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이 흐르고 있는 쾌락의 나라에 공주가 사랑을 찾아, 일생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 길을 나섰다. 처음으로 공주는, 어렸을 적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동물원에 갔을 때, 첫 눈에 반했었던 개머리를 한 왕자를 만나게 된다. 공주는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싫다는 대답이다. 개머리 왕자는 발등에 이별의 키스를 하려고 막아서는 공주를 밀쳐내고 떠나버리고, 절망하고 있는 공주에게 두 번째로 잘 차려 입은 매너 좋은 소머리를 한 왕자가 나타난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몸의 이끌림에 의해 공주는 소머리 왕자의 몸을 더듬게 되고… 그는 완력으로 공주를 육체적 사랑의 포로로 만들어버린다. 몸은 황소머리 왕자에게 마음은 개머리 왕자에게 빠진 공주는 슬픔에 더욱 빠지고 그 두 왕자는 결국 결투를 벌이다 죽고 만다. 두 사랑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공주는 슬픔과 비탄에 빠져 죽게 되고 만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동화적으로 또는 퇴폐적으로, 그리고 엽기적인 공포로 표현한 작품이다. 공포연극 속 '백색의 사랑'에서 "우리가 지금 만들어 내려 하는 연극은 현대적이지도 않고, 전위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며, 부조리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자유로우며 보다 나은 것에의 끊임없는 갈망이다"라고 페르난도 아라발은 쓰고 있다.

연극의 의식성 (憐式性) - 페르난도 아라발
나는 연극에 관한 이론은 가지고 있지 않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 모험과 같은 것이며 지식과 경험의 열매는 아니다. 몇 달 전 빠리에서 공연된 〈공황연극〉이 관객에게 다음과 같은 무대로 상연되었다. 알랙산드로 호도로브스키는 50마리의 비둘기가 들어 있는 상자를 열어 주고 그 중 한 마리를 산채로 목을 비틀자 그 놈은 조금씩 피를 토하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얼마 전 런던에서 피터 부룩은 ‘US’라는 제목의 공연을 했는데, 한 배우가 무대 위에서 작은 상자에 갇혀 있는 나비 떼를 풀어 주고 제일 큰 놈을 하나 골라 날개에 불을 붙이니, 나비가 이리저리 파닥거리다가 까맣게 타죽었다.
이것은 런던에서 뿐만 아니라, 파리, 뉴욕, 멕시코, 도쿄, 전 세계 어디서나 쉽게 이런 종류의 상연은 찾아볼 수 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연극인들 사이에 이런 일치된 경향은 연극으로 향한 똑같은 정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명해 주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내가 언급해 온 모든 무대라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 또는 다른 유사한 감각으로써,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규정지으려 드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연극의 해석을 극단적인 결론에까지 밀고나가 창조해 내려 한다. 우리들의 방법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연극을 하나의 제전(祭典)으로, 엄격한 질서의 의식으로 만들어 내려 하고 있다.
비극과 기놀(익살인형극 Guignol), 시와 통속성, 희극과 멜로드라마, 사랑과 에로티시즘, 해프닝과 집단의 이론, 불경 (不敬)과 신성, 죽음의 투자와 생의 앙양, 비열과 숭고, 이 모두가 한결 같이 제전 속에, ‘공황적인’ 의식 속에서 참여하는 것이다.
나는 유머와 시정(詩情), 공포와 사랑이 하나가 되는 연극을 꿈꾸고 있다. 그리하여 연극적인 제식은 돈키호테의 망상처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악몽처럼, 카프카의 K의 망상처럼, IBM이 밤을 이어 주어 인간의 꿈을 보는 것처럼, 하나의 〈오페라 멍디〉로 변모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연극적인 엄격한 이념으로 지배되어야 하는, 나아가서는 희곡에 관해 말한다면 혼돈과 생의 혼란을 반영함으로써 그 창작 활동은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에 와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행운일진데, 현대의 수학만이 대단히 미묘하고 가장 복잡한 희곡을 훌륭하게 직조해낼 수 있게 해 준다. 마찬가지로, 무질서 아래서 연출은 필수적으로 정확한 규범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연극이 열광적일수록 (공포 내지 선동에까지) , 매혹적일수록 (폭력 내지 숭고에까지), 희곡과 연출은 더욱 치밀성을 요구한다.
가장 놀라운 사건 속에서는 나의 경우 시적인 언어란 효과가 안 나는 것 같다. 관객의 주의력을 끈다든지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사건에 집중되어 자신을 잃어버리는 기교밖에는 되지 않고 있다. 연극에서 시나 시적인 대사가 탄생되는 것은 악몽에서이며, 그 메커니즘에서이고, 일상과 공상의 연관에서이며, ‘날으는 돌’ 처럼 감동적이고 직접적인 양식에서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한 시인이 내 작품 속에서 시의 두 가지 얼굴을 밝혀내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는 ‘광기의 돌’의 시적인 이야기와 다른 하나는 나의 희곡 작품이다.
우리가 지금 만들어 내려 하는 연극은 현대적이지도 않고, 전위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고, 부조리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자유로우며 보다 나은 것에의 끊임없는 갈망이다. 가장 찬란한 연극은 오늘날의 예술을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이미지가 풍요한 거울이며, 또한 모든 예술의 연장이며 숭하인 것이다
프랑스의 젊은 극단에서는 이 의식의 눈부신 지도자가 있다.
가르시아Victor Garcia, 라벨리Lavelli와 사바리Savary, 이 세 사람은 바로크적이며, 법외적 (法外的)인 세계를 우리에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맑은 불과 영매(靈媒)로 가득 찬 망상의 세계와 의상, 무대 장치, 음악, 소도구들이 모두 한 배에서 터져 나온 듯한 세계를 마치 소박하고 유니크한 만화경의 조화처럼 비춰 주고 있는 것이다. 행동은 한 유성에서 다른 유성으로, 절규에서 속삼임으로 비약하고, 성 앙뜨완느의 유혹에 갇힌 죄수
인 관객은 절망과 축복의 옷을 입은 마법사로, 희생물로 또는 요술사로 변신하는 것이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아라발 '구름위의 염소' (1) | 2016.07.04 |
|---|---|
| 아라발 '사랑의 삽화’ (1) | 2016.07.04 |
|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1) | 2016.07.03 |
| 기욤 아폴리네르 '티레시아스의 유방' (1) | 2016.06.30 |
| 해롤드 그레이 원작 '뮤지컬 애니' (1) | 2016.06.29 |