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위고 원작 김영보 번안 '구리 십자가'

clint 2021. 5. 1. 15:07

 

 

1921년에 소암 김영보가 쓴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희곡집 황야에서에는 그의 창작희곡 4편과 함께, 놀랍게도 빅토르 위고의 희곡 파도바의 폭군 안젤로(ANGELO Tyran de Padoue)를 번안한 구리 십자가가 들어 있다.

구리 십자가는 개화기 북촌 어디쯤에 있었음직한 대저택을 연상시키는 장소 설정과, 토속적인 멋이 풍기는 이름의 주인공들이 펼치는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가 이색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번안극이라는 표제만 없다면, 창작극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독창성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자연히 원작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파도바의 폭군 안젤로에 관해 현재까지 국내에서 연구 출판된 문헌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구리 십자가밖에는 찾을 수가 없었기에 원작을 국내 최초로 번역하게 되었다.

 

 

 

 

300년 전으로, 무대는 이국 이탈리아로 옮겨져, 카타리나(다경)와 로돌포(종수)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3일간에 걸쳐 다섯 번 장소를 옮겨가며 전개되는 5막극이다.

따라서 사건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빠르게 진행되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결말에 대한 호기심을 흥미진진하게 유지해 나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위고 희곡의 결점으로 지적되는 느슨한 갈등구조나 산만한 사건 전개 등은 이 작품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민중들에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려는 작가의 배려심이 가끔 장광설로 비칠 때도 있지만, 절제되고 재치 있는 대화가 유발하는 속도감과 어울려, 오히려 작품의 균형미를 돋보이게 하고, 자칫 멜로드라마로 흐를 수 있는 작품을 문학적 가치가 풍부한 문제작으로 끌어 올리는 요인이 된다. 예컨대 안젤로가 들려주는 베네치아 사회의 모순, 카타리나가 고발하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횡포, 라 티스베가 호소하는 하층민에 대한 사회적 편견 등을 통하여, 사회제도나 인간 본성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감성과 호기로운 목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작품이 기대를 훨씬 능가하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술회하고 있는데, 그로부터 2세기 가량 지난 오늘의 현실에서도,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하고 시사성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고전으로 평가될 수 있는 가치와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프랑스의 학생들이 20여 편에 달하는 위고의 극작품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고 잘 읽혀지는 작품으로 파도바의 폭군 안젤로를 꼽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소암 김영보

 

1900∼1962. 호는 소암(蘇巖). 개성 출신. 1912년 3월에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 초등과를 졸업하고, 곧 중등과와 고등과를 다니면서 신학문을 배웠다. 한영서원 고등과 시절에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하는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

1921년 2월부터 개성학당 상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이기세(李基世)가 주도한 극단 예술협회(藝術協會)와 관련을 맺게 되었고, 이것이 희곡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예술협회의 요청으로 「정치삼매(情痴三昧)」·「시인의 가정」 등을 썼고, 계속해서 「나의 세계로」·「연(戀)의 물결」·「구리십자가」 등을 발표했다.

1922년에는 이 5편을 묶어서 우리나라의 첫 희곡집인 『황야에서』를 발간하였다. 그 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우면서 불교조선협회 주사 겸 여자동포원 주간으로 일했다. 1925년 고한승(高漢承)·김영팔(金永八)·이경손(李慶孫)·안석주(安碩柱) 등과 극문회(劇文會)라는 연극연구단체를 창립했으나, 이 단체가 흐지부지됨으로써 그는 언론계로 옮겼다.

1927년 경성일보사에 기자로 입사했고, 매일신보의 통신부장·오사카지사장 및 경북지사장 등으로 일했다. 광복 이후에는 대구 영남일보 초대편집국장에 이어 사장을 10여 년간 역임했다.

주로 언론인으로서 활약했으나, 그의 5편의 희곡은 우리나라 근대희곡작가가 추구한 두 가지 테마 중 하나인 전통인습 타파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작품내적인 의미가 있다. 그의 작품은 당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인 도덕관을 제시하였으나, 작품내용은 통속극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