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산하」의 1978년 제2회 「대한민국 연극제」참가작품으로 오태석의 초연작품이다. 신라의 봉덕사 주종에 얽힌 얘기와 모향리의 효자 석종 얘기를 함께 묶어 종과 종소리에서 한국인의 과거와 미래를 찾아보려는 작품이다. 성덕대왕 신종의 주조 과정에서 어린이를 바쳐 종이 울릴 때마다 아이가 어머니를 찾는 ‘에밀레(어머니)’ 소리를 낸다는 전설이 작품의 모티프다.
나라에는 백제가 멸망했을 때와 같은 상스러운 조짐이 보이고,
각간의 내분이 일어나 어지러움이 극에 달해 있다.
상감의 교지를 받든 주종장 비지의 주물소에 혜통이 찾아와 하늘에 떠있는
두 개의 해의 기이한 일을 해결하려면 종소리가 중천에 울려야 한다고 하지만,
선대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에도 종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이때, 머슴 일광의 처가 남편이 옥에 갇혀 생활이 어렵고 아이가 시어머니와 끼니로
죽일 듯 싸우니, 시어머님은 살리고 자식은 종을 굽는 것에 공양하겠다고 찾아온다.
부지할 수 없는 생명을 불타의 뜻에 맡기는 것이니 수락하라는 혜통의 권고를
무시한 비지는 처와 아이를 돌려보내고 자신의 손으로 종을 만들겠다며
정을 내리치지만 이로 인해 장정이 죽어 나간다.
결국 혜통이 선대의 월명사가 행한 대로 도솔가를 부르자 해가 떨어지고,
처가 석종을 가지고 찾아온다. 아이를 묻으려고 구덩이를 팠더니
거기서 석종이 나오고 아이는 할머니와 사이좋게 지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지는 석종의 맑은 소리에 그 모양대로 종을 만들기로 하고, 하늘이 공양하려는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였음을 사죄하며 자기의 두 눈을 공양한다.
주물이 완성되고 쇳물을 붓기로 한날 비지는 자기의 아이를 또 다시 끓는
쇳물 속에 공양하겠다고 나서고 혜통은 몰래 비지의 아이를 감춘다.
비지의 신호에 따라 혜통은 아이를 대신하여 항아리 조각만을 쇳물에
던져 넣었는데, 비지의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을 뜬 비지가 아이를 찾으려 하지만, 혜통은 이미 녹았다고 하며
비지에게 나머지 쇳물을 부으라고 한다. 비지가 무리를 재촉하여
뻘건 쇳물을 주물속으로 붓더니
결국 발광한 듯 아이를 찾으러 쇳물 속으로 뛰어들고 만다.
오태석의 ‘종(鐘)' 에서도 죽음이란 인간의 뜻을 떠나 있다. 그래서 쇳물에 창자가 녹아 죽은 사내도, 주종장인 친부의 뜻에 따라 공양으로 죽음을 맞이할 뻔했으나 혜통의 손에서 구출된 아이도, 아이가 살아있음을 모른 채 실성하여 쇳물 속으로 뛰어든 주종장도 길”에서 “나는 간다”고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제망매가가 인간 중심적이고 현실적인 층위에서 슬픔을 노래하며 위로하고 있다면 <종> 전반에서 정형시가적 운율성을 띤 채 열두 번 반복되며 관객으로 하여금 불교적 층위의 위로의 정서를 주술적으로 공감하게 한다. 여기서 “오다”의 반복은 세상에 태어난 수많은 사람을 의미한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기에 “서럽”고, “그대들”은 우리들과 마찬가지이기에 누구에게든 그 고통은 똑같이 다가온다. 결국 일체개고(一切皆苦)에 빠져있지않고 피안(彼岸)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종에는 슬픔과 위로의 정서가 서사의 중심부에 도저하게 흐르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위 두 편의 향가가 미학적으로 작품에 혼융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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