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프리드리히 헵벨 '유디트'

clint 2015. 10. 31. 18:32

 

 

 

 

 

 

5막으로 구성된 「유디트」는 헵벨의 첫 번째 비극 작품이자 첫 번째 역사드라마이다. 그는 뮌헨에 체류하던 시절 (1836~39) 이 역사드라마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매진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셰익스피어 등 고전 비극작품들에 대한 강독과 연구는 비극 「유디트」의 탄생에 단초가 되었다. 또 이 시절 헤벨은 앞선 시대의 독일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가 잔 다르크의 전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드라마 「오를레앙의 처녀」(1802)를 읽고 자극을 받는다. 헵벨은 잔 다르크의 운명에서 지신의 역사 드라마의 핵심을 이루는 비극적 모티프를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신이 원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인에게 영향을 끼쳐서 신의 의지의 도구로 이용한 다음 목적이 달성된 후에는 자신의 도구가 파멸되는 것을 구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헵벨은 이러한 모티프에다 이미 자신에게 익숙해져 있는 다른 소재를 가미한다. 그 소재는 바로 성서에서 차용되었다. 성서는 집에서 어린 헤벨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서적이었으며, 부모님에게 매일 저녁 성서를 낭송해주는 일은 그가 해야 할 의무였다. 또 1838년 뮌헨의 한 갤러리에서 보았던 줄리오 로마노(1499~ 1546)의 그림 「유디트」는 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으며 구약성서의 외경(Apocrypha: 정경에 속하지 않는 구약의 제 2경전. 모두 열권으로 되어 있다)에서 나온 유디트의 이야기를 그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었다. 헤벨은 1839년 10월에 「유디트」를 쓰기 시작하여 1840년 1월에 완성 했다. 「유디트」는 이 작품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베를린 궁정 극장 호프테 아터 소속의 유명 여배우 아우구스트 슈티히 크레링거가 여주인공을 맡아 1840년 7월 6일에 베를린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되었으며 그 후 함부르크 등 여러 연극 무대에서 올려졌다. 헤벨은 특히 구약성서의 외경에 등장하는 유디트를 인정할 수 없었다. 성서 속의 유디트는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간계와 계략으로 유혹하여 살해하고는 그의 수급을 자루에 넣고 귀환하여 사흘 동안 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환호하며 기뻐하는 여전사로 등장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헤벨에게 너무 상투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지신의 작품에서 유디트를 자신의 범행을 통해 그리고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아들을 낳을 가능성을 통해 내적으로 파멸하는 여주인공으로 새롭게 재구성한다.

 

 

 

우선 헤벨 작품의 줄거리를 전반적으로 살펴보자. 작품의 무대가 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베틀리엔 시는 이교도의 나라 아시리아의 총사령 관 홀로페르네스의 군에 의해 포위당한 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성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자존감이 강한 유디트는 신의 뜻을 대행한다는 사명감에서 위기에 처한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홀로페르네스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홀로페르네스는 그녀의 빼어난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그녀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소유하려 한다. 유디트는 적장에 대한 적개심과 그의 오만한 태도에 대한 증오를 금할 수 없으면서도 그 영웅의 남성다움과 대담성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리고 만다. 그녀의 갈등은 민족적, 종교적인 사명감과 개인적 사랑의 감정 사이에서 증폭된다. 유디트는 자신이 사명감에서 그에게 몸을 허락한 것인지 한 여성으로서 위대한 남성에게 몸을 바친 것인지 혼란스럽다. 반면 홀로페르네스는 단순히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녀의 순결을 빼앗고는 잠들어버린다. 수치와 분노, 그리고 절망 속에서 그녀는 잠든 영웅, 그녀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세상의 최초의 남자이자 최후의 남자"의 목을 벤다. 마침내 그녀는 위기에 빠진 민족을 구원하기는 했으나 성녀로 우러러 받드는 백성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자기 자신은 정신적으로 파멸한다. 그녀는 행여 임신을 한다면 태어날 자신의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어머니를 살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죽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녀는 환호하는 백성들에게 요구한다. 자신이 만약 아이를 탐내게 되면 자신을 죽여 달라고! 물론 그녀의 이러한 요구가 실현 될지에 대한 결말은 열려 있다.

 

 

 

이 작품은 극의 긴밀한 구성 방식이나 언어 구사력에 있어서 비범한 작가의 면모와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준 드라마로 이미 발표 당시에도 널리 주목받았다. 헵벨은 작품의 여주인공, 처녀이자 과부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설정했다. 유디트는 애국적 사명감에서 핍박받는 자기 민족을 해방하고자 홀로페르네스 살인을 계획했지만, 결국 자신의 개인적 복수를 위해 범행을 완수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여성성과 인간성이 작용한 것이다. 그녀가 홀로페르네스라는 독재자를 살해한 행위는 결국 신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쾌락과 탐욕의 대상으로만 '오용'했기 때문이다. 여주인공 유디트의 행위는 이로써 신이나 민족의 뜻과 무관하게 아주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된다. 헤벨 지신도 이 작품에 대한 해설에서 "만약 그녀가 홀로페르네스에게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범행은 그저 끔찍하고 혐오스러울 뿐이었을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자신의 자아를 극도의 혼란에 빠뜨리는 끔찍한 순간 개인적인 동기에 의해 범행을 한 후, 그녀는 성(性)의 충동에 뿌리를 둔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인해 내적으로 분열되고 만다. 헤벨은 이 작품에서 여성성으로서의 '자연'에 거슬러 행동하는 유디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동시에 여기서는 무절제와 극단적 자기 과시로 인해 파멸하는 위대한 개인과 이 남성적인 위대함이 홀로페르네스로 구체화된다. 헵벨이 원래 계획했던 드라마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대왕'의 영웅적 이미지들은 「유디트」에서 홀로페르네스라는 인물로 실현되었다. 이 두 가지 모티프는 작품에서 서로 용해된다. 유디트의 비극성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행동에서 동기의 변화에 놓여 있다. 종교적 열광에 이끌린 성서 속의 여 전사 유디트와 달리 헵벨의 작품에서 유디트는 지신의 은밀한 동경, 말하자면 적진에 있는 자신과 필적할 만한 남성에 대한 동경에 이끌리고 바로 그 대등한 남성에 의해 여성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인격체로서 존중받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홀로페르네스의 넘쳐나는 에너지, 극단적인 자기 신뢰, 그의 무한한 자신감과 무제한적 권력의 의지에 비추어 보면 여성은 한낱 하나의 물건에 불과한 존재, 즉 일종의 노획물로서 유희하면서 향락하는 하나의 사물 외에 다른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가 도취의 대상인 여성에게서 향유할 수 있는 쾌락은 바로 그의 남성적 자기주장과 자기 증명의 형식과 같다. 그래서 그는 유디트를 심리적, 육체적으로 유린한다. 그리고 사랑의 대상일 수 있었던 그에 대한 절망은 그녀로 하여금 칼을 손에 쥐게 한다.

 

 

 

헵벨은 데뷔작 「유디트」에서 이미 개체들의 투쟁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위대한 개성을 지닌 동등한 파트너들은 서로 몰락한다. 유디트가 자신의 미와 육체를 의식적으로 도구화한 것은 정말 그녀의 영혼과 자아 전체의 도구화로 확대된다. 증오와 사랑은 뒤섞인다. 능동적인 주체로서 홀로페르네스를 겨냥한 미와 육체의 의식적 도구화는 그녀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무의식적 욕망을 일으키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전체 자아의 참해와 인격의 훼손에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영혼과 육체의 의식적 분리, 몸과 진정한 자아의 이러한 분리는 착각으로 드러난다. 여기에 그녀의 운명에 나타난 '비극적 아이러니'가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녀에 의해 의식적으로 투입된 자기 도구화가 실제 단순한 수단으로서 입증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 작품에서 신은 유디트를 투쟁으로 인도하고 이로써 특별한 상황에서 직접 사건의 과정에 간섭하고 인간에게 끔찍한 행동을 수행하게 한다. 그리고 그다음에 신은 자신의 '도구'를 지켜주지 못하고 인간 스스로에게 내맡긴다. 이로 인해 이 작품에서 '인간의' 비극의 시발점인 신과 종교를 통한 도구화의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또한 이미 이 작품에서 헵벨 작품의 공통적인 테마가 드러난다. 헵벨 스스로 그의 일기나 이론적인 글에서 피력한 바 있듯. 여기서는 신에 의해 인도되고 결국 버림받은 개인의 실존 상황이 - 유디트로 구체화된 채 -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 관계에서 남녀 간의 중요한 문제점이 그려져 있다. 즉, 홀로페르네스와 유디트의 상호 관계를 통해 헵벨의 전체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한 문제가 형상화되고 있는데, 이는 바로 남녀 양성의 대립과 인간에 의한 인간의 물화 내지 도구화다. 이러한 문제는 헵벨 자신이 오랫동안 몰두했던 개인적 삶의 테마이기도 하며 또 동시에 - 헵벨의 문학관과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이원론의 표현이기도 하다. 「유디트」이후에 나온 헵벨의 비극 작품들에서도 인간 상호 관계에서 대두되는 이러한 대립과 인간의 물화는 반복적 으로 나타난다.

 

 

 

 

작가소개
19세기 중반 독일의 가장 중요한 극작가 중 한 사람인 프리드리히 헵벨은 당시 덴마크의 식민지였던 북부 독일 홀 슈타인 지방의 소도시 베셀부렌에서 가난한 미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구조적인 빈곤과 가부장적 구속으로 인해 어두운 유년 시절을 보낸 헵벨은 어려서부터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이 어린 독학생은 교육과 교양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1827년,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자 헤벨은 당시 지역 행정관이자 교구장인 야코프 모르의 집에 들어가 빈궁한 생활 속에서 사환을 거쳐 서기의 일을 맡게 된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헵벨은 모르의 개인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고 거기서 법률, 문학 철학 등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습득한다. 이곳에서 그의 첫 시들이 탄생했으며 그중 일부는 고향의 지방지에 실리기도 했다. 1835년, 헤벨은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한 여류 작가 아말리에 쇼페의 경제적 후원을 받으면서 함부르크에 체류한다. 여기서 헵벨은 엘리제 렌징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에게 헌신적인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일상적인 삶과 문학적인 삶 사이에서 갈등하다 그녀와 이별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어 그는 1836년부터 1839년까지 하이델베르크와 뮌헨에서 법학 공부를 하지만, 곧 작가로서의 사명을 자각하고 학업을 중단한 뒤 함부르크로 돌아온다. 늘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던 그는 다행히 덴마크왕실 장학금을 받아 3년간 파리, 이탈리아를 거쳐 빈에 이르는 장기 여행을 하게 된다. 1844년에는 연극 미학에 관한 논문 「드라마에 대한 견해」로 에를랑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빈에서 헵벨은 삶에 일대 변화가 생긴다. 오스트리아의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헤벨의 뛰어난 문학성에 주목하면서 그를 경제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한다. 또한 헵벨은 그곳에서 당시 빈의 국립극장 부르크 테아터 전속의 유명한 연극 배우였던 크리스티네 엥하우스를 알게 되고 1846년 그녀와 결혼한다. 이때부터 그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이미 유명해진 작가로서의 삶을 누리게 된다. 1863년, 헤벨은 공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아 문학적으로 권위 있는 실러상의 1회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그동안 앓았던 관절 류머티즘이 악화되면서 헤벨은 빈에서 50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헤벨은 뮌헨에서 함부르크로 돌아온 뒤 완성한 첫 번째 비극 「유디트 Judith」(1840)가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문학적 명성을 얻게 된다. 1년 뒤 부부 간의 소통과 신뢰의 문제를 다룬 비극 게노페파가(1891), 그리고 이어 파리에 머무는 동안 시민 비극 「마리아 막달레나 (1843)가 완성된다. 소시민적 가부장적 세계의 편협한 명예 의식에 희생된 한 처녀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이 작품은 그의 주요 비극 중 유일하게 당대를 소재로 한 시대적 사회 극이라는 점에서 그의 문학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헤벨이 극작가로서의 생애에서 가장 왕성 한 문학적 성과를 거둔 시기는 빈에서 머물렀을 때다. 이 시기에 「헤롯과 마리암네(1848년)를 포함하여 개인과 공동체의 갈등을 극화한 「아그네스 베르나우어(1851), 시대적 대립과 인간성의 긴장을 묘사한 「귀게스와 그의 반지(1854),’ 이교 문화와 신(新) 문화의 대립과 투쟁을 그리고 있는 민족적 대서사시인 삼부 작 「니벨륭겐(1860) 등 주옥같은 비극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또한 역사비극 「데메트리우스(1863)는 그의 죽음으로 미완성으로 남았다.
1848년 혁명의 시기에는 '대독일주의' “와 '입헌 군주제'를 표방하면서 신문에 많은 시사 논평을 기고하고,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 후보로 출마하는 등 저널리스트이자 정치가로서의 역량도 과시했다. 게다가 시집(1842). 신 시집,(1847) 등을 출간하면서 헤벨은 시인으로서의 활동도 병행한다. 그의 시는 감정과 관념이 상징적 언어로 결합하면서 이름다운 감정을 노래한 서정시에서부터 관념성이 짙게 배어 있는 철학적 사상시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다양하다. 또한 그는 1835년부터 그가 사망할 때까지 28년 동안 써온 일기를 남겼는데, 이 유명한 일기는 후대에 '세계, 삶, 책 그리고 자신에 대한 성찰'로서 세계문학에서 '최상의 문학사적 기념비'이자 가장 진솔한 '삶의 고백'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