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 조선이 들어서게 되면서 불교를 숭상하던 정책이 유교 사상으로 자리바꿈을 하게 된다. 이 와중에서 종교의 폐해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승려의 사찰에 대한 핍박이 가해지고, 새로운 나라의 기능을 다진다는 기치 아래 개혁의 이름으로 여러 새로운 정책들이 세워진다. 이 개혁의 선봉에 선 '삼봉'을 따라 자신의 성분을 모르는 노비 출신인 '수성'은 삼봉을 따라 개혁에 앞장을 서게 되고, 시도읍지 건설을 위해 궁공사에 차출된 백성들은 혹한과 허기 속에 희생되어 간다. 나라가 자리를 잡으며 애초의 개혁의지는 점차로 변질되어 가고 싶은 기존 상대편을 제거하는 음모까지 진행된다. 이 소용돌이 속에 '소성'은 권력에 환멸을 느끼게 되고 다시 자신의 고향에 돌아와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승려 '대안'의 죽음을 맞이하며, 진정한 개혁의 의지란 민초의 삶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작품의 표면적인 내용은 조선 건국 초기의 이야기이나, 이를 통해 1990년대 문민정부 출범 즈음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드러난다. 정권을 획득하여 위로부터의 개혁을 해나가는 신정부와, 여전히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이전의 민중운동 세력의 갈등을 형상화하기 위해, 정도전을 둘러싼 조선 건국기의 역사적 사실과 미완 혁명의 설화인 운주사 천불천탑 설화를 결합시켜 만만치 않은 스케일을 만들어냈다. 썩은 고려를 뒤집어엎은 개혁세력이기는 하지만 과거 백성들의 미륵 세상에 대한 집단적 행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신흥사대부 세력인 삼봉 정도전, 고려시대 민중운동 세력으로 삼봉의 손에 동료와 가족을 잃고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은거하면서 신정부에 대한 신뢰를 보내지 않는 도편수와 노승인 대안처사를 대립 축으로 설정했다. 민중운동 지도자의 손주 소성이 과거를 모른 채 대안처사와 도편수의 손에 커서, 출세욕과 과시욕에 이끌려 정도전을 따라가나, 결국 비인간적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대안처사에게 돌아오는 과정이 극의 큰 흐름이다.
작가는 확실히 대안처사로 대표되는 아래로부터의 개혁 쪽으로 기울어 있는데, 고려시대나 새정부의 시대나 여전히 살기 힘들고 부정부패가 만연하다는 백성들의 부정적 현실인식이 작품 전체에 깔려있는 것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한편 민심을 수습하려 하며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은 신정부의 개혁세력 삼봉 정도전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90년대 사회, 정치 현실을 규모있게, 다층적으로 그려내고자 한 이런 패기가 두드러지긴 하지만 이 작품은 아직 과거의 역사, 설화와 90년대의 상황을 엮어 놓기에 급급하다. 대안처사와 삼봉의 짧지 않은 대화에도 불구하고 입장 차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소성이 정도전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과정도 허술하다. 민중운동과 신흥사대부 간의 관계 설정은 고려, 조선의 역사적 리얼리티로서는 어색하며 그 시대에 대한 통찰도 피상적이어서, 90년대를 보여주기 위한 인식에서도 단순한 양분론과 정치혐오의 수준을 넘어선 인식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인물, 사건을 큰 스케일로 벌여놓고 이를 정돈해가지 못하여 쩔쩔맨 흔적이 역력한데, 연출은 이를 정돈하느라 구성에 손을 댔지만 역시 제대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작가의 글 - 오은희
역사란 지나간 시대를 바라봄로서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는 나침판같다.
역사극을 처음 써본 입장에서 역사극이란 현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생각해봤다.
"귀로" 를 처음 구상했던 때가 91년도였다. 그후 선거와 문민정부 출범 등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한 시대가 마감하고 또 다른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 일반인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이것이 이 글의 모티브였다. 모르겠다. 개혁이란 이름으로 새 시대를 얻지만 진정 그 개혁이라는 것이 정권을 잡게 되면 보수화되지 않고 계속될 수 있을 것인지. 그 개혁의 실체란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여말선초의 혼란기 속에서 현대를 조명해 보고자하는 작업이 어느 정도 육화되었는지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다. 현대사는 왜곡된 면도, 또 아직 조명되지 못한 점도 많으므로. 또한 과거사 역시 왜곡되고 굴곡된 것이 많으므로 기준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글쓰기는 아마 이런 기준점 찾기의 첫걸음이 아닐런가 자문하면서 역사극이란 거대한 수레바퀴의 한 살을 만들었지만 설익은 지식으로 인해 관념만 가득한 작품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에 참여하는 모든 분의 경력에 나의 일천한 작품에 피가 돌고 살이 돋게 될 것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막이 오르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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