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알베르 까뮈 '오해'

clint 2018. 1. 18. 20:23

 

 

 

 

1944년 출간 ·초연(初演). 체코의 깊은 산골에 어머니와 딸 마르타가 경영하고 있는 여인숙이 있다. 두 사람은 돈이 많은 숙박객이 들면 수면제를 먹인 후 죽여 버리고 가지고 있는 돈을 빼앗아 버린다. 바다와 태양을 그리는 마르타는 남쪽으로 이사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거기에 20년 전에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온다. 그는 어머니와 동생을 놀라게 해주려고 신분을 밝히지 않고 투숙한다. 그녀들은 계획대로 그를 죽였으나 아들인 줄 알고는 자기들도 자살해 버린다. 그리스 비극의 숙명을 밑바닥에 깔고 신의 부재(不在)와 인간의 낙원 추방을 그린 걸작이다.

 

 

 

 

 

「오해」는 카뮈가 1943년 쓴 작품으로 20년 만에 돌아온 아들을 어머니와 동생이 알아보지 못하고 죽여버린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체코지방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당시의 시대적 암울함과 정서를 충분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절망만을 안겨주는 연극은 아니다. 불행을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은 바로 비극적인 것을 통해서 불행의 모습을 변모시키는 것이다. 「오해」는 현대의 줄거리 속에다 숙명이라는 고대의 테마들을 새로이 옮겨보도록 시도하고 있지만 이 극이 숙명에 대한 굴복을 감싸주고 있지는 않다. 이 극은 정직한 윤리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다

 

 

 

 

 

<오해(誤解)>는<까리귤라>에 비해 5년 뒤에 쓰여진 작품이지만, 1944년 점령하의 파리에서 공인되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쏘가 감옥에서 딱딱한 나무 침대와 지푸라기로 된 매트리스 사이에서 낡은 예전 신문 한 장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이색적인 사건이 실려 있었다. 오랫동안 집을 비운 남자가 여인숙을 경영하는 자기 가족의 집에 돌아와, 장난 삼아 이름을 숨기고 숙박한 결과, 친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 살해되었다는 사건이다. <오해>의 발상은 바로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의 유명한 소설<이방인>에 뒤이어 쓰여진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소위 줄거리라고도 할 수 있는 긴장미라는 것을, 작가는 어떻게 요리해 나갈 것인가? 작가의 역량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하겠다. 이 극의 테마의 고전적인 간결성도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고 있다. 기대와 신비에 싸여 있는 제1장에서부터, 관중들은 다음의 단순하고도 명백한 의문에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쟝은 떠나고 말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점이다. 어머니는 타성으로 죽이기를 꺼려하고 있다. 이국인 아내인 마리아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떨고 있으며, 남편 쟝의 어리석은 계획을 중단시키려 필사적이다. 늙은 하인이 쟝과 마리아가 같이 있는 장면을 보았다면, 말타가 쟝의 여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앗다면, 충분히 그를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말타도 또한 살인 행위를 망설이고 있었다. 말타가 물과 수건을 가지고 모빠의 방에 들어갓을 때에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양과 바다와 지중해의 멋진 풍경이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 떠올라왓을 때는, 그녀의 마음 속에서 다시금 피가 끓어오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어머니가 사이에 끼어들어 말타를 만류하고, 쟝이 드디어 도망칠 결심을 했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은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주제는 멜로드라마나 흥미 중심의 장면 전환에 적합한 극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까뮈는 그것을 '허무(虛無)'라는 두 글자로 새까맣게 먹칠을 해놓고 말았다. 마지막에 가서 행동은 거의 사라져 버려 뜻이 없어지고, 내면적인 대화만이 지루하게 계속된다. 회의가 그칠 사이없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며, 무대는 불안감이 지배할 따름이다. 제1차적인 쟝과 살인자들의 운명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고, 오로지 순간과 언어만이 남는다. 운명 같은 것은 보잘 것 없는 한 잔의 찻잔 속에 파묻혀 버리고만 느낌을 준다. 우리는 까리귤라의 정신 착란 속에서 운명에 대한 도전, 영웅적인 경멸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지만, 쟝의 경우는 마치 짐승이 죽어 가듯, 말 한 마디 잘못함으로써 간단히 죽어가고 잇는 것이다. 따라서 이 극이 성공작이라면, 다른 어떤 비극 이상으로, 환멸을 우리에게 갖다 주는 작품이 된다. 쟝의 그 끈질긴 선의도 말타의 그 얼음장같이 차가운 마음을 녹이지는 못햇고, 어머니의 마음 속에 다시 되살아난 정직한 마음도 살인 행위를 저지시키지는 못햇으며 말타는 하늘에 침을 뱉으며 언잖은 기분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 작품에서 까뮈는 또 하나의 난공사를 촉진했다. 그것은 작중 인물들에게 살인은 미리 계산되어 있고, 매우 기계적이다. 목적과 행동의 동기를 의식하고 움직인다. 특히 인간적인 성격을 모두 비인간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건 투명한 의식과 직업 의식이다. 따라서 까뮈가 시도한 것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강렬하게 나타냄으로써 이 극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입을 열 때마다 공포와 불안을 감돌게 하는 말타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통해서 비극적인 긴장미를 조성시킬 수밖에는 없었으리라. 속된 의미의 분신인 마리아, 살과 뜨거운 피로 된 마리아와 돌같이 차가운 말타와의 성격의 차이를 통해서 .

 

 

 

 

 

이런 뜻에서 말타라는 인물은 관중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인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 작주 인물들은 눅 한 사람, 현실적인 토대 위에서 뿌리 박고 있는 이가 없다. 말타에게는 과거가 없다. 그녀의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집 못간 노처녀의 반발일까? 그녀의 삐뚤어진 성격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전혀 말이 없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지만, 그녀의 신앙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여지도 없다. 즉, 이 연극은 모든 것이 현재에 국한되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까뮈는 오늘날의 새로운 현대 비극의 한 타이프를<오해>에서 시도하고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42년 소설 『이방인』의 발표와 함께 문단은 물론 광범위한 지식인 사회의 주목을 받으며 유례 없는 문학적 성공을 약속 받은 알베르 카뮈. 그는 『안과 겉』, 『결혼 여름』같은 시적 산문집으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기도 하고, 『페스트』나 『전락』같은 심각한 소설로 20세기 문학의 정점에 오른 작가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시지프 신화』, 『반항적 인간』같은 철학적 에세이로 실존주의 문학의대표적 작가로 지칭되기도 하며, 「오해」, 「칼리굴라」, 「정의의 사람들」같은 희곡으로 예술가로서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그 자신은 “실존주의가 끝나는 데서 나는 출발하고 있다.” 면서 자신의 문학이 어떤 한정된 범주로 규정되는 것을 거부했다.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그가 계획한 대작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면서 한창 기대를 모으고 있던 어느날 자동차 사고로, 아쉬움을 남기며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