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밥>은 3대에 걸친 한 가족의 역사를 통해 `분단'이라는 가장 중요한 민족적 모순을 규명하고 오늘을 사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통일에 대한 구체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석 작가겸 연출은 이 공연으로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진 작품이기도 하다. `북한 찬양 내용의 연극작품을 집필·공연한 혐의'로 구속했던 경찰은 서울대 공연 당시 작품의 소품인 인민공화국 깃발을 문제화, 주씨를 연행해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을 검토하다 88 서울올림픽을 앞둔 각계의 반발로 결국 `불구속 입건'으로 처리했다.
주인석의 작품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시간은 구성시간(plot time)이다. 구성시간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사건 중에 과거의 장면이 삽입되는 현재 – 과거 - 현재 등의, 작품 전체를 조직하고 있는 추상적인 시간이다. 「통일밥」에서는 40여 년에 이르는 긴 시간의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면서 간간이 과거의 회상장면이 삽입되곤 한다.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해방 직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분단정치사'의 장면은 사건 진행이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과거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구성시간의 시간 개념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구성시간이란 연대기적인 시간이 확보되었을 때 성립 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인석의 희곡에서 구성시간이 중요하게 취급된다는 점은 그의 작품이 바로 조각난 장민들의 연속에 의해 작품 전체의 통일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에 있어서도 주인석의 희곡은 과거의 제한적 무대개념을 거부한다. 연대기적인 시간 개념이 해체된 극에서는 극을 이끌 어가는 주동인물의 사건 진행보다는 각각이 독립된 장면 장면의 이미지는 이 무대 기호에 의해 구체화되어 극의 중심사건은 무대 밖에 놓이기 마련이다.
주인석이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극적 과제는 통일이다. 아니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통일을 향한 준비이다. 그러나 통일에 관한 문제는 쉽사리 극적 주제로 수용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서사양식과는 달리 극은 운동의 핵심 자체를 묘사한다. 즉 서사양식이 대상의 총체성을 묘사하는 데에 반해서 극은 운동의 총제성을 묘사한다. 통일은 '우리의 소원‘ 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는 운동의 핵심에 존재한다기보다는 그에 대한 과제가 우리 시대의 제반 모순을 드러내 주는 중세적인 대상으로 우리 앞에 주어져 있다. 그렇기에 그것을 극의 중심사건으로 취급하기에는 다소의 문제가 따른다. 따라서 통일을 극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것이 대단히 의미있는 작업이면서도, 자칫하면 여러 과제를 다시 한번 늘어놓는 데에 지나지 않을 위험마저 내포하고 있다. 이 점은 잘 알고 있는 작가는 따라서 그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동일에 대한 의지를 서사극의 수법으로 극화하고 있다. 단순히 시, 공간의 제약을 서사적인 장치로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서사적일 수
밖에 없는 제재를 서사극의 수법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통일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 또한 그를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만 하는가 통일이란 민족적 과제는 단지 추상적인 열망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은 명백한 것이기에, 주인석은 이에 대한 우리의 자기반성 부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한 반성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논리적인 것이 되어야 하므로 그는 관객의 감정이입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이 점이야말로 작가가 서사극의 기법을 활용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작가들이 이야기 진행의 편의를 위하여 서사적인 장치를 끌어들이는 것과 뚜렷이 구별되는 주인석만의 장점인 것이다.
■ 작가의 말/주인석
- 연극은 가장 진진한 방법의 혁명연습이다
예술은 종종 하찮은 것일 수 있지만,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현실에 지나친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은 예술을 버리거나 쉬운 예술만 하자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겁다고 짐을 벗어 던지거나 쉬운 짐만 챙겨서 길을 떠날 수는 없다. 하루 이틀 갈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거나 아무도 있지 않은 곳으로 며칠 떠나왔던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우린 적들의 거리에서만 서성이며 살다 그만 그곳에 갇히지는 않았는가. 우리가 갈 길은 온 몸으로 온 짐을 지고 떠나는 길이다. 그 짐 속에 예술이란 그릇이 있다. 그건 깨지기 쉬워 번거롭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무언가를 떠먹는다. 그건 그릇이어야 한다. 그릇 아닌 것이 아니라 그릇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 앞에 흐르는 역사의 강물 속 진리를 떠먹을 수 있다.
예술은 현실을 모방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현실을 담아내지만, 미래를 연습하는, 다시 말하자면 담아낸 무엇을 미래화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현실을 연습할 수 없고 미래를 살아낼 수 없기에 현실을 살아내며 미래를 연습한다. 그것이 예술이다. 연극은 가장 진진한 방식의 혁명연습이다. 우리의 현실이 혁명적 현실이고 우리의 미래가 필연적으로 혁명적 세계라면 그건 그렇다. 그리고 '가장 진진한 방식이다'라는 것은 연극이 다른 예술처럼 인간과 인간의 행위를 추상적 언어나 선, 색채 혹은 소리가 아니라 바로 그 구체적인 인간과 그 인간의 행위로 직접 표현하며, 그 행위의 주체가 수용자와 바로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직접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연극인들은 혁명의 공간에서 가장 혁명적으로 투쟁했다. 가려진 역사들을 들춰보면 그렇다. 그건 그들이 가장 철저히 연습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통일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통일은 물론 민족적인 당위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끝까지 관철하고자 하는 관점은 당위적인 민족 주체적 관점이 아니라 민중 주체에 의한 사회변혁이라는 계급적 관점인 것이다. 그건 당위가 아니라 과학인 것이다. 현실의 원리가 과학적인 합법칙성이듯이 예술의 구성원리도 그러해야 한다면, 이제까지의 수많은 분단문학과 연극들이 실패한 원인도 그런 자명한 이치들을 깨닫지 못했거나 애써 부정하려 했던데 말미암은 것에 다름 아니다. 이 땅의 예술가들이 무슨 강박관념처럼 분단을 문제 삼으면서도 결국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과 그로 인한 양 체제에 대한 부정, 자의식의 공간으로의 자폐적 도피 혹은 지극히 당위적이고도 뜬금없는 낭만적 통일논리의 사이비 적 통합에 머물고 말았던 것은 바로 확고한 관점의 부재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통일이라는 민족적 염원이 어떤 과학적이고도 구체적인 투쟁의 경로를 거쳐 오리라는 전망에 도달할 수 없었다.
분단 올림픽의 해에 너무나 당연하게 통일논의의 선풍이 불고 있다. 「통일밥」의 제작 의도 또한 이런 시의적 과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러나 적극적 대응이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 전체운동의 연속 선상에 확고히 입지하고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이전의 문학예술 작품들이 범해왔던 오류를 되밟는다는 것은 명백히 과오가 될 것이다. 한 걸음의 운동적 진전, 그것이 예술이라는 구체적 실천 속에서 어떤 방법으로 가능할 것인가. 이건 거대한 곤혹이 아닐 수 없다. 아주 범박하게 정리하자면 이 작품의 제작 의도상 이 작품은 흔히 민족 모순체계라고 얘기하는 외세와 분단의 문제와 계급모순의 적절한 통합을 요구하고 있다 하겠다. 다분히 독자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두 가지 체계의 통합을 의도한다는 점에 이 작품의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의미가 있다. 거기에 이 작품의 의의와 가능성이 있고 따라서 한계가 설정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는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두 걸음이 아니라 한 걸음씩만. 감격적이고 추상적인 수사 속에 미래에의 전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철저히 답답한 현실을 보여주려 한다. 그리하여 그 답답함 속에 은밀하게 숨어있는, 우리가 깨어난 의식으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진정한 현실의 원리를 보여주려 한다. 통일은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는 분단이라고 하는 한반도 고통의 현상을 계급모순이라는 보편성의 특수한 발현 형태라고 파악했으며, 그것의 극복은 본질적으로 민중 주체의 변혁 투쟁을 통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미제에 의한 한반도의 규정성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해방을 전후한 공간에서의 미제에 의한 한반도 분할 음모를 작품의 배경으로 중요하게 배치하였다. 이 땅의 민중은 분단 상황으로부터 수탈당하고 억압받은 것이 아니다. 분단은 그 한 조건이자 한 측면이다. 엄밀하게 생각해 보라. 통일은 어떤 구체적 투쟁에 의해서 오는가. 그리고 그 투쟁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투쟁의 주체를 본질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류보상 '독신녀와 칵테일' (1) | 2022.07.12 |
---|---|
오태영 '빨갱이네 시선' (1) | 2022.07.12 |
김도영 '신신방' (1) | 2022.07.09 |
박훈영 '가카가 오신다' (1) | 2022.07.09 |
신호권 '천국이야기' (1) | 2022.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