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체온-플랑크톤의 층계참》은 2010년 5월에 도쿄. 아카사카 레드 시어터에서 초연되었다. 일본에서 공연되었을 때 제목은 《플랑크톤의 층계참》이었는데, 한국에서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생소할 것 같아 작가와 상의한 결과, 작가가 새로이 생각한 《기억의 체온》을 한국판 제목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참고로 '플랑크톤의 층계참'에는 "부유(浮遊)하는 것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작품에서는 언뜻 보기에 전혀 연관성이 없는 사건들과 그 뒤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이 그려진다. 개업하는 가게마다 얼마 못가서 문을 닫는다는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건물, 있던 물건이 사라지고 없던 물건이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현상, 가나메 앞에 갑자기 나타난 남편과 도쿄에 있는 회사에 평소대로 출근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남편, 자신의 도플갱어를 보고 미쳐버린 요리사…… 엉킨 실타래를 풀듯 추리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관객의 궁금증을 자극해 자연스럽게 이 연극 속에 빠져 들게 한다. 작가의 스토리텔링 솜씨가 단연 돋보인다.
마에카와 도모히로는 SF적인 설정을 즐겨 사용한다. 예를 들어 《산책하는 침략자》에서는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인간의 몸에 침투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개념을 빨아들이는 외계인, 《함수 도미노》에서는 자기가 바라는 일이 뭐든지 이루어지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도미노'라는 존재, 《도서관적 인생Vol.3 먹이사슬》에서는 흡혈귀가 요리연구가로 등장한다. 또한 최근작인 《태양》에서는 낮에 생활하는 구 인류와 밤에 생활하는 신인류의 갈등이 그려졌다. 어떻게 보면 기상천외하고 만화적인 설정들이지만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작품에서는 이런 설정들이 공포스러운 분위기나 스펙터클한 장면으로 표현되지 않고 평범한 일상과 등을 맞댄 차원에서 묘사된다. 그래서 관객들은 쉽게 그의 연극적 속임수에 넘어가 "혹시 현실에서도 저런 일이…” 하는 착각에 빠져 자신들을 둘러싼 일상을 한번 더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에서 SF적인 설정들은 관객의 상상력을 환기시켜 우리의 삶을 다른 차원에서 들여다보게 하는 연극적 장치로 작용된다. 그런 작풍 때문인지, 그의 초기작품들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반면 등장인물의 개성이나 내면 묘사가 다소 약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는데 본 작품의 경우, 등장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주인공 가나메의 갈등과 심리변화가 기발한 발상과 맞물려 잘 드러났다는 평을 얻었다. 《기억의 체온》에서 사용된 모티프는 사람들의 믿음이 현실화 되는 신비로운 공간과 도플갱어(나와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나)인데 작가는 거기에 자기만의 해석을 가미해 연극적 재미와 주제성을 이끌어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도플갱어는 단순한 도플갱어가 아니라 《기억의 체온》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사람들의 기억이 만들어내는 분신이다. 가나메는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만들어진 시게루의 분신과 자기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시게루를 만나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남편에 대해 모르고 있었는지를 깨닫고 아내에 대한 기억 없이도 멀쩡하게 생활하고 있는 남편과 이혼해서 홀로 서기 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결국 분열된 시게루를 온전하게 합체시키는 과정에서 혼란의 원인이 되는 이틀 동안의 기억을 제거하기 위해 제3의 시게루를 만들게 되는데 가나메는 인간의 형태를 가진 기억, 즉 제3의 시게루를 죽이기보다,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언젠가는 자기 스스로 깨끗이 잊을 것을 결심한다. 주인공 가나메뿐만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도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가나메의 오빠인 데루오는 경제활동을 포기 한 채 자동차 개조, 온라인 게임, 독서 등, 취미삼매경에 빠져 사는 이른 바 니트 족(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들)이지만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사고로 수수께끼를 푸는 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마치 인생을 달관한 것 같은 그의 언행은 웃음을 선사하면서 존재의 불확실성이라는 철학적인 명제를 관객에게 던져 주기도 한다. 또한 고분고분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젊은 파출부 유카리도 단역이나마 후반부의 인상적인 독백을 통해 작품의 주제성을 강화하는 데 한몫 하고 있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매력은 아주 경쾌하고 빠른 템포이다. 개업 준비 중인 가게, 가나메의 친정집, 도쿄의 사무실이라는 세 공간을 넘나들며 진행되는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인데다가, 한 배우가 최대 3명의 분신들을 일인다역으로 연기해야 하는 구성인데도 불구하고 거의 암전 없이 미끄러지듯이 장면전환이 이루어진다. 실제 공연에서는 개업 준비 중인 음식점의 카운터와 화장실, 현관문 외에는 특별한 무대세트가 없는 간결한 무대에서, 배경에 설치된 회전문을 통해 빠른 장면전환을 가능케 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장면은 음악 소리가 서서히 작아지면서 다음 음악으로 넘어가는 크로스-페이드 기법과 같이, 장면의 끝부분과 다음 장면의 시작부분을 맞물리게 해 자연스럽게 후속 장면으로 넘어가도록 하는 연출 벽을 발휘함으로, 관객들의 집중력을 초지일관 무대로 향하게 하였다.
《기억의 체온-플랑크톤의 층계참》은 전체적으로 빠른 템포와 가벼 운 터치로 젊은 관객층에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사람을 '안 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 아닐까? 라는 질문들을 새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 까지 끄집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말을 '네가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바꿔 보면 어떨까? 이 작품 첫 장면에 나오는 자전거 바구니와 쓰레기통의 일화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누군가가 그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나'라는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완결된 존재라기보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기억, 혹은 인식의 파편들로 조립된 불확실한 총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존재의 불확실성에 대한 성찰은 정보기술의 발달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선이 모호해진 현대사회에서 더욱더 리얼리티를 갖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에카와 도모히로가 이 작품 제목에 담고자 한 것은 부유하는 플랑크톤들이 잠시 머물다가 가는 곳, 덧없는 기억들이 잠시 온기를 남겼다 가는 이 세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기억의 체온-플랑크톤의 층계참》은 재미와 주제의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에 성공한 작품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마에카와 도모히로 (前川知大)
1974년, 니이가타 현 가시와자키 시(新潟県柏崎市) 출생. 도요(東洋)대학 문학부 철학과 졸업. 2003년 극단<이키우메>를 창단한 이래, 극단의 모든 작품을 쓰고 연출해 왔다.<이키우메>라는 극단 이름은 생매장이라는 뜻으로, "연극을 보는 행위는 산채로 저승을 엿보는 것”이 라는 그의 연극 관에서 유래한 것이다. SF, 괴담, 공포물과 같은 기상천외한 발상에서 출발해, 일상적인 생활과 맞닿는 곳에 불현듯 출현하는 이 질적인 세계를 통해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고정관념들을 뒤집는 것이 그의 작품 세계가 보여주는 특징이다. 2008년 이후, 각종 연극상을 수상하면서 현재 가장주목 받는 젊은 극작가 겸 연출가 중 한명으로 꼽히고 있다.
(주요작품)
《산책하는 침략자(2005)》, 《함수 도미노(2005)》, 《비밀통로의 회의실(2007)》, 《앞과 뒤와, 그 저 편(2008)》, 《기기괴괴-고이즈미 야쿠모에게서 들은 이야기(2009)》, 《플랑크톤의 층계참 (2010)》, 《도서관적 인생 Vol.3 먹이사슬(2010)》 외.
(수상경력)
2010년 쓰부야난보쿠 희곡상 수상 (《플랑크톤의 층계참》)
2010년 요미우리연극대상 우수연출가상 (《플랑크톤의 층계참》, 《도서관적 인생Vol.3 먹이사슬》}
2009년 기노쿠니야 연극상 개인상 (《함수도미노》,《기기괴괴 고이즈미 야쿠모에게서 들은 이야기:》}
2009년 요미우리연극대상 우수연출가상 (《함수 도미노》, 《좁은 문으로 들어오라)
2009년 예술성장문부과학대신신인상 (《함수 도미노», 《기기괴괴-고이즈미 야쿠모에게서 들은 이야기》)
2008년 요미우리연극대상 우수작품상 {《앞과 뒤와, 그 저편》}
2008년 요미우리연극대상 우수연출가상 (《앞과 뒤와, 그 저편》,《도서관적 인생vol.2 방패와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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