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어령 '당신들은 내리지 않는 역'

clint 2022. 6. 5. 09:11

 

 

 

이어령 희곡집의 마지막 장에 있는 희곡 <당신들은 내리지 않는 역>은 잘 알려지지 않고

그러다 보니 공연이 안된 작품으로 남아있는 작품이다.

 

해방후 30, 1970년대를 배경으로 쓴 이 작품은 일제 때 금광으로 개발된 지역의 기차역. 지금은 그 용도가 폐기되어 기차가 서지 않는 폐역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과거에 묻혀 사는 그 역의 역장과 술집을 했던 매월, 그리고 징병 간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할머니가 있고 현재를 사는 인물로 매월의 아들 봉수와 역장의 딸 유순이 있다. 서로 좋아하는 봉수와 유순은 이 역에 기차가 서는 날 떠나기로 약속했고, 자연경관이 수려한 이곳의 개발이 되어 역이 신축되고 기차가 오는 날 둘은 과거를 떨쳐버리고 미래를 향해 떠난다.

 

 

이어령 희곡의 극적 위기는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갈등 및 대결로부터 오지 않고 삶 전반의 가치를 위협하는 치명적 상실의 계기로부터 온다. 그런데 그 상실의 대상이 다소 추상적이어서, 재산 손실이나 육제적 외상 등의 분명한 사건이 아닌 다른 형태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소재의 출발점이 되는 극적 순간은 흔히 문명 속의 정체성 상실 위기로 드러난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사실주의극의 흔적을 많이 드러내면서 이어령 희곡의 전반적 특성으로부터 일정하게 차별화되어 작품 <당신들은 내리지 않는 역>에도 이 같은 문제의식은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어, 다른 작품의 근저에 깔린 동일한 주제의 모티프를 재확인시켜 준다. '모내리역' 이라는 역의 이름에서 <당신들은 내리지 않는 역>이라는 제목의 그림자가 엿보이기도 하는데, 폐역과 다름없는 기차역의 역장과 그 주변 사람들은 사라져간 것과 남겨진 것의 경계에 놓인 인물들이라 할 만하다. 이어령의 희곡들에서 사라진 흔적, 부재하는 것,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이끌림은 앞서 살핀 매매될 수 없는 것의 매매'에 대한 비판의 식이나 후에 말한 죽음에의 인식 등과 맞물리면서 이어령 희곡의 지적 측면을 강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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