 자살을 선택한다. … 1년 뒤. 최승림은 아버지 최인식이 받았던 귀족 자리를 동생 최경진에게 물려주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전쟁 후유증과 천태경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던 최경진은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아편이 없으면 일상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중독된 상태. 일제 부역자로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는 최승림과 현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최경진의 갈등은 깊어만 간다. 이에 더해 최경진은 집안의 살인과 불륜, 패륜 등을 세상에 알리려고 한다.
<먼지-참회하는 오레스테스>은 친일파 집안이 스스로 욕망에 갇혀 자멸해 가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작품을 정의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마태복음 23:27 구절이 절로 겹친다. 극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당한 처참한 고난도 녹아 있다. 미얀마 지역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가 일본군 강압에 못 이겨 부비트랩을 여는 대목은 차마 마주할 수 없는 아픔이다. 장면 곳곳 애달픈 분위기를 이끈 음악은 때론 절제된 소리로 슬픔을 자아낸다. 무대 배경에는 강제노역으로 폭행과 굶주림에 시달렸던 조선인, 꽃다운 나이에 끌려갔던 소녀들, 그리고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 장면이 교차하며 펼쳐진다.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보여줄 시각적 효과로 더할 나위 없다. 집안에 숨겨진 온갖 추악한 실상을 알게 된 열여덟 최경진. 집안의 모든 죄를 뒤집어쓴 듯 아버지를 부르짖으며 흘리는 눈물은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등장인물들을 통해 영원히 감춰 놓고 싶어 했던,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던 비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백하룡 작가. 작품은 세상 누구보다 존귀한 척하나 발끝까지 부패한 인물을 통해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현시대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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