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아라발 '장엄한 의식'

clint 2016. 7. 7. 18:46

 

 

 

 

 

 

원제는 장엄한 예식이나 까바노자를 위한 예식으로 소개되어 공연되어지기도 함

 

<까바노자를 위한 예식(Le Gravd Ceremonial)>은 1963년에 발표된 것으로, 공황연극의 특성을 매우 많이 지니고 있는 환상극이며

제의적(祭儀的)인 작품이다. 작품소재는 Oedipus Complex를 극화(劇化)시킨 것이며, 주인공 '까바노자'가 "어머니를 죽였어요"라는 말에서

인간에게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잠재적 살인본능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까바노자'는 신체적 열등감을 지닌 유아적인 어른으로서, 어머니에 대한 도피의 수단으로 여자를 사귄다. 쇠사슬로 묶고, 채찍으로 때려 여자에게 고통을 받게 하여 그의 사랑을 표현한다.
'까바노자'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사상은 사랑과 죽음을 동일시하는데 있으며, 그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죽음으로 보상한다.

우리는 까바노자를 통해 인간의식의 보다 내면적 세계를 알게 되고, 작품의 분위기를 결정해 주는 싸이렌 소리를 긴박감 또는 '까바노자'의
극중 심리를 나타내 주고 있다. 부조리계열에 속해 있는 아라발은 이 작품에서 plot 대신 Situation (극적상황)으로 대체시키며 등장인물에게 성격이나 정신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주어 오브제화(object)시키고 있다. 즉 상황 속에서 느끼는 인물의 존재의식을 전달하고 있다.

 

 

 

서막 :
1장 - 벤치에서 엄마를 부르며 슬퍼하고 있는 까바노자. 그에게 다가오는 씰. 까바노자는 자신의 자기 어머니를 죽여서 이렇게 슬퍼하고 있다고 말하고 씰은 까바노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까바노자는 자신을 괴물이라고 밝히고 씰을 창녀 취급하면서 새디스트적 성향을 드러내며 그녀의 접근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유혹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그의 학대에 못 이겨 자리를 뜬다.
2장 - 다시 돌아온 씰. 엄마를 부르며 슬퍼하고 있는 벤치의 까바노자. 까바노자에게 꽃을 주려는 씰. 씰의 애인이 나타나 씰에게 까바노자를 떠나라고 하지만 그녀는 말을 듣지 않는다. 그녀 삶의 이유는 까바노자. 까바노자는 둘을 쫓아 버린다.
3장 - 벤치에 누워자는 까바노자. 이후 씰이 돌아왔다. 그녀는 채찍을 가져와서 그가 좋아하는 데로 자신을 때려주고 취급해주기를 바란다. 까바노자는 씰의 모든 생을 바쳐 자신을 섬길 것을 강요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녀의 유혹을 두려워한다. 결국 그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어머니의 시체를 함께 옮기자고 한다.

1막 :
1장 - 까바노자의 방. 아직 살아있는 어머니. 어머니는 트럼프를 하고 있다. 까바노자의 방은 사람크기만한 여자인형들로 가득차 있다. 방에 들어선 까바노자는 인형들에게 키스하고 포옹한다. 아주 섬세하게. 어머니는 그에게 그가 사랑하는 인형에 대해서 질투 어린 말을 한다. 그리고 밖에 있는 여자-씰-을 언급하면서 아들이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원망한다. 이윽고 어머니가 나가고 씰이 들어온다. 까바노자는 씰에게 남자의 옷을 입히고 면류관을 씌워준다. 씰은 까바노자의 방에서 남자옷에 면류관이 씌워진 여자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 여자는 전날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까바노자의 방에 들어와 결국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씰은 그녀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치우는 것을 도와주고는 자신도 그녀처럼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면서 그의 키스와 포옹을 원한다 침대 위에서 정사를 벌이려던 참에 까바노자가 그녀를 애무하여 그녀의 목을 조르려고 할 때 씰의 애인이 등장한다. 그는 그녀가 걱정되어 따라왔다. 씰은 숨이 거의 넘어갔다가 돌아오며, 시체를 봤다고 말한다. 하지만 까바노자와 함께 시체를 치웠던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윽고 까바노자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창문밖에서는 까바노자가 언제 치웠는지 그가 전날 죽인 여자의 시체를 경찰들이 찾아내 운반하느라고 소란스럽다. 실랑이 끝에 씰은 결국 까바노자의 집에 남기로 한다. 까바노자의 어머니는 씰에게 까바노자를 더 이상 볼 수 없어도 괜찮으냐고 말한다. 씰은 까바노자의 집에서 그를 위해 있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고 한다. 결국 씰은 까바노자 어머니의 시중을 들게 된다. 아주 혹독한 시중이다. 까바노자가 자기 마네킹 중에 하나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 그것을 자기 침대에 뉘이고 애무하는 동안 까바노자 어머니의 방에서 씰의 괴로운 신음이 들려온다.  암전.

2막 - 다시 공원 벤치. 리즈라는 여인이 다시 울고 있는 까바노바에게 접근하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는 씰에게 했던 질문들, 그러나 결코 속이는 말이 없이 리즈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간다. 그녀와 그는 도망치기로 한다. 리즈는 그를 위해서 마네킹처럼 언제나 벗고 앉아서 아무말도 하지 않겠다고 한다. 둘이 함께 나가고 어머니가 혼자 남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둘의 도망이 성공일지는 불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도착된 윤리관 통해 본 인간의 실존 -<장엄한 의식>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지만 공원에서 만난 미모의 처녀가 꼽추청년에게 끌려 죽여 달라, 죽여 달라고 매달린다.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청년은 청순한 처녀를 학대할 대로 학대한다. 씰이 비정상적인 불구의 카바노자에게 매료 당하는 까닭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그 청년의 어리광을 받아서 성인유아로 만들어 놓은 어머니에게 원인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바노자는 육체적으로 불구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불구이다. 그러나 그 불구성에 매료 당하는 여성심리는 천부의 모성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작가 아라발의 천재성이 있다. 있을 수 없고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을 연극으로 꾸며내는 아라발의 작품세계는 도대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부조리한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어지러운 혼돈의 악몽일 따름이다. 공원에서 만난 낯선 곱추청년의 거친 언행과 그 뒤에 있는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함과 꿈같은 에로티즘 때문에 씰은 애인을 버리고 카바노자의 방으로 간다. 그는 어쩌면 새디스트 같고, 그녀는 매저키스트 같다. 대사는 시적 언어가 구사되지만 성도착적 언어의 희롱은 감미롭다. 거기에 그는 어머니를 죽였다고 고백했고, 배경의 음향효과인 사이렌 소리는 무대에 공포와 불안감을 조성한다.

 

 


아라발의 작품구성은 연극적으로 치밀하다. 제1부의 공원 장면에서 우리는 부조리한 인간의 의식세계를 시화해 나가는 실존적 상황과 강박관념으로 해서 연극적 미로에 빠진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쓸개 빠진 헛소리에 불과한 대화의 지속에 우리의 의식은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키며 강한 감수성으로 반응한다. 그것은 호기심이다.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어머니 살해의 음모에다 성도착증 환자의 가학증과 거기 반응하는 청순한 여인의 피학대증 증세에 대한 잠재적인 염탐심리의 촉발이 이 연극의 도입부에 전개되어 나간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과 윤리도덕으로 봐서는 터부의 세계이다. 그것은 부도덕과 패륜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적어도 무대 위에 보일 수 없는 인간적 치부를 연극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내 보이는 이<장엄한 의식>은 ‘더러운 연극’이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더러운 연극이 장엄한 의식으로 둔갑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들 인간의 실존이기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가 성인의 세계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이 제의극은 잔학하다. 그래서 이런 연극은 잔학극의 범주에 든다. 이미 우리나라에 상연된바 있는 아라발의<환도와 리스>에서도 연약하고 불쌍한 리스는 환도의 잔학스러움에 희생이 된다. 그는 사랑하는 리스를 충동적으로 죽인다. 그 충동은 바꾸어 말하면 본능이고 자연이다. 그 본능과 자연은 성과 밀착되어 있다. 작가 아라발은 천진무구한 한 동심의 눈으로 위장해서 성과 밀착된 본능과 자연을 폭력으로 제시하고, 그 폭력에 굴복하는 여인의 생리를 엑스터시 상태의 죽음으로 돌려놓고 있다. 그러니까 청순한 씰이 콤플렉스 덩어리인 카바노자에게 매료되는 것은 본능과 자연의 카오스에 매료되는 것이다. 청순하다는 것은 질서에 대한 의식이고, 콤플렉스는 혼돈을 뜻하는 반질서 내지는 비정상인 것이다. 따라서 씰과 카바노자의 관계는 질서와 정상의 상태에 대한 반질서와 비정상의 관계이며, 그렇게 대립되는 두 세계는 현대성과 시원의 원초성을 상징할 수도 있다.

 

 

 

코스모스와 카오스의 상관관계가 성으로 말하면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의식이 된다. 그 둘은 서로 물고 물어뜯으며 피를 흘리며, 죽고 죽이는 황홀의 경지에서 일체가 된다. 연극적 구성으로 봐서는 중심부에 해당되는 카바노자의 방은 바로 카오스의 세계 그것이다. 그 카오스의 세계는 카바노자의 불구적 비정상을 드러낸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인형과 마네킹, 그리고 찢긴 팔뚝과 거꾸로 매달린 시체 같은 형체들, 그리고 장식처럼 치렁이는 쇠사슬과 수갑과 족쇄에다 벌거벗은 채 죽어 있는 생체의 여인 등이 공존하는 카바노자의 방에는 ‘죽이지 못한’ 어머니의 권세가 있다.
이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작가체험의 반영일 수 있다. 아버지를 배반한 어머니, 그리하여 가족과 아들을 배신한 어머니에 대한 애증의 앰비밸런스의 감정이 병적으로 이 작품에 투영된다. 아들은 넘치는 어머니의 과잉보호 아래 육체적으로 성인이 되어도 곱추처럼 불구일 수밖에 없고, 정신은 인형을 가지고 노는 동심의 어린이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인형과 마네킹을 애무하며 장난감을 부수듯 생체의 여인을 놀이 본능으로 죽이게 한다. 씰처럼 죽지 못한 처녀는 어머니에게 드리는 제물이 된다.
문제는 그런 새디즘을 매저키즘으로 받아내는 여성심리의 비밀에 있다. 매저키즘의 절정에서 죽음을 사랑의 극치로 받아들이려는 씰에게는 그녀를 구하려는 애인의 노력이 그렇게 속될 수가 없는 것이다. 비정상의 심리는 정상심리로 이해될 수 없고 그런 정상심리는 어쩌면 가장 세속적인 이해타산의 한 표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씰은 애인을 따라 이 카오스의 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더 지독한 피학대증의 증세를 앓으며 카바노자의 어머니에게 귀속된다. 어머니와 아들, 그들은 서로 병적인 의식의 피드백으로 물려 있는데 정상적인 의식의 씰이 구원되려면 그녀 자신이 더 깊은 매저키즘의 늪에 빠지는 길 밖에는 없다. 씰을 어머니에게 넘겨주고 카바노자는 메마른 마네킹을 안고 엑스터시에 오른다. 다시 무대는 바뀌어 제물을 찾아 공원에 나온 카바노자는 리즈라는 어린소녀를 손에 넣는다. 그러나 첫 장면과 달리 카바노자는 그녀를 인형을 태웠던 유모차에 싣고 어디론지 떠난다. 이 부분은 연극적으로 선명하지 않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반전이 있다. 씰의 경우와 달라서 아직 여인으로 성숙하지 않은 동심의 소녀는 어머니의 현실에서 독립하려는 카바노자의 성인의식에 동반하는 반려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씰처럼 스스로 동의한 성도착증의 제물이 될 것인지…. 그에 대한 대답은 제시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