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가 같이 살고 있는 집을 무대로 가족간의 에피소드가 재미있게 표현되는 단막 코미디이다.
희곡에도 나오는데로 516 혁명 전후로 쓰여진 작품이라 516 혁명을 옹호하는 대사도 일부 섞여 나오지만 현대라는 무대 설정과 같이 지금 공연되어도 그게 시대감을 못느낄 그런 작품이라 하겠다..
할아버지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이씨 부부는 박봉에 시달리며 매달 월급 전에 돈이 떨어져 쌀과 연탄을 외상으로 들여 놓게 되는데 외상값을 받으러 온 쌀집주인과 연탄 주인은 집안에서 들리는 과격한 소리에 지레 겁먹고 물러 간다.. 내용인즉 그런 외상값 독촉을 물리기 위한 이씨부부의 쇼 였던 것이다. 그리고 등기로 온 운편이 돈인줄 알았으나 아니고 시집간 이 집 딸이 남편과 싸워 이혼하겠다고 온 편지다. 그래서 이 집안은 가족회의를 소집해서 대책회의를 갖는데.. 결국 친정으로 온 명주가 사치스런 생활과 매일 영화 구경이나 하는 등 자신에 행실에 대한 남편과 시부모의 잔소리를 못참고 시집을 박차고 나온것으로 누가봐도 딸의 과오가 큰 행실로 가족들은 단결해서 딸에게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고 결국 철이 든 딸은 반성을 하는데.. 마침 사위가 찾아와 화해를 하고 다시 시집으로 들어 간다..
김영수(金永壽.1911.6.27∼1977.4.23)
소설가ㆍ극작가. 서울 출생. 배재고보, 중동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를 중퇴하였다.(1935∼1938) 1939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를 거쳐 해방 후에는 고려영화주식회사 선전부장, [고려문화] 편집국장, [어린이신문] 주간을 거쳐 6ㆍ25전쟁 때에는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과에 근무하였다. 학생시절 [동경학생예술좌]의 멤버로 신극운동에 가담했다.
1934년 희곡<광풍(狂風)>이 [조선일보]에,<동맥(動脈)>이 [동아일보]에 각각 당선되어 극작가로 데뷔, 1939년에는 소설<소복(素服)>이 [조선일보]에 당선됨으로써 소설도 쓰게 되었다.<소복>은<밤>(1940)과 함께 소설에 통속성을 투입시킨 것으로 주목된다. 이러한 경향은 해방 후 시정(市井) 풍속을 그린 신문소설<파도>(1949)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이 작품은 대중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시킨 기초가 되었다. 기타 단편<생리(生理)><코><밤><해면(海面)>, 희곡<단층(斷層)>등을 발표하였고, 8ㆍ15광복 후에는 [경향신문]에<파도>, [연합신문]에<여성회의(女性會議)>, [평화신문]에<화려한 성좌>등 주로 대중소설을 썼다. 라디오드라마는<박서방><사랑이 문을 두드릴 때>등이 있다.
희곡<혈맥>(1948)은 문교부 제1회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한편 안수길(安壽吉)의<북간도(北間島)>를 방송극으로 각색하는 등 방송작가로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장지 : 경기도 용인 공원묘지
극작가. 서울 출신.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중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제2고등학원을 수료한 뒤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광범한 독서와 쓰키지소극장(築地小劇場) 관람으로 문학과 연극에 눈뜨게 되었다. 대학 재학 중인 1934년에 단막극<광풍(狂風)>과<동맥(動脈)>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었다.
대학을 수료한 뒤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 창립동인으로 활약했고, 귀국 후엔 문학수업에 전념하여 1938년에는 단편소설<용녀(龍女)>(뒤에 ‘素服’으로 개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소설과 희곡을 발표했으며, 신문이 폐간되자 동양극장(東洋劇場) 전속극작가가 되어 신파극본을 쓰면서 소설도 발표했다.
민족항일기 말엽에는 생활을 위해 고려영화주식회사 선전부장, 유한양행 사원 등으로 근무했다. 광복을 맞아 어린이신문사 주간을 맡았고, 또 라디오드라마도 쓰기 시작했으며, 상업극단들과 연결을 맺고 대중적 작품을 많이 썼다.
1947년 10월에는 중간극(中間劇)을 표방하는 [신청년(新靑年)]이라는 극단을 조직하여 전속작가로 활동했고, 이 시기에 연 6, 7편의 장막극을 발표할 정도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6ㆍ25남침 중에도 피난지에서 작품을 발표하다가 1952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키나와(?繩)의 유엔군방송국에서 8년간 근무하는 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1960년에 귀국하여 방송드라마를 썼다. 그는 극작가ㆍ소설가ㆍ방송작가로 변신한 대중작가로서, 희곡ㆍ소설ㆍ방송극을 각각 20여 편이나 남겼다. 작품세계는 비극적 세태를 사실적 기법으로 대담하게 묘파한 것이 특징이다.
즉, 민족항일기에는 일본 통치가 빚은 우리 민족의 궁핍을 묘사했고, 광복 직후에는 식민지가 남긴 유산과 그 후유증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희곡은 사실주의 내지 자연주의 계열이며, 후기에는 낭만주의적 색채도 띠었다. 특히, 그는 쓰키지소극장에서 관람한 하우프트만이나 고리키의 작품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 데다 가난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민족의 궁핍화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환경에 대한 깊은 관심은 그로 하여금 우리나라 근대연극사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환경극작가(環境劇作家)가 되게 하였다.
【소설】<소복(素服)>(1939.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밤>(1940)<행렬>(1947)<파도>(1949)<돼지>(1950)<동경 통신>(1953)<외로운 사람들>(1956)<철둑을 넘은 곳>(1956)<혼돈(混迍)>(1959)<바람아 불어라>(1960.장편)
【희곡】<광풍>(1934)<동맥(動脈)>(1934)<단층(斷層)>(1939)<오남매>(1947) (여사장>(1947)<사육신>(1947)<혈맥(血脈)>(1948)
【시나리오】<성벽을 뚫고>(1949)<출격 명령>(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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