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다양성을 함축한 소우주인 이 카미노 리얼의 무대를 극중인물이 방문하게 되면서 극이 진행된다.
막이 오르면서 가장 먼저 무대 위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미 관객들에게 그 이름이 친숙한 돈키호테다. 그는 여행 중 카미노 리얼에 이르게 되는데, 그가 광장에 도착하여 일행인 산초와 대화를 나누는 첫 장면을 통해 이 극의 시간과 공간의 일상적 의미는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멀어진 영광의 과거가 무대 위의 초라한 현재와 중첩되며, 'distance'와 'nobility'를 상징하는 푸른색이 '끊임없이 용해되고 변형되는 꿈의 이미지'로 최고 낭만주의자 돈키호테의 꿈을 대변해준다. 그는 빛 바랜 푸른 리본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스스로 갔던 길과 가지 않은 길, 녹색의 나라 등을 기억하고, '진실', '용기', '예의'같은 말들에 반응하며 마음속 영혼의 나라를 상기하는 사람이다. 동행하던 산초가 그를 버릴 때 돈키호테의 대사는 “모든 사람이 외로울 때 혼자만 외로워하는 건 이기적인 일이지."이다. 이는 광장의 외로움을 느낀 주인공이 이기적인 현실을 초월하여 말한 것으로, 작가가 이 극의 핵심이라고 지적한 대사이다. 돈키호테 외에도 이 극에는 카사노바, 바이론 등의 역사나 문학에서 유명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이 극의 무대가 '지금-여기'의 가시적인 세계에 국한되지 않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세계로 또다른 인물 킬로이가 들어오는데, 그는 2차대전의 우상을 딴 이름을 가진, 지극히 미국적이고 '나이브'한 미국의 'everyman'으로 그려진다. 킬로이를 2차대전 당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Kiloy Was Here."라는 슬로건의 의인화로 보건, 현대의 보통사람으로 보건, 그는 "어린애의 머리만한 심장을 가진" 희망이자 낙관주의의 화신처럼 나타난다.
이 극의 중심인물이면서도 언제나 잘 속는 놀림감이며 자신이 요구하는 것은 적고 으레 당하기만 하면서도 결코 희망을 버리는 일이 없는 인물인 이 순진한 국외자가 이 마른 샘에 도착해서 억압적이고 메마른 규율에 도전하여 생명의 분수를 다시 살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은 극에 하나의 문제이자 전기를 제공한다.

낭만적인 항구도시와도 같은 풍미의 이면에, 이 곳에서는 '형제'라든가 '사랑' 등의 말이 금지되고, 보이지 않는 인물 'Generalissimo'(총통)의 직속인 굿맨이 경찰과 '거리청소부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비인간적인 통제를 행하고 있다. 사람의 시체를 수거해 실험실로 나르는 거리청소부들을 통해 이 광장에서 인명의 존귀함이나 인간의 존엄성 등은 존재 하지 않는 개념임이 드러난다. 이 극에서 굿맨은, 낭만적인 항구 도시의 화려한 호텔 Siete Mares의 주인이자, 잔혹한 압제의 수괴, 그리고 이 극의 극중 연출가이다. 사업가를 풍자한 인물로 냉정한 자본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며, 이 극이 진행되어가는 과정, 즉 'Block'의 수를 말하면서 이 광장에 등장하고 퇴장하는 인물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극중극의 연출자가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그는 사람들을 도둑, 창녀, 거지, 게으름뱅이 등으로 보며, 'hermano'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폭동의 신호로 간주하여 무정부 정신으로서의 독립의 신호가 포착되면 모두 전멸시켜 버리는 가혹한 통치자이기도 하다. 굿맨에게는 멸시의 대상인 무대 오른편의 막다른 곳에도, 나름대로 꿈꾸는 사람들, 연인들, 절망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포주와 창녀 등이 등장한다. 이 하층민 거리에는 집시의 가게, 전당포, 싸구려 모텔 등이 있는데, 이 거리를 주로 움직이는 인물은 래트와 집시, 그녀의 딸 에스메랄다, 그녀의 아들 압둘라 등이다. 작가의 인물들이 언제나 그렇듯이, 나약하여 좌절과 패배 속에 살면서도 무한한 욕망이 묻어나는 삶의 혼돈 속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탐색하는 극중인물들은 대부분 사회의 부적응아들이면서도 여전히 관객의 흥미를 사로잡는 매력을 지닌다. 황금 거위가 끝없이 알을 낳고 동화 속의 수프 그릇이 저절로 자꾸자꾸 채워지는 것만큼이나 자주 처녀가 되곤 하는 집시의 딸 에스메랄다는 영묘해 보이다 가도 세속적인 요염한 여인으로 변신하는 모습이 사랑스럽게 그려진다. 그녀의 사랑은 킬로이를 새로운 차원의 감동적인 미묘함으로 인도한다. 그녀와 킬로이가 "I am sincere."(난 진지해)를 속삭이는 장면은 이 극의 가장 감미로운 장면 중의 하나이자 하나의 이미지로 관객에게 다가가며, “또 다시 실패하기 쉬운 두 번 실패한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소서”라는 에스메랄다의 기도는 심금을 울리기까지 한다.

이와 유사한 또 하나의 플롯은,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도 새로운 뭔가를 갈구하는 마가릿과 늙어 쇠잔해가면서도 사랑의 갈망을 간직하고 있는 쟈끄(Jacques Casanova) 간의 로맨스이다. 냉혹하고 살벌한 비인간성과 폭력의 장면에 곁들여진 이러한 차분한 온화함과 페이소스는 '늙고 지친 공작' Casanova의 최후를 장식하려는 축제의 장면과도 같이 그려진다. 마가릿이 “새장에 갇힌 새들은 서로를 받아들이지만 그들이 정작 열망하는 것은 날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카미노 리얼에 머물고 있는 동안 쟈끄와 나눈 '작은 사랑의 위안'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많은 극에서 Williams는 새와 나르는 존재를 등장시키는데, 새장은 새에게는 감금뿐 아니라 안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Williams의 인물들은 늘 어떻게 안에서 나가야 되는지를 묻곤 한다. 자기 감금을 풀고 광장 너머에 있는 '미지의 땅'으로 나설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욕망이 있고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며 고통을 아는 이들이다. Camino Real을 탈출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탈주'라는 비행기를 타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아치를 통해 광장을 빠져나가 '미지의 땅'이라는 사막을 통과해 나가는 길이다. 그런데 비행기는 예정도 없이 부정기적으로 운항하는 데다가 너무 잠깐 착륙하기 때문에 타기가 어렵고, 사막을 향해 무작정 길을 떠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보다 퇴폐적인 주민들은 불확실한 비행기의 도착을 피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지만 미지의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꺼이 성벽을 넘어 미지의 땅으로 모험해 들어가기도 한다.
바이론경은 사막 길을 택하고 젊은 미국인 킬로이도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권투챔피언으로 얻은 황금글러브를 가지고 떠난 킬로이는 곧 주눅이 들어 되돌아온다. 그도 결국 다른 사람들처럼 굿맨 치하의 복종 상태에 이른다. 그후 도주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황금 글러브마저 저당잡히고 자신을 흠모의 대상으로 선택한 에스메랄다와 함께 한 킬로이는, 문밖에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거리청소부를 공격하다 쓰러진다. 자신의 죽음과 영적 갱생을 상징하는 장면에서 킬로이는 자신의 시체가 해부되는 광경을 지켜본다. 자신의 육신에서 어린애 머리만한 딴딴한 황금의 심장이 떼어 내어지자 킬로이는 그것을 낚아채어 달아난다. 달아나던 그가 막 잠에서 깨어난 돈키호테를 만나면서 그동안 메말라 있던 분수는 이제 물을 내뿜기 시작한다. 자칭 "수치를 모르는 낭만적 어리석음의 희생자"이자 몽상가인 돈키호테만이 바깥세계와 접촉할 수 있으므로 결국 킬로이는 그와 함께 아치문을 지나 사막으로 간다. 킬로이와 돈키호테가 길 너머로 떠나려 할 때, '고상함의 색깔 Blue'를 외치며 개막대사를 했던 돈키호테가 뒤를 돌아보며 환희에 차서 외친다; "산에 있는 바이올렛 꽃이 드디어 바위를 깨뜨렸다"고 수세기 전 신개척지 남미로 통하는 카미노 리얼이라는 길목의 원형적 인물들로 이루어진 한 '야생동물(Menagerie)우리'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의 욕망과 고통이 울려 퍼지는 소리와 이미저리, 그리고 비상하는 판타지가 함께 날아오르며 창조한 독특한 무대의 우화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카미노 리얼(Camino Real)은 Tennessee Williams의 여러 극들 가운데 가장 공연이 적은 극 중의 하나이며, 그러다 보니 일반 대중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극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아직 공연이 안 되었다. 1953년 이 극이 초연됐을 때 비평가와 관객은 혼돈했으며, 그것은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초연 당시 Broadway National Theatre의 무대에서 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곳을 탈출하고자 안절부절 못했던 사람들은 Camino Real의 막다른 구역에 사는 시민들만이 아니었다. 혼돈스럽고 당혹스러운 관객들도 또한 극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는 한 극평은 당시의 반응을 실감 있게 전해준다. 극을 끝까지 지켜본 비평가들 중에서도 Walter Kerr같은 사람은 “이 시대 최고의 작가가 쓴 최악의 극”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 후 LA와 뉴욕에서 공연되면서 그 무대가 그리고 있는 세상의 광경을 비로소 관객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고, Clive Barns는 뉴욕 타임스의 극평에서 “카미노 리얼이 Williams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들이 옳다고 믿는다. 이 극은 인간의 영혼을 뚫고 나오는 연극이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사실 이 작품은 작가의 생애에서 전성기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 극의 브로드웨이 초연이 1953년인데, 그의 가장 대표작인 3작품 중 The Glass Menagerie가 1945년, A Streetcar Named Desire가 1947년, 그리고 Cat on a Hot Tin Roof가 1955년에 나왔으니, Camino Real은 작가가 갈채 속에서 발표한 야심작이라고 할 수 있다. Williams는 이 극을 매우 사랑한 나머지 이 극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한다. 이 극은 1948년에 쓴 자신의 단막극 『Ten Blocks on the Camino Real』을 장막으로 다시 발전시킨 작품으로, 현실적이면서, 환상인 듯한 세계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인간의 내면적 진실과 삶의 유기적 관계를 표현하고자 애쓴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나, 일반적 개념의 논리나 일상적인 시간과 공간의 척도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Elia Kazan이 연출한 브로드웨이 초연의 Camino Real에 부쳐 쓴 작가의 글이 New York Times의 1953년 3월 15일 일요일 판에 실렸고, 이를 약간 수정한 전문이 책자화 된 Camino Real의 서문으로 나와 있는데, 여기서 작가는 이 극을 통해 가시적인 실존 영역 너머에 있는 정교한 우화요 하나의 판타지로서 전혀 새로운 또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켰노라고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하나의 극작품을 만든다는 건 마치 현재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세계가 붕괴되는 사이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과도 같다. 나의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이 극 <카미노 리얼>은 다른 세계, 즉 하나의 분리된 존재를 구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 세계도 지금 사는 세계와 같은 개념의 세계요, 사람들도 대개는 어떤 기본적인 태도와 속성을 지닌 원형적인 인물들이지만 말이다….. 연극의 관습은 특정 장소나 특정 시간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인지한다면 연극이란 정교한 알레고리가 되며, 카미노 리얼의 판타지에서 얻어낼 수 있는 철학적 의미도 연극의 기본요소에 기초한 것이 된다….”
이러한 판타지의 무대를 위해 Williams는 또한 “관객들에게 뭔가 거칠고 구속되지 않는 것 같은 감각, 즉 끊임없이 용해되고 변형되는 꿈의 이미지 같은 것"을 주고자 했다고 다음 같이 말한다.
“엘리아 카잔이 이 일에 끌린 것도 주로 같은 이유에서 일 거라고 믿는다. 즉 형식의 자유와 유동성 말이다. 우리는 작업을 하면서 '비상'이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얘기하곤 했다. 마치 이 극이 나르려고 하는 충동만을 추상적으로 보여주는 극이라도 되는 것처럼...”

작가는 이 극에서 사실적인 틀에 머물지 않고 꿈과 같이 자유로운 모험의 무대를 구축해 보고자 시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만져질 것 같지 않은 무대는 Ganz가 지적하듯 현실과 지옥의 중간 지점 어딘가에서 이루어지는 어두운 모험일 수도 있는데, 이 안에서는 현실과 허구의 인물들이 서 로 얽혀서 삶을 껴안고 희망을 찾으며 절망을 받아들이고 죽음에 다가가는 모습들이 시간과 국경을 초월한 무대를 통해 그려진다. 이 극이 이렇게 사실주의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은 바로 이 극에 대한 상반된 평가의 주된 원인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1953년 3월 Martin Beck Theatre 공연에 대한 평에서 Eric Bently는 “Williams의 천재적 요소는 언제나 그의 사실주의에 있다고 보는데, Camino Real은 온통 비천재적 요소만 보여주고 있고... 사실주의인 척조차도 하지 않는다"고 평했다. 반면에 이 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상상력으로 충만한 극이며, 낭만적이고 지극히 시적이며 현대적이다"라고 평했다. 이 대조적인 평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이 극을 사실적인 차원에서 보려고 할 땐 긍정적인 평가를 기대하기가 어렵고, 이 극이 가지고 있는 낭만적이고 시적인 특성을 인정하고 바라볼 때 진가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작가 자신도 7년 후 New York Times(1960.5.1)의 Arthur Gelb와의 인터뷰에서 Camino Real에 대해 “삶에 대한 낭만적 태도를 호소한 것이며, 혹은 존엄하고 신비로운 의미의 종교적 태도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변호하고 있다.
작품의 후기에서 Williams는 “연극의 원고는 지어지지 않은 집의 청사진과 다를 게 없다…" 면서 "연극은 색채, 우아함과 영적 작용에 의한 공중부양, 움직이는 구조, 구름 속에서 번쩍이는 빛처럼 생동하는 상호작용 같은 것이며, 종이에 씌어진 글자들이 아니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이 작품의 이상적인 연출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다시 말하면 이 극은 시적이 아닌 문자 그대로의 연출, “색채와 우아함과 영적작용에 의한 공중부양"을 가미한 연출이 아닌 현실적인 연출으로는 나름의 진가를 표현해 낼 수가 없는 극이라고 할 수 있다. 초연에서의 Elia Kazan의 연출과 무대,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당시의 관객과 비평가들이 혼돈스러워 한 이유가 드러난다. 서정적이고 시적인 연극이 사실적인 연출로 무대 위에 올려진 것이다. 몇년 후 카잔은 그의 자서전에서 Eli Wallach만 빼고는 배우들이 역할에 적합치 못했음을 지적하며, 배우들이 사실적 기교의 훈련에 익숙했으며 그런 점에서 자신도 마찬가지였다"고 인정했다. 그 후 1970년 Vivian Beaumont Theatre에서의 공연에 대해 1월 9일 New York Times에서 Clive Barnes는 "아낌없이 낭비한 천재성을 지닌... 미국 시인의 상징적 자화상이며,... 천재적인 시적 비전이 있는 극..."이라 평하고 있다.

작가는 이 극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해석을 경계하면서, 이 극을 통해 꿈과 같은 이미지에 기초한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적합한 상징 기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는 타협하고 싶지 않고, 이 극에 대해 어떤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시라고 주장하는 시인들이 있다. 연극은 시가 아니고, 시극이라 해도 시와 같은 특권은 물론 없다. 그렇지만 『카미노 리얼』에 대해 논리학자 같은 융통성 없는 요구를 한다는 것은 양쪽 <극작품 자체와,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일이 못된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정신세계에는 거대한 이미지의 어휘가 존재하는데, 난 모든 인간의 의사소통이 꿈과 같은 이러한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연극에서 상징을 사용하는 유일하고도 당연한 목적은, 단어로 말하는 것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단순하게, 그리고 더욱 아름답게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의 상징과 이미지는 반드시 현실의 삶에 기초 하는 연극 언어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작가 자신은 이러한 구체적인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를 나열하는 것은 나는 혐오한다.. 찌그러진 여행가방이 호화호텔의 발코니에서 내동댕이쳐진다. 가방이 한 예로, 카사노바가 송금수표로 제대로 돈을 치를 수 없게 되자 그의 아직 공중에 떠있을 때 그는 소리친다: “조심해요, 그 안에-" -그리곤 이어 가방이 길바닥에 떨어지자 "깨지기 쉬운 기념품이 들어있는데 "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상징이 아닐까 한다..”

결국 Williams가 무대 위에 드러내는 우리 시대 문화의 무자비한 편린들과 또한 그가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천착하는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외로움"이라는 주제를 성공적으로 'dream-vision structure'에 맞추어 내기 위한 상징의 '거대한 어휘’가 이 극에 대한 찬사의 공통분모가 된다. New York World Telegram에 실린 “Camino Real은 찬란하고도 선동적인 모험이다. 이 극은 거친 꿈의 착란적 고통과 환희를 우리의 모든 감각으로 만질 수 있게 했다"는 극평도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거친 꿈이 펼쳐지는 무대의 제목으로 쓰인 Camino Real은 본래 Santa Fe에서 멕시코의 치와와(Chihuahua)에 이르는 royal highway로, 16세 기 스페인 사람들이 당시 'New Spain'으로 알려졌던 멕시코의 부(副)수도(首都)로 이르는 길에 붙였던 이름이다. 그런데 작가의 극에서 이 길은 막다른 길로, 무대는 사막 속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어느 도시이며, "탠지어, 하바나, 베라크루즈, 카사블랑카, 상하이, 뉴올리언스 같은 곳과 닮은 듯한 열대 항구인, 막연히 남미의 어느 한 지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곳의 한가운데에 광장이 있고 광장의 가운데에는 물이 말라버린지 오래인 '인간성의 샘'이 있다. 무대의 왼편과 오른편으로 나뉘어, 왼편은 고급 호텔을 중심으로 한 번화한 거리이고, 호텔 맞은편은 전당포와 싸구려 모텔 등이 있는 하층사회의 거리이다. 극이 진행되면서 이 무대의 풍경은 화려하고 우아한 Siete Mares 호텔로 대변되는 낭만적으로 퇴폐적인 어느 항구풍의 도시를 시사하는 듯하기도 하고, 그런 가 하면 잔혹한 통제와 비인간성이 난무하는 어느 살벌한 인간 세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Camino Real이 결국 어떤 곳인가에 대해 한 마디로 단정하긴 물론 어렵다. 왕도(royal way)인 이 길을 통해 다사다난한 인생 여정이 드러나기도 하고, 어떤 특정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 체제 하의 삶의 양태가 보이기도 하며, 혹은 이 곳이 바로 지옥의 모습과 같을 것이라는 시각도 가능하다.
1970년 1월 이 극이 재공연되었을 때 Williams는 이 극을 파시스트 국가에 잡힌 개인의 함정을 그린 것이라고 묘사하면서 또한 "한 낭만주의자가 대단히 냉소적인 세상에서 직면하는 어려움 - 즉 자신의 어려움을 그린 것" 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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